주간동아 252

2000.09.21

‘닥터 지바고’의 환생

  • 입력2005-06-21 13:5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닥터 지바고’의 환생
    가끔은 아주 어릴 때 보았던 옛날 영화가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요즘 영화들처럼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컴퓨터그래픽이나 특수효과는 없지만, 화면 가득 숨이 멎을 듯한 스펙터클이 펼쳐지고 긴 호흡의 장대한 스토리가 가슴에 긴 반향을 남기는 영화. 그런 영화들을 보다 보면, 지금은 희미해진 옛 사랑의 그림자를 아련하게 떠올리거나 책장 깊숙이 박혀 있던 고전을 꺼내 읽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같은 영화가 수십 년 만에 재개봉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려간 것도 옛날 영화가 자극하는 이런 ‘향수’ 때문이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1965년 작 ‘닥터 지바고’는 특히 아름다운 음악과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기억되는 영화. 중년의 영화팬이라면 지바고와 라라를 따라 눈 덮인 러시아 평원을 헤매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사막의 지평선을 차고 오르는 태양이나 평원을 가로지르는 열차의 장관은 텔레비전이 아닌, 오직 극장의 커다란 스크린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었고, 러시아 민속악기 발라라이카의 음색에 실려 영화 전편을 휘감아 도는 모리스 자르의 ‘라라의 테마’는 시대와 운명에 짓밟힌 두 연인의 비극적 운명을 애틋하게 풀어냈다. 또한 눈과 얼음에 덮여 있는 우랄산맥 근처의 저택에서 불안과 공포의 공기가 가득한 가운데 지바고와 라라가 꿈같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로맨티스트들의 가슴을 울리던 탁월한 명장면이었다.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대면한 첫 느낌은 70mm 필름으로 재개봉된 ‘닥터 지바고’를 볼 때와 비슷했다. 제52회 칸 영화제 오프닝 작품으로 선정되었던 이 영화는 프랑스-러시아-체코 합작의 대작으로 영상미의 명인으로 알려진 니키타 미할코프 감독에 의해 시네마스코프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유럽 영화사상 기록적인 제작비인 58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러브 오브 시베리아’는 시나리오 탈고에만 12년이 걸렸고 촬영기간 1년, 5000여 명의 출연진 등 엄청난 스케일과 러시아 내에서 ‘타이타닉’의 두 배가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등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감독 스스로 ‘이 한편에 영화 인생 전부를 걸었다’고 고백했을 정도. ‘닥터 지바고’의 데이비드 린 감독이 다시 환생한 듯, 미할코프 감독은 19세기 제정러시아의 귀족문화를 완벽하게 재현해내고 눈부신 설원과 삼림의 광활한 풍경 속에 안드레이(올렉 멘시코프)와 제인(줄리아 오몬드)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풀어놓았다.

    19세기 말 제정러시아 말기의 모스크바. 순진한 사관생도 안드레이는 친구들과 몰래 숨어들어간 열차 1등칸에서 아름다운 미국 여인 제인을 만난다. 그녀는 최신 벌목기계를 왕실에 납품하려는 발명가에게 고용된 로비스트. 첫눈에 서로에게 매혹된 그들은 이내 사랑에 빠지지만 제인은 안드레이의 학교 교장이며 황제의 오른팔인 라들로프 장군을 유혹해야 한다. 제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라들로프가 그녀에게 청혼하고, 질투심에 분별력을 잃은 안드레이는 그 동안 쌓아온 명예와 자신의 인생을 내던지며 파멸로 다가간다.



    음악에 대해 남다른 감각이 있는 미할코프 감독은 영화 곳곳에 모차르트와 쇼팽의 음악을 사용해 사관생도들의 열정과 진실, 안드레이와 제인의 운명적 사랑을 아름다운 선율 속에 녹여낸다. 추운 나라에서 온 2시간 40분의 사랑이야기가 좀 지루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온통 하얀 눈이 퍼붓는 러시아의 광활한 설원과, 거대한 가을 숲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는 장면들은 정말 장관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