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17

2021.12.03

우주 경쟁 중심에 섰던 두 남자, 폰 브라운과 코롤료프

[궤도 밖의 과학] 냉전시대 독일 로켓 V2로 시작된 미국·러시아 자존심 대결

  •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

    nasabolt@gmail.com

    입력2021-12-0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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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른헤르 폰 브라운(왼쪽)과 세르게이 코룔료프. [GettyImages]

    베른헤르 폰 브라운(왼쪽)과 세르게이 코룔료프. [GettyImages]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시기 궁지에 몰린 히틀러는 보복 병기 2호(Vergeltungswaffe 2)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인 V2 로켓 1300여 발을 영국 런던을 향해 발사했다. 현대 무기처럼 정확도가 높진 않았지만, 음속의 5배 넘는 속도로 날아와 방어가 불가능하던 탄도미사일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안겼다. 당시 민간인 수천 명이 사망할 만큼 심각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전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독일 군인 발터 도른베르거는 어느 우주비행 동아리에서 자신보다 17세나 어린 청년을 만나게 된다. 나이는 어렸지만 엄청난 열정과 끝없는 상상력으로 무장한 그에게 매료된 도른베르거는 로켓 기술자로서 그와 함께 훗날 V2로 불린 A4 로켓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그가 바로 로켓공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 출신 미국 천재 공학자 베른헤르 폰 브라운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선물한 천체망원경을 보며 우주로 나가겠다는 꿈을 키운 그는 도른베르거를 만나 대학 졸업 후 바로 독일 육군 로켓연구소에 취직했다. 입사 1년 만에 미국 과학자 로버트 고더드의 로켓을 참고해 A1 로켓을 만들어냈다. 그는 군사용 로켓을 만드는 와중에도 늘 우주로 나갈 생각뿐이었다. 베를린 훔볼트대 박사 과정 도중 A2 로켓을 개발했고, 이후 A3 로켓을 개발하며 나치당에 가입했다. 결국 1942년 도른베르거의 전폭적인 신임과 함께 A4 로켓이 완성됐다. 잔혹한 무기는 V2라는 이름으로 영국을 공격하는 실전에 투입됐다.

    우주 경쟁은 바로 V2 로켓으로부터 시작됐다. 전례 없이 처참했던 전쟁은 지구촌 곳곳에 큰 상처를 남겼다. 적국 신무기의 위력을 확인한 미국과 러시아는 언제 또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 현실 속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로켓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물론 또다시 인류를 위협하는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것이 국제 정서상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두 나라의 공개적인 목표는 우주로 나가기 위한 발사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소리 없는 전쟁, ‘냉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시기에 벌어진 치열한 우주 경쟁은 두 강대국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졌고, 그 과정에서 인류의 우주기술은 누구도 상상해본 적 없는 속도로 발전했다.

    독일이 항복한 이후 미국 전략사무국은 높은 성취를 이룩한 독일 주요 과학자 명단을 정보문서 파일에 ‘종이용 클립’으로 표시해두고 그들을 포섭하고자 노력했다. 이를 ‘페이퍼클립(Paperclip) 작전’이라고 부른다. 이 작전을 통해 첨단 과학기술을 연구한 과학자들과 그 가족 수천 명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미국은 폰 브라운을 포함해 핵심 과학자 다수를 포섭했다. 또 독일의 로켓 완제품과 잔여 부품, 수많은 생산시설 등을 온전히 획득했다. 반면 러시아(당시 소련)는 점령 지역에 남아 있던 조립 전 부품들과 기술자 일부만 확보했을 뿐이다.




    인류 역사를 바꾼 또 한 명의 천재 공학자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로켓공학자가 자발적으로 한쪽 편에 선 상황에서 냉전시대 우주 경쟁은 미국의 압도적 승리로 끝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국은 그저 소련 측에 전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목적이 강했을 뿐, 초기에는 폰 브라운을 제대로 활용할 생각조차 없었다. 반면 원하는 로켓 기술을 충분히 입수하지 못한 소련은 독자적인 개발 능력이 절실했다. 다행히 그곳엔 러시아의 다빈치로 불리던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있었다. “지구는 인류 문명의 요람이지만, 누구도 이 요람에서 평생을 보낼 수는 없다”고 말한 그는 인류 최초로 구체적인 로켓 이론을 제시했으며, 현재도 쓰이고 있는 다단식 로켓과 우주정거장의 실현 가능성을 주장했다.

    치올콥스키가 닦은 이론적 기반 덕분에 소련에서는 로켓 개발에 열정적인 사람이 꾸준히 배출됐다. 그중 우크라이나 출신인 세르게이 코롤료프라는 젊은 공학도가 있었다. 1907년 러시아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키예프에 있는 항공연구회에서 글라이더를 설계했다.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현재 국립모스크바공과대에 해당하는 모스크바 최고 기술학교에 입학해 항공기를 만들었고,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정부 지원을 받는 연구기관에서 제트 엔진을 연구했다. 소련 최초 액체연료 로켓 엔진 개발에 성공한 그는 연구소 책임자가 돼 승승장구했지만, 스탈린 치하에서 대숙청이 일어나면서 로켓을 개발하느라 국가 자원을 낭비했다는 혐의로 누명을 썼고 시베리아 광산에 있는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로부터 6년 후 독일에선 폰 브라운이 먼저 V2 로켓을 완성했다. 무시무시한 로켓의 위력을 확인한 소련 정부는 이런 엄청난 우주기술을 분석하는 건 코롤료프 이외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를 발 빠르게 사면했다. 풀려난 코롤료프는 소련이 점령한 독일의 V2 생산 공장들과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우주기술 관련 지식을 이용해 V2 로켓을 분석하고 조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소련으로 온 독일 과학자들을 설득해 많은 정보를 빼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소련 최초 단거리 액체연료 로켓인 R1을 개발했다. 쉬지 않고 연구하던 코롤료프는 계속해서 로켓을 개량했고, 1957년 세계 최초로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최근까지 활발하게 사용되던 소유스 로켓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소유스 로켓에 실려 우주로 올라갔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연합국 가운데 가장 유리한 상황에 놓였던 국가는 당연히 미국이다. 미국인은 한 번도 공산주의 진영인 소련의 과학기술이 자신들을 앞서 있을 거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었고, 소련이 하는 이야기를 대부분 국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체제 선전용 허풍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100㎏도 안 되는 소형위성이 보내오는 간단하고 반복적인 신호는 당시 미국인에게 ‘스푸트니크 쇼크’로 불릴 만큼 엄청난 충격을 안겼고, 이제 소련은 더는 무시할 수 없는 분명한 우주개발 경쟁자가 됐다.

    독일 로켓기술을 온전히 확보한 미국은 여전히 V2 로켓을 재조립해 시험발사만 할 뿐이었다. 그 배경에는 폰 브라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우주에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국가라는 타이틀을 빼앗긴 미국은 자존심을 만회하고자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우주 경쟁에서 소련은 자신감을 드러냈다. 1957년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개 한 마리가 최초로 지구 궤도에 진입한다. 실제 이름은 ‘쿠드랴프카’였지만, 사냥개 품종명인 라이카로 더 유명한 개다. 슬프게도 발사 직후 몇 시간 만에 쇼크로 사망했지만, 발사 시 충격만 어떻게든 견디면 무중력 공간에서도 생명체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인류를 대신해 확인해줬다.

    1958년 미국은 플로리다주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익스플로러 1호라는 인공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하며 자존심을 회복했다. 이 위성은 지구 자기장에 의해 지구 주위에 고속의 하전 입자들이 묶여 있는, ‘밴앨런대(Van Allen Belt)’로 불리는 방사능대를 발견했다. 이곳은 아주 많은 고에너지 입자가 존재하는 구간으로, 밴앨런대 덕분에 태양으로부터 오는 유해 입자가 함부로 지표면까지 들어오지 못한다. 이제 좀 따라잡았나 싶어 숨을 돌리던 것도 잠시, 1959년 인공물체인 소련 루나 2호는 인류 최초로 달에 도달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충돌에 가까운 결과였기에 착륙이라고 표현하긴 어렵지만, 또 하나의 최초 타이틀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 드디어 우주에 도달한 최초 인간이 등장했다. 바로 러시아인 사이에서 여전히 전설적 영웅으로 칭송받는 유리 가가린이다. 전투기 조종 훈련을 받은 가가린은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세계 최초 우주인이 됐다. 그는 최초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를 타고 1시간 반 남짓 우주여행을 했는데, 음식물을 먹거나 몸을 움직이는 등 기본적인 행동들을 수행했다.


    세상을 떠난 뒤에야 알게 된 경쟁자 이름

    [사진 제공 · 위키피디아]

    [사진 제공 · 위키피디아]

    정부의 막대한 예산 지원으로 여러 차례 시험을 거치며 자신의 이론을 검증한 폰 브라운과 달리, 코롤료프는 늘 모든 발사가 마지막 기회라는 압박과 스트레스를 견디면서 연구했다. 

    두 천재 공학자가 받은 대우는 달랐지만, 재미있는 건 언제나 코롤료프가 한 발짝 앞섰다는 점이다. 인류 최초 우주비행에 놀란 미국은 대통령이 나와 사람을 달로 보내겠다고 직접 발표했다. 성공적인 로켓 개발의 흐름을 탄 소련도 자연스럽게 유인 우주선 개발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 모든 성공을 주도한 코롤료프는 수용소에서 고생하며 잃은 건강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스트레스, 과로 등으로 전신에 암이 퍼져 결국 1966년 수술대에서 사망하고 만다. 소련의 엄격한 보호 때문에 그가 죽고 나서야 폰 브라운은 경쟁자 이름을 처음 알게 됐다. 1969년 7월 20일 폰 브라운이 이끌던 미국 항공우주국은 아폴로 11호를 통해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다. 코롤료프가 죽고 나서야 미국은 처음으로 소련을 이길 수 있었고, 세기의 천재를 잃은 소련은 한동안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냉전이 서서히 끝나갈 무렵인 1975년 인류 역사상 최초 국제 합동 우주 프로젝트인 ‘아폴로-소유스 테스트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아폴로 임무의 대미를 장식하는 다국적 도킹을 통해 미국과 소련의 경쟁관계를 해소하고 협력관계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서로 간 무의미한 싸움보다 애정 어린 화합을 통해서도 과학기술이 진보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경쟁 구도에서 모든 것이 최초였기 더욱 위대한 업적들이 탄생한 것은 일을 시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운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멀리 떨어진 두 나라에서 하늘을 보며 미소 짓던 두 남자의 실루엣이 눈에 선하다.

    궤도는…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과 ‘투머치사이언스’를 진행 중이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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