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1

2000.04.27

땀과 시간만 먹는 ‘배반의 종잇장’

경비지도사·기능검정원 등 수두룩… 멋모르고 준비 땐 ‘인생 망쳐’

  • 입력2006-05-19 1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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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땀과 시간만 먹는 ‘배반의 종잇장’
    1인 2자격증 갖기 운동, 군 장병 컴퓨터 관련 자격증취득 의무화, 국가공인 전자상거래사 자격증 학원 대성황….

    올 들어 자격증 열풍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인터넷 관련 첨단 직업군이 속속 등장하고, 이름도 생소한 새로운 업무들이 미래의 ‘유망직종’으로 소개되면서 관련 자격증취득을 위해 취업 준비생들의 도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산업인력공단 자격증담당 박동준씨는 “직업의 전문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바람직한 현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자격증 붐의 이면에선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는 선의의 피해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과장선전, 발급지연, 장삿속, 특정 응시자 특혜, 부실시험과 같은 문제가 국가가 주관하고 공인해 주는 자격증시험에서조차 속출하고 있는 것.

    황대성씨(28)는 지난 99년 10월31일 경찰청이 주관한 경비지도사자격 시험에 합격했다. 44시간 연수교육만 받으면 그에게 자격증이 교부되는데 6개월이 지난 올 4월이 되도록 교육을 받으라는 통보가 오지 않았다. 경찰청 인터넷사이트에 올라 있는 연수일정도 엉터리였다. 이 시험에 합격한 전북 남원시 노암동 박병기씨는 “경찰은 연수기관을 선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국가시험이 이렇게 주먹구구 식으로 시행될 수 있는가”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연수교육 담당기관에선 4월10일께 사과문을 돌렸다. 그러나 7500명에 이르는 합격생들의 연수는 11월이 돼야 모두 끝난다. 시험에 합격된 사람이 자격증을 손에 쥐는데 1년이 걸리는 셈이다.



    황씨는 지난 99년 6월부터 4개월 동안 꼬박 시험공부에 매달려야만 했다.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전형료 1만7000원, 학원비 20만원, 책값 5만원, 연수교육비 9만원 등 총 35만원 정도가 소요됐다.

    그러나 어렵게 딴 자격증이 얼마나 실용가치가 있을까. 현행법상 국내 경비업체는 경비지도사를 두도록 하고 있다. 사설학원들은 이 시험 응시생들을 모집하면서 ‘21세기 각광받는 업종이다. 경비지도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경비반장으로 들어가면 월 200만∼300만원 수입이 보장된다’고 광고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서울 ㈜에스원의 경비 담당 이선덕주임은 “‘경비지도사 자격증이 있는데 나를 경비반장으로 모셔가라’는 전화를 많이 받고 있다. 과장광고를 그대로 믿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법정 정원의 10배에 이르는 경비지도사를 이미 확보하고 있다. 다른 경비업체에서도 자격증 하나 있다고 경비반장이 될 수는 없다. 최소 10년의 경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경비업체는 1700여 곳이지만 경비지도사는 9900명이나 된다.

    황씨는 “이 자격증을 따도 월 100만원 수입의 일자리도 얻기 힘들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결국 관련업계와 학원측의 배만 불려주는 시험인 것이다. 경찰과 사설학원만 믿고 자격증 취득에 매달려 허송세월한 게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런 일은 ‘상습적’이었다. 경찰청은 기능검정원자격(운전면허시험감독) 시험을 주관하면서 3100여명을 선발했다(적정인원 800여명). 서울 S자동차학원 김진영과장은 “지금 검정원은 남아돈다. 이 자격증을 취득하고도 사용 못하고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경찰청주관 운전강사자격시험 합격생들은 서울에서만 연수교육을 받아야 했다. 9500명이나 되는 지방거주 합격생들이 일주일 동안 서울의 여관에서 숙식하며 교육받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사설학원들이 연간 4억원을 벌 수 있다며 노다지 자격증이라고 광고하는 국가공인 관세사자격증. 이 말만 믿고 이 시험공부에 뛰어들었다가 ‘인생을 망쳤다’는 이모씨(34)는 “관세법 등 8과목의 출제문제 난이도는 매우 높다. 일반 응시자의 합격률도 3% 내외였다. 사법시험 공부하듯 2년에 걸쳐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 그러나 무역회사에서도 자격증 하나만 보고는 채용해 주지 않았다. 수습교육을 받고 할 수 없이 개업했는데 고객이 거의 없었다. 전국에 이미 1500여명의 관세사가 배출돼 있는데 이중 밥벌이하는 사람들은 100명 내외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자격증 하나 때문에 이제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빠졌다.”

    관세청 노종일과장은 “관세사자격증에 대한 과장-선동광고가 심하다. 장밋빛 꿈을 꾸다 좌절을 맛보는 취업준비생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나마 이런 자격증들은 취득 기회 마저 불공평하다. 20년 이상의 근무경력이 있는 관세청 직원들은 관세사 자격증을 ‘거저’ 얻는다. 앞으로 직원 1000여명이 이런 식으로 이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일반 응시생들로선 힘 빠지는 일이다. 경비지도사 자격증 역시 경찰은 시험과목 4과목 중 1과목만 보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대부분의 국가공인자격시험을 주관한다. 4월 현재 이 기관이 맡은 자격시험 수는 678종. 지난 99년엔 285만명이 응시했다. 올해도 사회조사분석사, 직업상담사, 조리산업기사 등 5종목이 새로 생겼다.

    시험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을까. 3월18일 D대학에서 열린 인력공단주관 ‘전산응용건축제도 기능사’ 실기시험에선 한국 국가공인 자격시험의 부끄러운 단면이 드러났다.

    다음은 응시생 천성오씨가 ‘청와대 신문고’에 제출한 민원내용이다. “어떻게 실기시험에 배정된 컴퓨터의 절반이 고장이 날 수 있는가. 감독관은 ‘작동 안되는 컴퓨터는 응시생 본인책임’이라고 몰아붙였다. 대학 관계자는 ‘우리보고 어쩌란 말이냐’고 했다. 어떤 사람은 답안지가 저장이 안돼 울며 나갔다. 어떤 사람들은 컴퓨터를 뜯어서 하드를 교체하거나 플로피디스크드라이브를 교체하면서 시험을 봤다. 메모리용량이 적어 몇 십분씩 시간만 버리다 결국 시험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산업인력공단 관계자는 4월12일 민원내용의 사실 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런 일은 자주 발생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관계자의 설명. “공단의 자체 실기시험장은 6곳뿐이고 전국 22개 기관의 시설을 빌려서 시험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실기시험용 기기들이 작동이 잘 안돼도 고쳐달라고 말하기 어렵다. 컴퓨터 관련 국가공인 시험은 20여 종인데 남의 시설에 실기시험용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곧잘 속도도 느려지고 에러가 생기곤 한다.” 국가시험이 이 정도로까지 허술하게 치러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컴퓨터를 중심으로 봇물을 이루고 있는 민간업체 주관 자격증시험에서도 응시생들이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채우철씨는 “지난 99년 11월 J협회가 주관한 인터넷 정보검색사 2급에 합격했으나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자격증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자격증시험의 합격자는 무려 1만7000명. J사는 책값을 합쳐서 응시생 한 사람 당 6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합격자가 너무 많아서 자격증 제작업무에 차질이 생겼다는 게 J협회측의 설명이었다. 컴퓨터 업계에선 “J협회는 쓸모가 없는 자격증을 남발하며 수입 올리기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엔 지난 99년 한해 동안 284건의 자격증취득과 관련한 소비자들의 피해가 접수됐다.

    하나의 자격증을 따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그만큼 그 자격증에 ‘배반’당했을 때의 손실 또한 크다. 자격증시대. 전문가들은 국가기관의 무성의와 민간업체의 과도한 상술이 없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소비자보호원 생활문화팀 박인용팀장은 “응시생들에겐 효용가치를 엄밀히 따져 자격 시험을 선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관·기능 조화… ‘고속철 1번지’ 예약

    서울발 열차 첫 정차… 아산·천안시 역 이름 놓고 줄다리기


    연면적 1만152평의 충남 아산시 ‘4-1공구 역사’. 서울발 고속열차의 첫 번째 정차역이다.

    동대구 역사나 대전 역사보다 최소 7년이나 빨리 완공되는 최초의 고속철도 역사. 산허리를 뚫고 나온 철로와 높이를 맞추기 위해 역사의 4층 옥상 위로 기차가 지나간다. 플랫폼도 물론 옥상에 있다. 스테인리스-유리-철골구조물로 꾸민 지붕과 역 내부, 아치형 입구도 한국의 기존 철도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역 이름을 놓고 아산시청과 천안시청이 서로 대립해 결정을 못 내리고 있을 정도로 충청도 중부지역의 역세권 개발에 대한 기대감 또한 크다.

    고속철도공사의 일번지인 이곳에서 대전출신 안광민씨(40)는 역사지붕 건설작업을 하고 있다. 4월14일 그의 일과에서 고속철도 공사장 사람들의 특별한 삶을 엿볼 수 있었다.그는 오전 7시 플랫폼에서 15m 높이의 지붕 골조 위로 올라갔다. 그 전에 간단한 체조와 구호제창이 있었다. 현장소장 황광순씨가 “이슬을 조심합시다”고 외치자 30여명의 지붕작업 근로자들은 “좋아, 좋아”라고 복창했다.

    안씨는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고 오후 6시까지 하루종일을 공중에서 보낸다. 그는 폭 20cm의 철제 빔 위에서 자신의 몸을 지탱해야 한다. 안씨는 이 일을 98년 말부터 해왔다. 3중으로 안전그물이 쳐져 있지만 조금만 부주의하면 사고가 날 수 있다. 비가 1mm만 와도 미끄러워 작업을 못할 정도다. 안씨는 이날 볼트를 죄는 작업을 했다. 무거운 철근을 들고 좁디 좁은 철제 빔 위를 걸어다니며 용접할 땐 서커스단원이 따로 없다.

    시공사는 그에게 합숙소와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작업은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없이 계속된다. 비가 오는 날이라야 가족을 보러 대전에 간다.

    그는 이 일이 위험하지만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30년 전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던 근로자들도 비슷한 기분이었을 겁니다. 비행기 활주로처럼 뻗어 있는 역사 위에 후세에 전해질 아름다운 지붕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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