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21

2000.02.10

고단한 삶, 그래도 정은 넘쳤지…

  • 입력2006-07-06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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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단한 삶, 그래도 정은 넘쳤지…
    해마다 명절이 다가오면 마음은 벌써부터 고향으로 내달음질친다. 마음이 먼저 때를 알아채고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한달음 뛰어가는, 연어와도 같은 회귀본능. 코앞으로 다가온 설을 맞아 우리네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추억의 장면을 흑백 필름으로 되살려보자.

    요즘은 사방에 먹을 것이 넘쳐나 음식 귀한 줄 모르며 국적 불명의 ‘퓨전’ 요리와 패스트푸드로 미감마저 ‘국제화’되었다지만, 20~30년 전만 해도 머리가 덜 영근 꼬맹이들은 늘상 주린 배를 안고 오후의 기나긴 해가 저물어 저녁 끼니때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그때 절절한 허기를 잠시나마 달래줬던 ‘정겨운’ 먹거리들. 춘궁기의 허기를 넘겨주던 봄풀과 꽃이며, 골목길을 쩌렁쩌렁 울리던 뻥튀기 소리, ‘도라무통’으로 만든 화덕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던 풀빵…. 쩔거덕 쩔거덕 가위를 치는 엿장수 아저씨가 나타나면, 순이 철수 할 것 없이 집으로 뛰어들어가 엄마 몰래 옷자락에 쇠붙이 하나씩을 숨겨 들고 나와 엿과 바꿔먹곤 했다. 그러고 나면 호랑이 같은 엄마에게 치도곤을 당하기 일쑤였지만 입안에서 엿을 녹여 먹는 그 순간만은 한없이 즐거웠던 배고픈 시절이었다.

    고단한 삶, 그래도 정은 넘쳤지…
    그때는 동무들만 곁에 있으면 한 뼘짜리 골목길도 널찍한 마당 부럽잖은 놀이터였다. 계집애들은 “살랑살랑~ 봄바람이 살랑 불어오는데….” 따위의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맨 종아리 드러낸 채 팔짝팔짝 잘도 고무줄을 뛰어넘었다. 개구쟁이 사내애가 살짝 다가와 칼로 고무줄을 끊어놓고 달아나면 마음 약한 계집애 하나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어쩌다 동네 공터에 곡마단이나 유랑극단이 들어오면 그날은 축젯날. 젖먹이 막둥이를 등에다 들처업은 단발머리 계집아이들이 조르르 기어나와 천막 안을 들춰보곤 했다. 마을에 TV 가진 집이라곤 한 둘 있을까 싶던 그 시절, ‘천막극단’은 볼거리 궁하던 아이들에게 늘상 반가운 손님이었다.



    골목길을 찾아와주던 또다른 반가운 손은 만화장수 아저씨. 아이들은 길거리에 좌판을 벌이고 동전 몇푼에 만화책을 보여주던 아저씨 곁에 우루루 몰려들어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물레방아 모양새로 엉성하게 엮은 철골에다 의자를 척 걸쳐놓고 그 위에 아이들이 올라타면 뱅글뱅글 돌아가는 무지개차도 있었다. 무지개차에 앉아 바라보는 세상은, 아이의 어린 눈에, 마냥 신기한 요지경이다.

    손수 만든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게 해주던 할아버지도 있었더랬다. 상자곽 안 사방에 거울을 붙여놓고 갖가지 색종이를 잘라 넣어 흔들면 백가지 천가지 만물상이 펼쳐지는 요지경. 마땅한 놀잇감이 없던 그 시절에 그저 색종이 조각 몇 개가 만들어낸 조막만한 세상 구경도 아이들에겐 마냥 신기했다.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고, 그 어른이 낳은 아이들은 지천으로 널린 볼거리, 놀거리에 둘러싸여 자라고 있다. 날이면 날마다 새 장난감이 쏟아져 나와 부모들은 얇디 얇은 지갑 열기에 바쁘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발로 딛으며 뛰놀기보다는 컴퓨터 모니터, TV 화면과 마주앉아 있으려는 아이들. 동무를 잃고 자연을 잃은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이번 설에는 엄마, 아빠 어렸을 적 추억이 담긴 빛바랜 사진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보여주자. 그리고 그때 그 시절의 소박했던 즐거움을 도란도란 들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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