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만 읽고, 멜로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있다. 그는 IMF사태로 실직한 가장이다. 영어학원 원장인 그의 아내는 결혼 전 사귀었던 애인과 다시 만나 매일 정사를 갖는다. 그녀가 가정으로 돌아오려 할 무렵, 남편은 그녀를 무참하게 살해한다.
영화 ‘해피엔드’의 줄거리다. 시나리오는 서울 단편영화제에서 ‘생강’이라는 출중한 작품으로 수상한 정지우감독이 직접 썼다. 그가 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려 했을 때 제작비를 대겠다는 사람도, 출연하겠다는 배우도 없었다. ‘해피엔드’는 충무로 사람들이 보기엔 위험한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우선 삼류 소설을 연상시키는 단순한 줄거리가 그렇고, ‘생강’에서 보여주었던 감독의 냉정한 스타일이 그렇다.
결국 ‘접속’을 만든 명필름이 제작을 맡기로 한 이후에야 ‘흥행공주’ 전도연을 비롯, 최민식 주진모 등을 캐스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을 사리지 않은 전도연 주진모의 섹스신은 영화의 손익분기점인 23만관객 정도는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머지는 정지우감독의 몫이다. 정감독은 멜로와 미스터리물을 섞은 듯한 이 영화를 통해, 똑같이 사랑을 찾으면서 사랑의 다른 면을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감독은 ‘부정한 여자는 벌받아야 한다’는 식의 결론을 영화의 마지막, 이미 죽은 전도연이 ‘근조’라고 쓴 등을 아파트에서 날려보내는 장면, 이어서 아내를 죽인 최민식이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아파트 거실에서 잠자는 장면을 통해 피해가고자 했다. 감독은 이 장면이 “용서의 느낌을 주기 바랐다”고 말한다.
그래서 영화는 완전히 둘로 나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도연의 정사를 중심으로 배우들이 클로즈업되는 부분과 배우들이 무심한 풍경 속에 배치돼 ‘연출’만이 보이는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독립) 영화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감독들이 상업영화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을 생각해본다면 정지우감독은 다음번의 ‘해피 엔드’를 기대해 볼 만하다. 그것은 전도연 최민식이라는 스타를 썼기 때문이 아니라, 그나마 제작비를 줄여 감독에게 자신의 길을 찾아준 ‘현명한’ 제작방식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