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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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여행 많이 하고 싶어요”

‘IMF 실직’ 아픔 딛고 일어선 한 ‘서민 부부’의 새 천년 소망

  • 입력2006-05-25 13: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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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여행 많이 하고 싶어요”
    “가장 아쉬웠던 것은 먹고 사는 데 바빠서 온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별로 갖지 못했다는 점이에요. 새로운 세기에는 모든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를 자주 갖고 싶어요.”

    경기도 부천시에 사는 동갑내기 ‘서민 부부’ 조희찬-김유경씨(33)의 소망은 이렇게 작고 평범하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소망에는 이들 보통사람 부부가 힘겹게 넘어온 지난 몇 년간의 우여곡절이 담겨 있다. 조씨 부부에게 20세기 끄트머리의 2, 3년은 유난히 힘겹고 다사다난했던 시간. 97년말부터 서민들의 옷깃을 바싹 여미게 한 IMF사태의 찬바람은 이들 부부에게도 어김없이 불어닥쳤다. 정화조 배관설비 일을 전문으로 하던 남편 조씨는 IMF사태로 건설업체 경기가 위축되면서 일자리를 잃었고, 마침 아내 김씨 역시 새 사업을 준비한다며 오랫동안 하던 자유기고가 일에서 손을 뗀 상태라 고정적인 수입이 끊어진 것이다.

    “경제적으로 정말 힘들었던 때였죠.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앞으로 조금만 참으면 나아질 것’ 이라는 전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이들 부부에게는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든든한 뒷심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족간의 믿음과 사랑. 김씨는 몇 년전 남편이 허리를 다쳐 6개월간 일을 못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온 가족이 건강하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위안하고, 정 안되면 파출부로 나설 생각까지 했다. 남편 역시 아내가 사업을 준비하느라 밤새워 일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응원했고, 초등학교 1학년인 딸 담이는 “엄마 아빠, 힘들어도 참으세요”라는 격려 편지를 써보내곤 했다.

    다행히 조씨는 몇 달 뒤 진공펌프를 애프터서비스해 주는 일자리를 새로 갖게 되었고, 김씨가 창업한 베이비시터(방문 탁아)업체 ‘놀이친구’도 자리를 잡아갔다. 남편의 월급은 이전보다 줄고, 아내의 일은 대폭 늘었지만 부부에게 다가올 새 천년은 비관보다 희망의 빛이 강하다.



    “지난해 하반기 들어서면서 경기가 풀리고 있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특히 IMF사태로 제일 먼저 실직 대상에 올랐던 주부 취업자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게 된 탓인지, 방문 탁아를 요청하는 엄마들이 많아져 아내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어요. 이렇게 계속 사회 경제사정이 좋아져서 새해엔 아내 사업도 궤도에 오를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그러나 남편 조씨는 요즘 정치 돌아가는 것을 보며 과연 이런 바람이 이뤄질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 97년, 자신의 손으로 뽑은 ‘국민의 정부’에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민생은 안중에 없고 정치적 이권다툼에 연연하는’ 것에 실망해 아예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접어버리다시피 한 것이다.

    “서민들은 갈수록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가 커진다고 느끼고 있어요. 경기가 좋아지고 있다지만 아직 가계의 주름살은 완전히 펴지지 않았고요. 그런 만큼 앞으로 정치인들도 ‘자기 밥그릇싸움’보다는 부의 재분배 같은 민생문제 대책 마련에 신경써 주었으면 합니다.”

    ‘은행 문턱’마저도 너무 높게 느껴져 목돈 마련은 주로 ‘계’를 통해 해왔다는 조씨 부부. 남들은 주식투자니 뭐니 하며 ‘일확천금’의 기대에 부풀어 있다지만 부부에겐 먼 얘기이기만 하다. 대신 이들 부부는 앞으로도 착실히 푼돈을 쪼개가며 계를 부어 현재의 19평 아파트에서 조금이라도 큰 집으로 옮기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키울 뿐이다.

    99년은 딸 담이에게도 만만찮은 ‘도전의 시기’였다. 지난 봄 초등학교에 입학한 담이는 학교생활을 유난히 힘들어해서 부부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학교 다니는 게 참 싫었어요. 받아쓰기에서 틀리면 손바닥을 자로 맞기도 하거든요. 외국에는 자유롭게 놀 수 있는 학교도 많다는데, 그런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부부는, 취학 전 열린교육을 지향하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다니던 담이가 갑자기 ‘틀에 박힌’ 초등학교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부부의 새 천년 소망은 하나 더 추가된다. ‘아이들이 받아쓰기에서 몇 개 틀리는지로 스트레스받지 않고 즐겁게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는 것.’ 그래서 김씨가 구상한 것이 ‘일곱살 여행모임’이다. 제도권 교육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경험을 엄마들이 직접 여행을 통해 아이에게 선사하기 위해 현재 비슷한 또래 자녀를 둔 엄마들끼리 모임을 준비중이다.

    올 봄 초등학교에 입학할 둘째 호연이는 새해를 아주 낙천적으로 기대하고 있다.

    “누나가 학교 다니는 걸 보고 나도 가고 싶었어요. 이제 학교에 들어가면 친구를 한꺼번에 40명은 사귈 수 있으니까 좋아요. 그리고 새해에는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TV에서 툭하면 방영되는 분쟁과 폭력 소식 탓인지, 호연이는 일곱살답지 않게 ‘의젓한’ 바람을 덧붙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아이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엄마 아빠가 ‘조금만 덜 바빠지는 것’. 담이는 “엄마가 직장을 집 가까운 데로 옮겼으면 좋겠다”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안타까운 것은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다. 종종 가족회의를 열어 식구들간에 묻어둔 속마음을 털어놓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지만 그런 자리마저 아빠나 엄마 중 한 사람이 빠지기 일쑤였다. 가까운 곳에 사는 김씨의 친정 부모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지방에서 어쩌다 올라오는 조씨의 어머니 역시 서울에 머무르시는 동안도 제대로 못모신 게 부부로서는 아쉽기만 하다.

    “지난 여름에서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 식구가 함께 가족여행을 떠났어요. 여행이 가족 사이에 일치감을 형성해준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평소 아이들과 못다한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었던 건 물론이고요. 아이들도 그때의 일을 두고두고 다시 이야기하고, 그림으로 그리곤 하더군요. 그동안 돈보다는 시간이 없어서 여행할 엄두를 못냈는데, 새해부턴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아이들과 전국 방방곡곡을 둘러볼 계획입니다.”

    그러나 정작 12월31일 밤만큼은 온 가족이 집에 모여 조용히 새해를 맞으며, 새 천년을 설계할 생각이다.

    “지난 몇 년을 보내면서 ‘이렇게 힘든 시기도 무사히 넘겼는데,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친들 이겨내지 못할까’라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가족이 힘을 합해 뭉치면 새 천년에도 무슨 일이든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미리 들어본 이들 가족의 새 천년 포부는 믿음직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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