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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형식주의 벗어나야 법이 산다

형식주의 벗어나야 법이 산다

  • 법은 있으되 지켜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형식주의 때문이다.
  • 형식만 중요시하다 보니 껍질은 있는데 내용은 없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좋은 제도가 도입돼도 형식만 갖춘 다음 내용은 곧 우리 식으로 변질되고 있다.
  • 예컨대 아침에 백화점에 가면 젊고 예쁜 여직원들이 거의 45도로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한다.
  • 그러나 그 형식적인 절차가 끝나는 순간, 고객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달라진다.
형식주의 벗어나야 법이 산다
22년 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미국유학을 떠날 때 일이다. 당시 국내 외환법은 장기체류 해외여행객의 경우 미화 1000달러까지만 갖고 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풀브라이트 재단에서 여행경비로 40달러를 주기에, 나는 960달러만 환전해서 출국했다가 동료 유학생들의 비웃음을 샀다. 모두들 자기가 아는 은행직원이나 암달러상을 통해 수천 달러씩 환전해 가져왔는데, 나만 바보처럼 규정을 지켜 ‘손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찌 된 셈인지, 우리 사회는 법을 지키는 사람이 손해를 보고 바보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법은 공동의 약속이기 때문에 꼭 지켜야만 한다. 미국의 운전면허 필답고사에 나온다는, “고속도로에서 왜 과속하면 안 되는가?”는 문제에 대한 정답이 “법이니까”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같았으면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이 위험하니까”를 정답으로 골랐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수은콩나물과 석회두부를 기본으로, 심지어는 발암물질이 들어 있는 묵, 납이 든 게, 쇳가루가 섞인 고춧가루, 그리고 황산으로 만든 가짜 참기름까지도 먹고 있다. 불량식품 업자들이 법을 우습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용 금지지역인 비행기와 병원에서조차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휴대폰 소유자들 역시 사회 규약에는 별 관심이 없다.

거리에서는 여전히 행인들이 무단횡단을 하고, 흡연자들은 담배꽁초를 버리며, 운전자들은 차창 밖으로 침을 뱉는다. 법을 지키면 바보가 되는데 누가 법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래서 뜻 있는 국민들은 갈수록, 불특정 다수에게 고의적 살인을 시도한 식품업자를 중형에 처해 불량식품을 영원히 근절했다는 이웃나라와, 강력한 법 집행으로 그림같이 깨끗한 거리를 만들어놓은 싱가포르를 부러워하고 있다. 음식에 독이 들어 있는 나라와, 법이 지켜지지 않는 공동체는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법은 있으되 지켜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형식주의 때문이다. 형식만 중요시하다 보니 껍질은 있는데 내용은 없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좋은 제도가 도입돼도 형식만 갖춘 다음 내용은 곧 우리 식으로 변질되고 만다. 예컨대 아침에 백화점에 가면 젊고 예쁜 여직원들이 거의 45도로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한다. 그러나 그 형식적인 절차가 끝나는 순간, 고객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달라진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큰절을 하는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1차선 진입 허용 후 벌어지고 있는 화물차들의 난폭 운전, 의약분업 후 적발되는 병원과 약국의 담합, 온갖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초중고의 수행평가, 그리고 결국은 성적 우수생을 위한 제도로 전락한 고교장 추천제 같은 것들 역시 원래 의도와는 달리 내용이 변질된 경우일 것이다.

명분을 내세우다가 늘 실리를 잃고 마는 것도, 전통과 관습에만 매달려 변화를 거부하는 것도, 그리고 모든 분야를 하나의 틀에 맞추어 평가하고 개혁하려 하는 것도 모두 우리 사회에 면면히 흐르고 있는 형식주의의 산물이다. 대학이 변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변화는 각 분야의 특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져야지, 한 가지 형식과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해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내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법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어야만 한다. 만일 당국이 불량식품을 근절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형량을 대폭 늘려 엄격하게 집행함으로써 형식적인 단속과 처벌을 실질적인 내용 위주로 바꾸어야만 한다. 법을 존중하고 형식주의에서 과감히 벗어나는 날, 우리는 비로소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간동아 2000.09.07 250호 (p10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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