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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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한 ‘계산된’ 용퇴?

  • 입력2006-06-09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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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기 위한 ‘계산된’ 용퇴?
    옐친의 사임은 치밀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라는 것이 중평이다. 거듭된 실정과 크렘린 안팎의 비리로 끊임없이 퇴임후를 걱정해온 옐친은 대권을 푸틴 총리에게 넘겼다. 푸틴은 조기 사임의 대가로 옐친 일가의 퇴임후 신변을 보장해줬다.

    영욕으로 얼룩진 옐친 시대가 천년의 일몰과 함께 저물었다. 1999년 12월31일 전격적으로 사임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68)은 92년 1월 러시아연방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한 뒤 만 8년 동안 격변의 러시아를 통치해 왔다.

    세계인 모두가 들떠 있는 천년의 마지막날 발표된 그의 사임은 전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소련대통령이 1991년 크리스마스날 퇴임을 밝혀 ‘착잡한 감회’를 안겨주었던 전례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옐친의 사임 이유는 ‘새 시대에 새 인물이 러시아를 지도할 수 있게끔 길을 터주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오랜 지병도 또다른 이유로 거론됐다.

    그러나 이번 사임은 치밀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라는 것이 중평이다. 거듭된 실정과 크렘린 안팎의 비리로 끊임없이 퇴임후를 걱정해온 옐친은 지난해 12월19일 치러진 총선 결과에 크게 안도했다고 전해진다. 후계자로 지명한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47)를 지지하는 친(親)크렘린계 정당들이 약진했기 때문이다. 그는 조기 사임으로 대통령 선거를 2개월 이상 앞당길 수 있으며 현재의 총선 판세를 대선에 ‘이식’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한 듯하다.

    이제 공산당 등 반(反)크렘린계 정당들의 ‘푸틴 흠집내기’는 시간에 쫓기게 됐으며 푸틴은 조기 사임의 대가로 옐친 일가의 퇴임후 신변을 보장해줬다. 옐친이 퇴임한 날 전임 대통령 일가에 대한 형사상 조사 면제 및 불체포 특권을 보장하는 포고령에 서명해준 것.



    이날 옐친은 젊은 푸틴을 크렘린궁의 원로원 제1건물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로 안내했다. 러시아군의 핵 통제권이 담긴 핵 가방도 인계했다. 그 가방은 옐친이 재임 동안 두 차례 심장수술을 받았을 때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당시 총리에게 잠깐 맡겼던 것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는 것이었다. 옐친은 퇴임 직후 모스크바 근교 대통령 전용 별장인 ‘고리키 9’로 옮겨가 대통령에게 주어진 마지막 특권의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 옐친에 대한 국민지지율은 1%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42%가 옐친의 사임에 대해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는 물론 러시아 공산체제를 퇴장시키고 시장 자본주의로의 개혁을 시작했던 그의 업적에 대한 ‘인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한때 차르(황제)라 불렸던 옐친의 인간적인 마지막 모습이 러시아인들의 마음을 움직인 듯하다.

    그는 1931년 우랄산맥의 공업지역인 스베르들로프스크주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우랄공대를 졸업한 뒤 61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스베르들로프스크주 당 제1서기를 거쳐 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공산당 개혁그룹에 참여하게 되지만 곧 견해차로 고르바초프와는 정적관계로 갈라서고 만다.

    그는 러시아가 개혁-개방의 급류를 타던 91년 군부의 급작스런 쿠데타를 탱크 위 시위로 막아내면서 변혁의 주역이 됐다. 하지만 시장개혁 작업의 부진과 권력층 부패 등으로 국민으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으며 제1차 체첸전쟁(1994∼96년)에서의 패배로 급격한 통치력 상실을 맛봐야 했다.

    그의 개인적인 결함은 몰락하는 대국 러시아의 상징으로 비치기도 했다. 급작스러우면서도 잦은 총리 경질로 상징되는 ‘즉흥정치’, 서구 곳곳에 결례의 사례를 만들어놓은 ‘만취외교’, 재임 중 잦은 입원기록으로 이미 기네스북에 오른 ‘병상통치’ 등이 그것이다.

    역사가들은 앞으로 그가 남긴 빛과 그늘을 되새겨보며 20세기 러시아의 마지막 10년을 평가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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