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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법학교재 표절사건

“베스트셀러 ‘민법강의’는 표절”

김준호교수 집필 법학교재… “곽윤직교수 네 권의 책 중에서 상당 부분 그대로 옮겨”

“베스트셀러 ‘민법강의’는 표절”

“베스트셀러 ‘민법강의’는 표절”
현직 대학 교수가 집필한 법학 교과서가 원로교수의 다른 교과서를 거의 그대로 표절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문제의 교과서는 연세대 김준호교수(법학)가 집필한 ‘민법강의’(법문사). 지난 63년 초판 발행 이후 현재까지 이 분야의 필독서로 꼽히고 있는 곽윤직 서울대명예교수의 ‘민법총칙’ ‘물권법’ ‘채권총론’ ‘채권각론’ 등 네 권의 저서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곽교수가 집필한 네 권의 민법 교과서는 법학을 전공한 학생이건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건 필독서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 분야에서는 ‘바이블’로 꼽히는 책이다. 곽교수는 91년 정년퇴임해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로 재직중이며 법학을 전공한 사람치고 그의 민법 교과서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이 분야의 ‘대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출판계에서는 63년 초판을 발행한 이 책이 여태까지 40만부 이상 팔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준호교수의 저서 ‘민법강의’는 93년 초판이 발행된 뒤 97년 이후 수험생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1년에 3만∼4만여권이나 팔리는 이 분야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1년에 3만부 이상 팔리는 것은 법학서적 시장에서는 기록적인 판매부수다. 곽교수의 책이 단행본 네 권에 총 2400쪽이 훨씬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 비해 ‘민법강의’는 1400여쪽 분량의 한 권의 책에 민법총칙, 물권법, 채권총칙, 채권각칙을 모두 담고 있는 데다 사례 위주로 짜여 있어 수험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책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는 필독서로, 법대 1학년생에게는 중요한 참고서로 꼽히고 있다. 일부 대학에서는 ‘민법강의’를 민법 교과서로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교수의 ‘민법강의’가 곽교수가 펴낸 네 권의 민법 저서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사실은 이 책으로 공부해 본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으로 먼저 알려지기 시작했다. 10년째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한 수험생은 “두 권의 책은 다른 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체계와 표현 방식이 유사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두 권의 책을 비교, 검토한 결과 곳곳에서 매우 유사한 기술방식과 표현 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곽교수의 저서 중 일부인 ‘권리행사의 한계·제한’ 부분을 살펴보자. ‘권리 자유의 원칙’이라는 단락은 이렇게 시작된다.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權利本位로 구성된 近代私法에서는, 權利의 행사는 權利者의 ‘自由’에 맡겨져 있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權利를 行使할 義務가 權利 속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親權과 같이,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인정되고, 따라서 그것을 행사할 義務가 따르게 되는 權利도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이다.’(곽윤직 저 ‘민법총칙’ 91쪽)

김교수의 ‘민법강의’에서 ‘권리행사의 한계’ 부분에는 ‘권리 자유의 원칙’ 대신 ‘권리행사자유의 원칙’으로 제목이 바뀌어 있다.

‘개인주의·자유주의를 기조로 하여 권리본위로 구성된 근대민법에서는, 권리의 행사는 권리자의 ‘자유’에 맡겨져 있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시 말해 권리를 행사할 의무가 권리 속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親權과 같이 타인의 이익을 위하여 인정되는 권리에서는 그 권리를 행사하여야 할 의무가 있으나, 그것은 예외적인 것이다.’(김준호 저 ‘민법강의’ 49쪽)

거의 한 단락이 조사까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교수는 이 대목에 곽교수의 저서에서 인용했다는 각주를 전혀 붙이지 않고 있다.

민법상의 중요한 절차인 법인 설립에 관한 부분에서도 곽교수의 저술 내용을 그대로 옮긴 대목이 여러 군데 눈에 띈다.

‘定款作成이라는 社團法人 設立行爲는 書面에 의하는 要式行爲이며, 그 실질은 장래에 성립할 社團에 法人格 取得의 효과를 발생시키려는 意思表示를 요소로 하는 法律行爲이다.’(곽윤직 저 ‘민법총칙’ 198쪽)

‘정관작성에 의한 사단법인의 설립행위는 서면에 의하는 要式行爲이며, 그 성질은 장래에 성립할 사단에 법인격 취득의 효과를 발생시키려는 의사표시를 요소로 하는 法律行爲이다.’(김준호 저, ‘민법강의’ 114쪽)

조사나 일부 단어를 비슷한 의미를 갖는 다른 단어로 교체한 것 말고는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다.

‘첫 단계에서는 설립자(발기인) 상호간에서 법인설립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관계가 성립하고, 둘째 단계에서 그 이행으로서의 정관의 작성·구성원의 결정 기타 법인설립을 위한 여러 요건을 충족하는 행위를 하고, 최후로 셋째 단계로서 법인이 성립한다.’(곽윤직 저 ‘민법총칙’ 199쪽)

‘사단법인이 설립되는 과정은, (ㄱ) 먼저 법인설립을 준비하기 위한 설립자 상호간의 법률관계가 성립하고, (ㄴ) 다음으로 정관을 작성하여 법인으로서의 실체를 갖추게 되며, (ㄷ) 마지막으로 설립등기를 함으로써 법인격을 취득하게 된다.’(김준호 저 ‘민법강의’ 117쪽)

두 권의 책을 정밀 검토한 한 전문가는 “두 권의 책이 동일한 목차를 따르고 있고 전체적으로 김교수 의 ‘민법강의’가 곽교수의 민법 저서들을 요약,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수험생에게 적합한 요약서를 지향하다 보니 제목 달기 등에서 편집상의 기술이 발휘된 것은 물론 일부 문장이나 단어를 누락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는 평가도 덧붙였다. 심지어는 배열 순서만을 바꾼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곽교수 저서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민법총칙’에서만도 수십개소에 걸쳐 나타난다.

김교수의 ‘민법강의’ 내용을 검토한 곽윤직교수 역시 “거의 그대로 베꼈다. 내가 그동안 개정판을 내온 것도 이 사람을 위한 것이 되어 버렸다”며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곽교수의 제자들 중 일부 법조인은 ‘김교수의 저서가 곽교수의 책을 베끼다시피 했다’며 이를 문제삼을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곽교수는 ‘민법강의’를 검토하지 않았고 표절 여부를 규명하는 데도 적극적 자세를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김준호교수는 자신의 저서가 표절로 지목받고 있는 데 대해 “곽교수의 책을 많이 참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모두 읽고 소화해서 쓴 것이므로 표절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목차와 체계가 곽교수의 저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에는 “그것은 곽교수만의 독창적인 체계가 아니며 민법전에 근거해 누구나 비슷한 체계를 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김교수는 “내 책이 많이 팔리니까 곽교수의 제자 등 일부 서울대 그룹에서 나를 시기하는 목소리들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나’를 제외하고는 그러한 글을 써서는 안된다는 독선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곽교수를 비롯한 일부 제자 그룹을 우회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학술 논문이나 저작의 표절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도 없고 판례도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학술 발표물에 대한 표절 여부를 정확하게 짚어낼 수는 없지만 김교수 저서의 경우 많은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다. 김교수 역시 ‘곽교수의 저서를 참고한 것은 사실’이라는 말로 표절 의혹에 대해 전적으로 부인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교수는 “일반화된 정의까지 표절이라고 우긴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곽교수는 “나의 저서 중 최소한 ‘제1장 민법의 의의’와 ‘제3장 민법전의 연혁과 그 구성’ 등은 다른 어느 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라며 김교수의 책이 자신의 독창적 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수험생 입맛 맞춘 해설-요약서 판친다

일부 교수들 “한 권이라도 더 써 돈벌자” 베끼기 편승


법학을 전공한 교수들이 가장 문제삼는 것은 ‘수험법학’ ‘고시법학’으로 전락한 법학의 현주소이다. 교과서보다 참고서가, 기본서보다 해설서가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은 법조 인력의 전문성을 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병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예비 법조인들을 가르치는 사법연수원 교수들도 최근 들어 사시 합격자들의 평균적 수준이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데에 공감하고 있다.

좋은 수험서의 조건은 아무래도 기본에 충실한 것보다는 깔끔하게 요약, 정리해낸 것들이다. 해설서나 요약서들이 목차와 구성에 특별히 신경을 쓰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민법의 경우 최근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과락만 면하자’는 생각이 팽배해 기본 교과서를 외면한 채 해설서나 사례 중심의 요약서만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수험생들의 입맛에 일부 교수들이 편승하면서 빠른 시간 안에 ‘잘 편집된’ 요약서를 펴내려다 보면 표절에의 유혹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수험생들에게 인기있는 교과서를 펴낸 몇몇 교수들이 ‘신림동 강의’를 통해 교수 연봉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정황을 뒷받침한다.

표절에 대한 학생들의 무감각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만난 한 수험생은 “일부 해설서가 법학계의 원로들이 쓴 특정 교과서와 비슷한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거나 내용이 유사하다는 소문이 나면 표절 논란에 휩싸이기보다는 오히려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경우가 많다”고 귀띔하기 도 했다.

몇 년 전 정년퇴임한 명예교수 K씨는 “젊은 학자들이 뼈를 깎는 연구에 정진하기는커녕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책을 내서 돈을 벌겠다고 나서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안타까워했다.




주간동아 2000.02.24 222호 (p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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