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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선생님이 건네주신 ‘쪽지’

선생님이 건네주신 ‘쪽지’

선생님이 건네주신 ‘쪽지’
나에게는 참 예쁘고 소중해서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하지 않는 나만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바로 고교 시절의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마음이 따뜻한 분이셨다. 그리고 지혜로우셨다. 고1 여학생의 풋내나는 감정 표현을 예쁘고 소중하게 포장해 주실 줄 아셨다.

체육을 담당하셔서 그랬는지 선생님은 교무실이 아닌 학생과에 따로 계셨는데 그 점은 나에게 여러 가지로 편의(?)를 제공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해 막 익은 앵두를 집에서 따다가 살짝 가져다 놓거나, 선생님 책상의 꽃을 항상 돌보고 수시로 음료수나 초콜릿을 가져다 놓기가 수월했으니까.

방학 때는 물론 학기 중에도 1주일에 한두 통의 편지를 선생님께 보냈고, 때로는 첫눈이 짝수날 오는지 홀수날 오는지 내기를 하자고 해 선생님과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때 선생님의 안내로 대학로엘 처음 갔었다.

그러나 고3이 되면서 체육 선생님이 바뀌는 바람에 선생님을 볼 기회도 줄었고, 나 역시 대입을 앞둔 수험생이라 예전처럼 선생님을 ‘귀찮게’ 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운동장에서 수업하시는 선생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으니까.



그렇게 점점 고3의 무게에 눌려가던 어느 날 학생과에서 날 부른다는 전갈을 받았다. 말만 들어도 긴장되는 학생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학생과가 보이는 복도 모퉁이에 그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뒷짐진 손에서 검정 비닐봉투를 내미시며 미소를 지으셨다. 그 안에는 과자가 이것저것 들어 있었고 “힘내서 열심히 공부해” 라는 격려가 담긴 쪽지가 딱지처럼 접혀 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검정 봉투와 쪽지를 받았다.

막 대학에 입학해서 내가 겨우 도서관을 이용하는 데 익숙해졌을 무렵, 선생님은 예쁜 공주님을 첫 아기로 얻으셨다. 마침 선생님 결혼 1주년이기도 해서 작은 케이크와 선물을 드렸다. 그 뒤로도 몇 번 선생님을 뵈었다.

나는 열심히 사시는 선생님에게서 인생을 배운다. 노래 모임을 만들어 YWCA에서 공연하실 땐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 축하해 드렸고, 방학 동안 백두대간을 몇 차례에 걸쳐 완주하실 때는 행여 몸 상하지 않으실까 우려하면서도 선생님이 참 자랑스러웠다.

선생님은 나에게 오래된 일기장 같은 분이시다. 그 안에는 거짓없는 내 모습이 담겨 있어 소중하고, 꺼내볼 때마다 가슴 설레게 만들어 애틋하다.

어느덧 내가 그때의 선생님 나이만큼 되었다. 한동안 소식도 전하 지 못했는데….

“선생님, 늦게나마 새해 인사 드릴게요.”



주간동아 2000.02.24 222호 (p1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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