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09

1999.11.18

직장인 80%는 ‘노예’가 된다?

연봉제·중산층 붕괴 따라 빈부 양극화 조짐… 상위 20%만 ‘호시절’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입력2007-02-28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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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 80%는 ‘노예’가 된다?
    ‘빅3’ 안에 드는 명문대를 졸업한 K씨(38)는 자신에게 ‘실직’이란 단어가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재벌 계열사인 한 보험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이 그룹의 로고가 찍힌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이 사회의 주류를 향해 순항할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영업소장 시절 고객 유치 실적도 남들보다 앞섰고 친구들과 만날 때면 늘 돈을 내는 쪽도 K씨 자신이었다.

    K씨는 이 무렵 처음으로 직장을 옮길 결심을 했다. 몸담고 있던 회사보다 그룹 규모는 떨어지지만 보험 영업에 새롭게 진출한 신생사로부터 두 배 가까운 연봉을 제의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것으로만 믿었던 K씨의 환상이 깨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IMF 체제 이후 명예퇴직 대상자 명단을 제출할 것을 강요하는 간부들의 성화에 못이겨 고민 끝에 K씨 자신이 사표를 던져 버린 것이었다. 몇 달을 쉰 그는 친척의 권유로 조그마한 유아용 학습지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 사무실도 잘나가던 보험맨 시절의 강남 한복판에서 지금은 서울 외곽의 한적한 건물로 옮겨졌다.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사회의 상류층에 편입되리라던 기대감이 아니라 이러다가 하류층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 뿐이다.

    하위 20% 소득 뒷걸음질

    물론 K씨처럼 IMF 관리체제를 맞으면서 몰락의 쓴맛을 보아야 했던 사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 회사 간판보다는 실속을 택한 백송호씨(33) 같은 사람도 있다.



    백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력 증권사에 다녔다. 그러나 얼마 전 그는 안정된 회사를 스스로 포기하고 신생 회사인 M자산운용으로 직장을 옮겼다. 펀드매니저인 그가 굴렸던 돈도 5조원대에서 겨우 3500억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연봉만큼은 과거 직장에 비해 꼭 2배. 백씨는 ‘어디어디 다닌다더라’는 주변의 평판보다는 ‘얼마를 번다더라’는 자기만의 실속을 택한 것이다. 백씨의 생활에서 달라진 것은 연봉뿐만이 아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출근 시간이 한 시간쯤 빨라지고 업무량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요즈음 그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남들이 출근하기 위해 넥타이를 맬 때쯤인 매일 오전 7시면 사무실 컴퓨터를 켠다. 한국 시각으로 전날 밤 끝난 뉴욕 증시의 동향을 점검하고, 밤새 들어온 블룸버그나 로이터 등 경제 관련 뉴스들을 검색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백씨는 연봉을 더 받는 것보다도 자신이 일한 만큼을 회사에서 인정해 준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과거 직장에서는 휴일에 혼자 출근해 아무리 자산 운용 계획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어 올려도 제대로 살펴보는 상사를 본 적이 없었다. 자기의 업무에 충실하기보다는 상사의 입맛만 맞추려는 간부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봉제가 실시되면서부터는 이런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IMF 관리체제 이후 불안감에 떠는, 똑같은 샐러리맨들 중 한명이면서도 백씨가 연봉제에 적극 찬성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IMF 관리체제에 들어선 이후 모든 직장인들이 백씨처럼 ‘포스트 IMF형’ 인간으로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보기도 힘들다. 증권, 보험 등 금융권이나 일부 서비스업을 제외한 제조업 종사자들은 실적급이나 연봉제의 혜택을 입기보다는 하향 평준화한 저임금의 터널을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시 근로자 가구 중 상위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경우 IMF 관리체제 이전인 97년의 월 평균 소득이 426만원에서 98년 3분기에 413만원까지 떨어졌다가 올해 1분기에는 452만원으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같은 기간 하위 20%에 해당하는 도시 근로자의 경우는 97년 월 평균 95만원에서 98년 3분기에 76만원까지 떨어졌다가 올해 1분기에도 78만원 선으로 이전 수준을 겨우 회복하는 데 그쳤다. 우리 사회의 부유층들이 IMF 관리체제 2년 동안 6% 정도 소득이 오를 때 저소득층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박순일연구위원도 “전통적 양극화론은 금융소득으로 인해 극소수 부유층이 생겨나고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모델이었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상위로 편입되는 계층은 별로 나타나지 않으면서 하향식으로만 가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특히 중산층 붕괴와 연봉제 실시에 따라 화이트칼라 계층에서도 양극화의 조짐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런 양극화 현상을 극단적으로 이르는 말이 ‘20대 80의 사회’이다. 소득으로 따져서 상위 20%만 부유층으로 편입되고 그렇지 못한 80%는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이 불길한 시나리오는 IMF 관리체제 내내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직장인들을 괴롭혀 온 화두였다.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리라는 ‘20대 80’의 논리는 세계화나 글로벌 경쟁 체제를 염두에 두고 펼치는 각종 산업 정책을 무력화시킬 만큼 가공할 만한 것이다. 사회학자나 경제학자들은 ‘20대 80 사회’의 우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20대 60대 20’ 정도라면 몰라도 80% 전부를 빈곤층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IMF 관리체제가 유달리 ‘공동체 의식’과 ‘평등주의’를 강조했던 한국 사회에 최초의 ‘능력 중심 문화’와 ‘실적주의 문화’를 이식해 놓았던 만큼 그것이 가져올 부작용에 대한 경고 메시지로서의 의미는 충분히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불길한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어서라도 국가가 나서서 빈곤층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 차원의 대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도 점점 개인주의화할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직장인들이 어떤 자세로 다가올 사회에 대처하는지의 문제다. 경쟁이냐 도태냐, 도약이냐 안주냐, 외길에서의 선택을 강요받을 포스트 IMF 시대의 직장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한번도 예습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경총 산하 노동경제연구원 양병무부원장은 이런 측면에서 ‘경쟁의 차별화’를 강조한다. 제조업도 금융업도, 상위직도 말단 관리직도 모두 무한경쟁으로 내몰리게 되면 결국 사회는 결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봉제를 실시하더라도 하위 직급보다 상위 직급의 차등 폭을 크게 만들어 하위 직급일수록 ‘최소한의 경쟁’만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직장인들도 상사에게만 복종하는 무조건적인 ‘애사심’(愛社心)보다는, 자기 계발에 힘쓰면서 어느 직장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자신의 직종에 대한 ‘애직심’(愛職心)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라.’ 연봉제건 실적급이건 포스트 IMF형 직장인들이 가져야 할 첫 계명인 셈이다.

    “중산층이 흔들리면 사회가 흔들린다”

    IMF 2년새 급격히 동요·몰락… 빈곤층 끌어안는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해야


    IMF 관리 경제 2년은 중산층을 동요시킴으로써 안정적인 사회발전의 축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객관적 지표로만 보더라도 전체 인구의 40∼50%가 중산층에 속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또다른 조사에 따르면 전체 국민의 3분의 2가 중산층 귀속의식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비록 주관적 평가이긴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나타내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두터운 중산층이 안정적인 사회발전의 중심 세력으로 간주되는 것은 이들이 담당한 경제적-사회적- 정치적 역할에서 비롯된다. 우리 사회의 중산층은 경제활동에 전념하면서 저축을 무엇보다 중요시했고 성실한 납세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분야에서도 중산층은 다양한 가치관과 이데올로기가 공존하는 다원적 문화를 선호함으로써 사회 갈등이 빚어내는 극단적인 충격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치적으로는 시민권과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희망하며 국가의 초당파적, 초계급적 조정 기제를 중요시해 왔다.

    그러나 IMF체제 2년 동안 중산층이 담당했던 사회발전과 사회질서의 안정적 통합 역할이 급속하게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평생 몸담겠다는 직장 개념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이제 직장은 언제라도 스스로 떠날 수 있고, 때가 되면 언제라도 떠나야 하는 중간 기착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중산층의 동요와 몰락은 사회계층의 양극화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IMF관리 경제 2년은 새로운 사회통합 프로그램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사회통합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사회 구성원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만큼 국가는 고용안정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우선적으로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국가의 영역으로만 맡겨두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점차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비정부기구(NGO)에도 이런 역할을 맡겨볼 만하다는 말이다.

    아울러 중산층의 위기와 실업의 문제가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고 있는 구조적인 현상임을 감안할 때,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시장의 힘에만 의존하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를 끌어안는 인간적 자본주의일 것이다.

    IMF관리 경제 2년은 우리에게 바깥 세상을 정확하게 읽어야만 살아남는다는 교훈을 던져주었다. 2년 동안의 쓰라린 경험은 세계 자본주의체제, 특히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대응 전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IMF와의 정책협의 과정에서 전문성 부족으로 인해 우리의 국가적 이익을 내준 사례들이 뒤늦게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우리가 상대방인 미국 자본주의의 실체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의 경쟁력은 두터운 전문지식과 경험을 갖춘 계층이 사회 내부에 넓게 퍼져 있는, 이른바 ‘소프트파워’(soft power)의 기반 구조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인적 자원에 대한 본격적 투자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 바로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기 위한 이 시대의 과제다.

    박길성/ 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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