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1

1999.12.02

“영재교육은 허구다”

교재만 수십만~1백만원… 전문가들 “교재로 영재 만들기는 불가능”

  • 김정희 기자 yhong@donga.com

    입력2007-03-12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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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재교육은 허구다”
    33개월 된 아들 하나를 둔 주부 곽은선씨(31)는 TV광고에서 “청와대가 어디에요?”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흔들린다. 채 30개월이 안된 여자아이가 신문에서 ‘청, 와, 대’라는 글자를 읽어내는 광고를 보면 가장 단순한 형태의 글자도 못읽는 아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곽씨는 ‘우리 아이도 영재성을 갖고 있는데 내가 너무 소홀해 아이가 뒤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하며 초조해진다. 그렇다고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딱히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암만해도 체계적으로 짜인 영재교구를 갖고 교육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일곱살난 지훈이 엄마는 심리상담원을 찾아 얼마 전 아이가 모 영재교육기관에서 지능검사를 받은 이래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몇달 전 다른 기관에서 검사를 받았을 때는 상위 3%에 속했던 아이가 이번에는 상위 8%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동안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 아이의 능력이 떨어져 버린 게 아닌가 고민스러워요. 제 잘못인 것만 같아요.”

    요즘 곽씨나 지선이 엄마와 같은 고민을 하는 부모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우리 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이 지나칠 만큼 높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근래 들어선 양상이 보다 극심해졌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조기교육, 영재교육 기관은 비교적 적극적인 부모들이 알음알음으로 찾아다니는 곳이 었고 전문교재 역시 많지 않았지만, 이제 영재교육시장은 거대한 몸체로 성장해 “당신도 아이를 영재로 키울 수 있다”며 부모들을 유혹하고 있다.

    오르다, 시찌다, 칼 비테, 비츠교육, 프뢰벨 등 유명 교육학자의 이름이나 이론을 딴 영재교재들이 국내에 선을 보인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며, 최근 수년 사이에는 국내 학습지 업체들이 대거 영유아 교육시장에 뛰어들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신기한 아기나라’ 등 ‘신기한’ 시리즈의 한솔교육, ‘한글만세’ ‘쓰기만세’ 등의 한국몬테소리, ‘A+한글마을’ ‘A+숫자마을’ 등의 중앙교육문화원, ‘한글짝꿍’을 내놓은 웅진출판 등이 그것. 그 외에도 수많은 군소업체들이 시장을 분할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의 교재는 체계적 학습을 강조하며 수십개의 테이프나 카드, 혹은 블록 등의 교구를 세트로 묶어 판매하기 때문에 그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적게는 수만원부터 시작, 30만~50만원은 보통이고 150만원을 호가하는 교구까지 눈에 띈다. 게다가 방문교육을 받을 경우 한달에 5만~10만원의 교육비를 별도로 내야 한다.



    이들 교재가 소비자들에게 강조하는 메시지는 “좋은 교구와 프로그램을 이용해 조기에 재능을 개발시 키면 당신의 아이도 영재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영재란 이런 교재를 통한 ‘훈련’으로 ‘만들 어질 수’ 있는가.

    전문가들이 규정하는 영재아란 ‘성적이 상위 2~3% 내에 들면서 사고의 융통성, 자발성, 학습이해력이 우수한 아동’. 물론 어린아이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으며 부모의 지속적 관심과 적절한 교육환경의 제공에 따라 잠재력 개발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지만, 모든 아이들이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만 하는 상위 2~3%의 영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화여대 유아교육학과 이기숙교수는 “우리 아이는 뭔가 특별한 것 같으니 영재교육을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상담을 청해오는 부모들이 많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이 옛날보다 영악하고 똑똑한 것은 매스컴의 영향 등에 의한 ‘일반적 추세’이며 그 모든 아이들이 영재인 것은 아니다”고 지적한다.

    “오르다와 같은 영재교구들이 아이의 지능개발에 어느 정도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타고난 재능은 없는데 무조건 교구를 통해 훈련을 시킨다고 영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재교육학술원 하종덕소장 역시 “특수한 교구를 이용한 1대 1 교육으로 ‘조기학습’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진정한 영재교육이란 교재학습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뛰어난 아이들이 함께 모여 서로 자극을 받고 전문가의 교육을 받아야만 길러지는 것이다”고 말한다.

    정송 자녀교육상담소 소장도 “조기교육은 달리기로 치면 남보다 스타트 라인에서 몇m 앞서서 출발하는 것인데, 100m 달리기라면 빠른 출발이 효과를 볼지 몰라도 교육은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고 먼길을 내다보아야 하는 장거리 달리기”라며 조기영재교육의 효과에 대해 회의적 견해를 보인다.

    그럼에도 많은 부모들은 ‘한글을 빨리 깨쳐야 아이의 세상이 보인다’ ‘21세기 창의력 교육을 책임진 다’는 등의 광고에 현혹되면서 ‘영재교육을 안시키면 뒤떨어진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24개월 이전의 자녀에게 한글교육을 시작하는 부모가 33.2%에 달하고 있으며 미취학 아동을 둔 부모의 89.2%가 아이에게 유아교재를 정기구독시키고 있는 것이다.

    PC통신 천리안에서 주부들을 대상으로 IP 사업을 하는 천선아씨는 “남들은 모두 시키는 데 나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이용자들이 적잖다. 주변에서 너도나도 영재교육을 하는데 혼자 안하고 있으면 ‘누구 엄마는 강심장’이란 얘기를 듣게 된다”고 귀띔한다.

    특히 요즘 주부들은 통신공간을 통해 ‘남들은 어떻게 키운다더라’는 정보를 많이 접하기 때문에 이른바 ‘트렌드’가 되는 교육법에 더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자신만의 독특한 노하우로 딸에게 영어를 가르친 경험담을 PC통신에 연재해 인기를 모은 주부 서현주씨는 독자들의 호응에 힘입어 ‘영어 하면 기죽는 엄마를 위한 자신만만 유아영어’라는 단행본을 펴내기도 했다.

    백화점 문화센터들에서도 이같은 학부모들의 열풍을 느낄 수 있다. 그때그때 유행하는 교육법의 이름을 내걸고 개설하는 영재교육 강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유명 영재교육 강사의 강연이 있으면 전날부터 지방에서 올라오는 열성 부모도 있다는 게 문화센터 관계자의 귀띔이다.

    서울 강남에는 아이를 영재학원에 보내기 위해 영재판별 테스트 내용을 미리 학습시키는 이들까지 눈에 띈다. 이런 아이들은 나중엔 아예 문제유형을 외워버려 150~160대의 지능지수를 기록하기도 한다. 엄마들 중엔 아이의 검사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을 경우 여러 영재기관을 ‘순례’하며 반복해서 검사를 받는 열성파도 있다.

    그러나 부모들이 비싼 대가에 비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한정되어 있다. 교사출신 주부 진영미씨(35)는 ‘교재 교육’의 한계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처음에 아이에게 조기교육 전문교재를 사주었을 때는 아이가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를 물어와 ‘정말 사주길 잘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실물을 통한 교육’이 보다 효과적이란 것을 깨닫게 됐어요. 아이는 단지 그림카드만을 갖고 배우는 것보다 일상생활 중에, 혹은 자연 속에서 실물을 접하며 배우는 것에 훨씬 강한 호기심과 탐구력을 보여줬습니다.”

    전문가들은 고가로 팔리고 있는 시중의 교재가격이 그 값어치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한다. 교재 자체는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구입해 놓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1주일에 한번 방문해 15~20분 정도 이뤄지는 교사의 방문수업만으로 특정 교재가 노리는 교육효과를 얻는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 결국 교사보다는 부모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지만 부모에게 수주에서 수개월간 지속되는 프로그램을 아이와 함께 해나갈 인내나 능력이 부족한 경우 결국 부피가 큰 고가의 교재는 집안 한구석을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

    한마음심리상담클리닉 박인경소장은 아이에게 지나치게 많은 교재를 제공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의 잠재력을 억누르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교재가 너무 많을 경우 자극에 대한 아이의 반응이 무뎌지는 이른바 ‘학습된 무기력’ 증세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이의 잠재력을 발현시켜주기 위해서는 어떤 교재를 사용하는지보다 아이에게 안정된 정서를 심어주고, 부모 스스로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양하게 해볼 수 있게끔 기회를 주는 배짱을 키우는 게 중요합니다.”

    결론은 ‘교재교육을 통한 모든 아이의 영재만들기는 불가능하다’이다. 그런데도 부모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고 아이의 영재교육에 매달리는 현상은 우리 나라 미취학 아동들의 영재교육이 전적으로 ‘사교육’ 영역에서만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공식적으로 이뤄지는 영재교육이라고 해봐야 초중등학생을 대상으로 전국 9개 대학에서 운영중인 ‘과학영재교육센터’와 16개의 과학고를 비롯한 특수목적고가 전부. 그나마 이들 교육도 부분적`-`파행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부모가 암만 미취학 아동의 영재교육에 매달려봐야 아이가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진짜 영재’들이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는 기관은 부재한 것이다. 결국 모두가 ‘영재 기르기’를 표방하면서 ‘좋은 대학 가기’를 위한 사전포석으로서 ‘조기교육’을 시키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국가적 제도가 시급히 마련돼서 나라에서 영재를 교육할 수 있는 예산을 지급하고, 체계적으로 영재들을 조기 발굴해 책임지고 키워내야 한다. 일단은 국회에 계류 중인 영재교육진흥법의 조속한 시행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한국영재교육개발원 조석희박사).”

    물론 영재교육의 공교육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영재교육과 더불어 일반 교과과정 역시 인지력 평가 중심에서 사고력`-`창의력을 길러줄 수 있는 풍토로 바뀌지 않는 한 학부모들 사이에 불고 있는 조기교육, 영재교육 ‘광풍’은 결코 잠재워지지 않을 것이다.

    ‘조기’보다 ‘적기’에 교육시켜라

    교재는 보조역할 뿐 … 책 면밀히 검토한 뒤 구매를


    과열 조기 영재교육 열풍 속에서 부모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어떤 것일까.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정리해본다.

    ① 교재는 ‘보조’의 역할을 할 뿐이지 교육의 ‘전부’가 아님을 명심한다. 교재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태도이며, ‘시기에 맞는’ 교육이다. 아이가 각 발달시기에 무엇에 호기심을 갖고 있으며, 어떤 분야에 재능을 보이는지 ‘적기’에 발견하고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게 교재를 사는 것보다 중요하다.

    ② 자녀에게 교재를 구입해 줄 때는 통신 게시판이나 이웃을 통해 사전정보를 충분히 얻고 검토해서 결정한다. 대부분 가정의 구매결정권은 주부가 갖고 있지만 교육자재를 살 경우 주부 혼자 판단하지 말고 반드시 남편의 의견을 참고한다. 주부는 지역공동체에서 과열 교육경쟁에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기에 교육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할 가능성이 있는 반면 남편은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으므로 잘못된 구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③ 한마음심리상담클리닉 박인경소장은 “비싼 교재를 이용하는 것보다 아이의 키높이 벽에 커다란 종이를 붙여놓고 아이가 마음껏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게 창의력을 키우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스케치북이나 크레파스만을 이용하도록 하는 것은 ‘도구’라는 한정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므로 전지 크기의 종이를 붙여주고 어떤 필기도구로든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라는 것.

    ④ 부모가 아이의 영재성 여부를 판단하지 말고 공신력 있는 기관을 통해 검증받은 뒤 영재성을 인정받은 아이의 경우 전문가의 교육을 제대로 받게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CBS 영재교육학술원, 김연구소 등의 믿을 만한 사설영재교육 기관이 있다. 그러나 이들 기관의 검사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교육학 박사 하종덕씨는 이렇게 충고한다. “영재성 테스트는 아이가 영재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영재성이 얼마나 되는지 ‘측정’하는 것일 뿐이며, 테스트에 합격한 이후에도 중도에 탈락하는 아이들이 있으므로 영재기관에 들어가면 아이의 장래가 완전히 보장된다고 믿어서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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