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2

2000.09.21

고려인 마피아가 연해주 주무른다

하바로프스크등 3개도시 경제 주도권 장악…눈 밖에 나면 사업은 꿈도 못꿔

  • 입력2005-06-21 1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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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인 마피아가 연해주 주무른다
    1999년 1년 동안 고리대금 강탈 등의 방법으로 19조 원을 뜯어낸 ‘이탈리아 마피아(콘페데르센티 상업조합 보고서)’. 이들에 못지 않은 세계적 범죄조직이 ‘러시아 마피아’다.

    99년 러시아에선 300만 건의 범죄가 발생했다. 400여 명의 하원의원 중 100여 명이 범죄사건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살인사건 발생률은 세계 1위인 인구 10만 명당 20명. 1560억 달러의 외채를 지고 있는 나라에서 ‘돈 세탁 범죄’로 매달 10억∼20억 달러가 외국으로 새는 것으로 알려졌다(워싱턴포스트 보도). 부정부패, 마약, 매춘은 러시아 가정의 저녁식탁에 날마다 오르는 ‘보드카’처럼 일상화됐다.

    정부도 ‘노터치’ 성공보장 확실한 사업파트너

    이런 혼란의 한가운데 바로 ‘러시아 마피아’가 있다. 프랑스 파리2대학 현대범죄연구소는 “러시아 마피아가 러시아 경제의 40%를 지배한다”고 밝혔는데, 러시아 국민 대부분은 이 조사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난 8월 하순 러시아 연해주를 취재한 ‘주간동아’는 연해주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마피아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이들은 ‘고려인’들이었다. 이들은 수천여 개로 추산되는 러시아 마피아조직 중 극동도시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를 세력권으로 둔 ‘고려인 마피아’를 위해 일한다고 했다. 고려인 마피아의 실존 여부가 확인됐다는 점이 먼저 의미 있는 일이었다. 또한 마피아 관계자, 고려인, 현지진출 한국인을 상대로 한 이번 취재를 통해 언론과 일반인들에게 ‘접근불가능의 세계’였던 ‘연해주 마피아’의 실상이 생생하게 포착됐다.



    8월26일 오후 기자는 한국인 사업가 K씨와 함께 러시아 연해주 남부지방의 한 농장을 찾았다. K씨는 연해주 사업진출을 앞두고 현지 유통망 확보에 관한 자문을 얻기 위해 이 농장을 방문했다. 기자가 K씨와 동행한 것은 ‘농장주인인 고려인 L씨가 고려인 마피아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고려인 L씨는 K씨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L씨는 “멀리 남한에서 동포들이 왔으니 내가 오늘 ‘안배’(술과 음식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뜻하는 고려인식 표현)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8시 우수리스크 시내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을 때 L씨는 고려인 사업가라는 A씨를 데리고 나왔다. “화끈하게 한잔 하자”는 L씨의 제안에 따라 참석한 사람들은 보드카 6잔을 거푸 돌리며 건배를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기자는 L씨에게 “당신이 마피아 일을 한다고 들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잠시 후 알게 된 일이지만 이날 동석한 A씨는 우수리스크 시내에서 활동하는 고려인 마피아의 중간 보스였다. L씨는 연해주에서 투자를 모색하던 한국인 사업가 K씨에게 A씨를 소개해주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L씨와 A씨는 비교적 솔직하게 대답했다. L씨는 “고려인 마피아와 합작으로 농장을 꾸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고려인 마피아가 40%의 자금을 투자하고 대외적 문제를 보호해주는 대신 L씨가 작물 재배와 판매를 맡아 농장에서 나오는 수익을 마피아와 나누는 방식이었다. 이같은 ‘마피아와의 공생’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L씨와 마피아 모두 많은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L씨는 “연해주에 오면 연해주식으로 사업해야 한다. 고려인 마피아 펀드가 투자한 사업이라면 정부도 건드리지 못한다”고 말했다. L씨는 이날 저녁 성공을 보장해주는 가장 확실한 사업 파트너로 마피아를 한국 사업가에게 추천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연해주에서 고려인 마피아의 위상은 실제로 어느 정도쯤 될까. 네가지 실례가 있다.

    2000년 8월27일 오후 9시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지나는 우수리스크역 앞 광장. 20여 대의 승용차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연해주에는 자가용의 택시영업이 만연해 있다. 며칠만 장거리운행을 하면 사무직의 한 달치 월급보다 수입이 좋기 때문이다. 즉석에서 기자와 8만원에 12시간 전속계약을 한 승용차 운전자 니콜라이씨는 “수입의 30%는 세금으로 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돈을 거둬가는 곳은 세무서가 아니다. 그는 고려인 마피아에게 내는 자릿세를 ‘세금’으로 표현한 것이다.

    니콜라이씨의 승용차는 도요타 9인승 밴이었다. 연해주에서 움직이는 거의 모든 차들은 일본에서 수입한 낡은 중고차들이다. 이 차들이 일본을 건너와 러시아 시민들에게 판매되기 위해선 고려인 마피아를 포함한 마피아단체의 손을 거쳐야 한다. ℓ당 300원 정도인 휘발유의 유통망 역시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다. 마피아가 없으면 연해주에선 차 한 대 굴러다닐 수 없는 셈이다.

    8월28일 오전 10시 우수리스크 시내 한 꽃시장은 활기에 넘쳤다. 네덜란드에서 주로 수입하는 꽃값은 2, 3일치 식사비보다 비쌌다. 그러나 연해주인들은 “저녁은 굶어도 식탁 위 꽃병은 비워두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꽃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꽃시장은 이곳에선 알아주는 알짜사업이다. 이날 시장에서 자리를 잡고 꽃을 팔고 있는 50여 명의 소매상들은 대부분 슬라브계 백인들. 이들은 고려인 마피아에게 돈을 바치지 않으면 당장 쫓겨난다. 이 도시의 꽃 유통망도 고려인 마피아가 ‘접수’했기 때문이다.

    8월28일 오후 10시 우수리스크의 한 레스토랑. 춤을 추는 손님들 사이로 몇 명의 젊은이들이 대마를 말아서 피우고 있었다. 연해주에선 가정에서도 대마를 재배해 판매할 정도로 대마초 복용은 아주 보편적인 일이다.

    최근 이곳에서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마약은 토끼무늬가 새겨진 LSD 알약, ‘Euphedrinum’으로 불리는 중국산 치료약, 헤로인 등이다.

    고려인 J씨는 40달러만 주면 1g의 헤로인을 2시간 안에 구해주겠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그는 “헤로인은 중앙아시아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생산돼 ‘카프카스마피아’에 의해 연해주로 전해지고 있으며, Euphedrinum은 중국 만주에서 바로 넘어온다”고 말했다. J씨가 다니는 대학 남학생의 50% 이상이 마약을 하고 있는데, 연해주의 마약 복용인구가 워낙 많아 정부도 손을 쓸 수 없다고 한다. J씨는 “마약은 엄청난 수입원이다. 고려인 마피아가 연해주 내 마약의 대량유통에 관련돼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국농업전문학교의 연해주 연수생 이모씨는 최근 머리를 노랗게 염색했다. 동양인 탑승 승용차에 대한 러시아경찰의 잦은 검문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이씨는 고려인 마피아에 대한 현지 시민들의 인식을 이렇게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시민들은 마피아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시민들은 오히려 부패한 경찰과 관리들에게 더 적대감을 보인다.”

    고려인 마피아 조직원들은 예외 없이 총으로 무장돼 있다. 한 한국인 장기거주자는 “경찰과 군대는 마피아와 절대 싸우지 않는다. 마피아는 무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정부의 권력기관 내부와 복잡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 경찰이 피치 못할 일로 마피아 관계자를 검거할 땐 반드시 복면을 착용한다”고 말했다.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은 “강력한 마피아가 정부를 대신해 비효율적 사회시스템의 숨통을 틔워준다”며 마피아에 우호적인 성향을 보인다. 한 러시아인 사업가는 “살인적 세금, 복잡한 허가절차와 난해한 법률, 비협조적인 공무원으로부터 기업의 이익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로비스트’가 바로 마피아다. 마피아의 로비는 어디든 다 통한다”고 말했다. 마피아가 재산을 지켜주는 대신 마피아에게 세금을 내는 현실에 만족하는 상인들도 많다고 한다.

    고려인 마피아는 연해주를 무대로 국제무역, 유통, 농업, 금융업에서부터 자릿세 받기, 마약, 매춘에 이르기까지 수익이 나는 사업이라면 가리지 않고 손을 대고 있었다. 고려인 마피아 관계자 L씨와 A씨에 따르면 고려인 마피아는 하바로프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등의 3개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최고보스는 하바로프스크에서 국제무역을 하는 고려인이다. L씨와 A씨 일행은 고려인 마피아의 위상에 대해 “고려인 마피아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러시아 마피아 조직이 여러 개 있지만 연해주에서만큼은 고려인 마피아를 모두 ‘형님’으로 받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수리스크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에서 고려인 마피아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벌이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연해주의 고려인 마피아와 한국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마피아가 중개하는 연해주와 한국 간의 ‘인터걸’ 무역은 이미 성업중이며 마약, 총기거래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연해주 현지에서도 많은 한국인 사업가들이 K씨처럼 고려인 마피아와 접촉하고 있다. ‘마피아를 잘 활용하면 연해주 진출에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인 사업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려인 사회에선 ‘마피아가 금전문제의 보복으로 하바로프스크에 유학중인 한국인 사업가의 딸을 살해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한다.

    한국인 사업가 K씨는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와 소수민족으로 어렵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고려인 마피아의 활동을 보고 충격받았다”고 말했다. 연해주의 고려인사회 전체가 마피아 천국인 범죄집단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젠 마피아를 빼놓고 고려인사회를 얘기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고려인 마피아의 존재는 러시아 한인사회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꿔놓을 만한 일이다.

    L씨와 A씨는 ‘주간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우수리스크시 고려인마피아 최고보스의 ‘실명’을 밝혔다. 그는 연해주 현직 정치인이자 이 지역 최고의 기업가로 알려진 고려인이며 한국에도 잘 알려진 유명인사였다. 고려인 마피아가 연해주의 정치-경제-범죄세력 간 연대를 통해 탄생됐으며, 그 기반이 연해주 지도층에 탄탄히 뿌리내려져 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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