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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선생 동상 충정로 이전, 근현대사 정립 계기되길

역사 기념물, 올바르게 조성하고 관리해야

  •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민영환 선생 동상 충정로 이전, 근현대사 정립 계기되길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사거리 교통섬으로 이전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 동상. [사진 제공 · 서대문구]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사거리 교통섬으로 이전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 동상. [사진 제공 · 서대문구]

‘우물 안 개구리(井底蛙)’라는 말이 있다. 안팎의 형편을 모르고 답답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일컫는다. 우리 근대사에서 일제가 강요한 개화에 반대한 전통 지식인을 업신여겨 함부로 이르던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의 모습을 다시 살피면, 반제국주의 항일투쟁을 끈질기게 벌이고 국권 회복에 매진한 수많은 ‘애국적 개인들(patriotic individuals)’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 그 개구리는 어둡고 차가운 우물 속을 탓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툭 튀어나온 두 눈으로 항상 위쪽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견디고 버틴다. 우물에 빠지기 전 이미 여기저기 뛰어다녔기에 웬만한 세상물정은 다 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근대사의 많은 지도자도 비록 일제의 무력에 휘둘려 국권을 빼앗겼지만 자유와 독립을 위해 힘들고 불행한 형편을 마다않고 나라 찾기에 자발적으로 헌신했다. 이들은 반제국주의 항일운동 과정에서 한민족 역사상 첫 자유주의적 시민혁명인 기미혁명을 성취하고 그 전후 여러 민족운동을 이끈 ‘민족본류(national core)’다.

독립운동가들이 기린 민영환 정신

대한제국기 대표적인 ‘개구리형’ 지도자였던 민영환(1861~1905)은 고종의 최측근으로서 국권수호를 위해 진력했다. 그는 일찍부터 여러 관직을 경험했고, 두 차례의 세계일주로 내외 사정에 밝았다. 이를 바탕으로 각종 내정개혁안과 외교대책을 ‘천일책(千一策)’에 모아 펴냈다. 그는 일본과 사귀되 합하지 말고, 러시아와 교류하되 섬기지 말며, 노쇠한 청에 더는 사대하지 말자고 건의했다. 또 인재등용, 국방개혁, 산업진흥, 부정부패 척결 등을 실천하고 구미국가들의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내부 단결을 위한 효과적 계책이 부족했기에 우리는 일제의 군사 위협을 이기지 못하고 을사늑약을 강제당했다. 이에 그는 고위 관리로서 책임을 통감해 자결했으며, 이후 우리 근대사를 주도한 이들의 존경과 추모 대상이 됐다.

해방 직후 귀국한 이승만 박사 부부와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먼저 민영환의 부인 박수영 여사를 찾아가 40년이나 늦어진 조문 인사를 했다. 정인보, 안재홍, 김규식 등 독립운동가들은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그의 정신을 잇고자 했다. 1946년 김형민 당시 서울시장은 그를 기려 지금의 동상 주변 동네를 ‘충정로(忠正路)’로 개명했다. 1957년엔 민영환의 동상이 인사동네거리에 처음 세워졌고 1970년 창덕궁 정문 옆으로 이전됐다. 2003년 다시 우정총국 뒷마당 구석으로 옮겨졌는데, 관리 소홀로 노숙자들의 누추한 거처가 돼버렸다.

동상이란 어느 인물을 현창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공공장소에 당당하게 세워지고 관리돼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해 필자는 민영환 동상의 이전 필요성을 누차 제기했다. 마침 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등 각 분야 유지의 정성으로 동상은 8월 30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로 이전됐고, 그 주변도 단정한 시민공원으로 조성됐다. 동상 이전 추진위원 중 한 명이던 필자는 그의 동상 이전이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면에서 하나의 전기(轉機)가 되길 바란다.

한국 근현대사는 ‘민주공화주의’ 실천 과정

첫째, 한국 근현대사를 ‘민주공화주의적 개명과 그 정치적 실천 과정’으로 정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민영환은 공화제 도입과 의회 설립을 계몽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지원했다. 해군 창설 등 각종 국방개혁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개혁당을 조직해 러일전쟁 후 친일 내각 타도를 노렸다. 그가 자결한 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애국적 개인들이 나라 구하기에 자발적으로 나섰다. 1907년엔 신민회가 우리 민족의 정치 비전으로 민주공화국 건설을 처음 제시했다. 이런 민주공화주의적 개명은 마침내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거족적 만세시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민족지도자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는 근대 구미 지역의 자유주의적 시민혁명과도 같은 정치 기획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기미혁명의 정신과 역사를 계승해 좀 더 건강한 민주공화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근대 인물이나 주요 사건의 기념물 조성과 관리의 새로운 계기가 되길 바란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기미혁명기념관이 없다. 기미혁명의 정치적 결실인 임시정부를 조명하는 임시정부기념관이 최근 개관했지만, 머리와 가슴이 빠져 허전하기 그지없다. 탑골공원 안에 겨우 더부살이로 조성된 3·1운동 기념물들은 낡고 때도 묻어 더는 3·1운동정신을 현창할 수 없다. 3·1운동 기념탑은 장충단공원 부근 한구석에 내쫓기듯 서 있다. 태화관 자리에 있는 3·1독립선언광장은 어설프고, 독립선언문 철판은 벌겋게 녹슬어 알아볼 수도 없다. 또 기미혁명과 그 전후사를 피땀으로 이끈 인물들의 동상이 제대로 서 있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앞으로 정치적·학술적 각성을 통해 기미혁명광장이 조성되고 기념관도 반듯하게 건립돼야 한다.

서대문구, 민영환 유서 새기고 ‘혈죽가’ 조형물 설치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동상이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제자리를 찾았다. 서대문구는 8월 30일 충정로사거리 교통섬(교차로 등에 설치한 섬 모양의 교통 시설)에서 민 선생 동상 이전 제막식을 열었다. 대한제국 내부대신, 군법교정총재 등을 지낸 민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 무효화, 을사오적 처벌을 주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결로 일제에 저항했다.

민 선생 동상은 높이 5m, 둘레 3.3m 규모로 1957년 인사동사거리에 처음 건립됐다. 이후 도로 확장 등을 이유로 1970년 창덕궁 돈화문 옆을 거쳐 2003년 우정총국 시민광장으로 이전됐다. 시민광장 후미진 곳에 세워진 민 선생 동상이 방치되다시피 한 실태를 ‘주간동아’가 보도한 바 있다(주간동아 1164호 ‘충정공 민영환 동상이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제하 기사 참조).

민 선생 동상이 새로 이전한 곳은 약 800m 길이의 왕복 8차선인 충정로의 기점이다. 충정로는 민 선생의 시호인 충정공에서 따온 지명이다. 인근 아현동 주한 프랑스대사관 자리에 과거 민 선생의 별장이 있었다. 1946년 김형민 초대 서울시장이 시내에 있는 일제 잔재를 바로잡으면서 현재 서울지하철 충정로역과 서대문역을 잇는 도로 및 일대 지명을 죽첨정(竹添町: 일제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기념해 명명)에서 충정로로 고쳤다.

서대문구는 동상 하단에 민 선생의 유서 ‘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 문구를 새기고, 동상 앞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시조 ‘혈죽가’가 담긴 조형물도 설치했다. 이성헌 서대문구청장은 “동상 이전과 함께 주변 공간에 나무와 기반 시설도 정비했다”면서 “이곳이 민영환 선생과 그의 뜻을 알리는 공간으로 시민들로부터 사랑받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1356호 (p54~55)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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