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02

2019.08.16

문화

스웨터가 양말을, 방콕이 술을 불렀다

‘아무튼 시리즈’의 유쾌한 성공기 “나만의 ‘아무튼’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하는 매력으로 롱런 중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19-08-19 10: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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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독립서점 ‘땡스북스’에 비치된 ‘아무튼 시리즈’. [홍중식 기자]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독립서점 ‘땡스북스’에 비치된 ‘아무튼 시리즈’. [홍중식 기자]

    ‘문구’ ‘술’ ‘식물’ ‘양말’ ‘비건’ ‘발레’ ‘택시’ ‘딱따구리’…. 이러한 키워드로 책 한 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책을 펴낸다 해도 ‘4차 산업혁명의 미래’나 ‘월급 모아 아파트 장만하기’와 같이 중차대한 이슈가 아님에도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이런 의구심을 극복하고 ‘사소한 취향’ 실험에서 성공한 작은 책들이 있다. ‘아무튼 시리즈’다.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

    어우, 그래, 술 책을 쓰자. 술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술과 얽힌 나만의 이야기를. 술과 함께 익어간 인생의 어느 부분에 관해서. 써보자. 쓰자고.(김혼비의 ‘아무튼, 술’ 13쪽) 

    ‘아무튼 시리즈’는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다. 1인 출판사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가 ‘아무튼’이라는 우산 아래 함께 책을 펴낸다. 

    2017년 9월 ‘피트니스’ ‘서재’ ‘게스트하우스’ ‘쇼핑’ ‘망원동’ 다섯 권의 책을 출간한 이래 최근 ‘문구’까지 총 22권을 펴냈다. 요즘 같은 출판 불황 속에서도 거의 모든 책이 골고루 인기를 얻고 있다. 서너 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쇄(重刷)에 들어갔을 정도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책은 김혼비 작가가 쓴 ‘아무튼, 술’. 출간 3개월 만에 9000부가 팔렸다. 온라인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올해 들어 8월 11일까지 ‘아무튼 시리즈’의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173.6% 증가했다. 시리즈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출간 권종이 많아져 판매량이 늘어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무튼 작은 출판사들이 펴낸 책이 별다른 마케팅을 하지 않는데도 ‘신간의 홍수’ 속에 묻히지 않고 꾸준히 독자를 늘려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아무튼 시리즈’를 처음 제안한 이는 이정규 코난북스 대표. ‘나, 조선소 노동자’ ‘IMF 키즈의 생애’ 같은 사회과학 도서를 주로 내면서 가장 길게는 8개월 동안 신간을 내지 못했던 그다. 아무리 불황의 시대라 해도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그래서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함께 일했던 옛 동료들에게 ‘연합작전’을 제안했다. 



    “어릴 때부터 물이 무서웠다. 2014년 사업을 시작하면서 수영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 하루 24시간 일 생각에만 매달렸는데, 수영장 물속에 몸을 담그는 순간 ‘스위치 오프’가 되면서 일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 한 가지가 있으면 퍽퍽한 삶에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얘기를 해보자 싶었다. ‘내게 피난처가 되는 한 가지’에 대한 이야기.”

    1인 출판사의 연합 프로젝트

    [홍중식 기자]

    [홍중식 기자]

    부부인 이재현-조소정 위고 공동대표와 김태형 제철소 대표는 이 제안을 반겼다. 조 대표는 “출판도매업체 송인서적이 부도가 나고 얼마 안 된 때였다. 작은 출판사들의 타격이 특히 더 컸다. 다들 의기소침해 있을 때 의기투합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김 대표는 “혼자 기획하고 혼자 편집하고 혼자 밥 먹느라 켜켜이 쌓인 외로움을 날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반가웠다”고 했다. 

    식물에 빠져 지내며 집에는 식물들이 빠르게 늘어갔다. 식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위험한 시기에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아주 운이 좋았다.(임이랑의 ‘아무튼, 식물’ 14쪽) 

    이들은 ‘나만의 피난처’를 확실하게 가진, 평소 알고 지내던 저자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인권운동가 류은숙 씨가 쉰 살 무렵부터 빠져든 피트니스 세계에 대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쓴 김민섭 작가가 태어나고 자라 지금도 살고 있는 망원동에 대해 썼다. ‘아무튼 리스트’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저자의 폭도 확대됐다. 이재현 대표는 야구를 좋아하고 글도 잘 쓰는 지인 조지영 씨에게 ‘아무튼, 야구’를 부탁하려 만났는데, 각종 외국어를 딱 초보 수준으로만 익히는 독특한(?) 취미를 가졌다는 것을 새로 알고 ‘아무튼, 외국어’를 맡겼다.
     
    ‘아무튼, 식물’도 가장 많이 팔린 책 가운데 하나로, 이정규 대표는 저자 임이랑 씨를 트위터에서 찾아냈다. 트위터에 자신이 키우는 식물 사진을 매일 찍어 올리는 사람에게 연락했는데, 바로 인디밴드 ‘디어클라우드’에서 노래 만들고 연주하는 뮤지션 임이랑이었다고. 인기 북튜버 김겨울 씨도 제철소를 통해 ‘아무튼, 피아노’를 낼 예정이다. 김태형 대표는 “ ‘아무튼, 피아노’를 꼭 내고 싶어 저자를 찾고 있었는데, 어느 날 김씨가 트위터에 ‘아무튼 시리즈를 내가 쓴다면? 피아노’라는 짤막한 트위트를 쓴 것을 봤다. 밤 11시에 실례를 무릅쓰고 쪽지를 보내 저자로 섭외했다”고 말했다. 

    “ ‘아무튼, ○○’을 내가 쓰겠다”고 먼저 찾아오는 이들도 등장했다. 프리랜서 편집자이기도 한 구달 작가는 제철소가 펴낸 ‘아무튼, 스웨터’를 읽고 “스웨터 취향을 책으로 내는 출판사라면 양말 취향도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해 먼저 제철소로 출간기획서를 보냈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민음사)를 쓴 인기작가 김혼비 씨도 ‘아무튼 시리즈’ 작가로 합류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해온 경우다. ‘아무튼, 방콕’을 재미있게 읽은 그는 “혹시 ‘아무튼, 술’을 쓰겠다고 한 사람이 없다면 내가 쓰고 싶다”고 지인을 통해 제철소 측에 연락했다고 한다. 

    야근과 야근 혹은 야근과 회식이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날, 불 꺼진 방으로 늦게 퇴근하게 되는 그런 날이면 이따금 의미 없이 독일어 숫자 1에서 10까지, “아인츠, 츠바이, 드라이…”를 한번 읊어보고 잠이 든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 독일어를 잘하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런 뜬금없는 질척거림, 모르는 말에 대한 쓸데없는 동경이 때때로 한국어로 가득 찬 지루한 일상의 마라톤을 버티게 해주기도 한다.(조지영의 ‘아무튼, 외국어’, 73쪽) 


    아무튼 시리즈 해시태그(#)를 단 인스타그램 게시물들. [인스타그램 캡처]

    아무튼 시리즈 해시태그(#)를 단 인스타그램 게시물들. [인스타그램 캡처]

    ‘아무튼 시리즈’의 인기 요인은 ‘참신함’에 있다는 것이 외부의 평가다. 김태희 예스24 에세이 MD는 “일상과 맞닿아 있는 소재를 가지고 한 권의 책으로 풀어낸 참신함이 독자에게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에 ‘아무튼, 망원동’과 ‘아무튼, 스릴러’를 소개한 바 있는 김겨울 씨는 “택시, 잡지, 발레, 트위터 등 어쩌면 한 권의 책으로 나오기 쉽지 않은 주제들을 차곡차곡 쌓아왔다는 점이 이 시리즈의 강점”이라며 “좋은 필진들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대해 밀도 있게 쓰다 보니 책 내용이 주제에 충실하고 재미있게 읽힌다”고 평가했다.

    취향과 일상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와 통해

    [홍중식 기자, 촬영 협조 · 땡스북스]

    [홍중식 기자, 촬영 협조 · 땡스북스]

    누구나 인생에 ‘플리에(plie·발레에서 한쪽 또는 양쪽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의 순간이 있는 게 아닐까. 낮아지고, 떨어지고, 주저앉는 순간들 말이다. (중략) 그래서 나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날에는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곤 한다. 플리에 같은 그 시기를 잘 지난다면, 인생의 속근육도 자라는 것이겠지.(최민영의 ‘아무튼, 발레’ 64쪽) 

    세 출판사는 애초에 ‘아무튼 시리즈’의 주요 독자를 비슷한 취향이나 관심사를 가진 이들로 봤다. 잡지를 즐겨 읽는 사람이 ‘아무튼, 잡지’를, 채식주의자이거나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무튼, 비건’을 읽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해당 키워드에 특별한 취향이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로까지 독자층이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취향의 마이너리티’라고 할 ‘양말’ ‘외국어’ ‘발레’ ‘식물’ 등이 유명 저자가 쓴 책이 아님에도 2~4쇄를 찍을 정도로 활발하게 판매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경향이 감지된다. 조소정 대표는 “‘아무튼 시리즈’가 시작된 지 꽤 시간이 흐르고 권종도 많아지면서 잘 모르는 주제지만 궁금해 읽었다거나, 한 가지 취향·취미에 열정을 바치는 모습이 보기 좋아 읽게 됐다는 독자 후기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아무튼 시리즈’의 ‘딱따구리’ ‘발레’ ‘비건’ ‘요가’ ‘술’을 읽은 30대 직장인 권모 씨는 “저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통해 위로받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많이 공감하며 읽고 있다”면서 “해당 주제가 내 취향이나 관심과 맞지 않아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조소정 대표는 “과거 젊은 세대는 이념이나 주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다듬어나갔다면, 요즘 밀레니얼 세대는 실제 살아가는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아무튼, 비건’이 많은 호응을 얻은 것도 비건 운동을 벌이겠다는 게 아니라 비건으로 살아가는 매일 매일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구달 작가는 ‘아무튼 시리즈’의 매력에 대해 “나만의 아무튼은 뭔지 생각에 잠기게 한다는 점”이라고 했다. 굳이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아무리 사소한 것이어도 거기에 자신만의 생각과 이야기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는 권당 9900원으로 요즘 책치고는 매우 저렴한 편이고, 한 손에 쥐기 쉬운 문고판 크기에 150쪽 안팎으로 분량도 많지 않다. ‘가볍게 사서 읽기 좋은 책’으로 기획한 이유는 그래야 제작비용이 적게 들고, 판매량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정규 대표는 “요즘 젊은 세대는 쉽게 사서 금방 읽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하려는 욕구가 있는데, 소위 ‘북스타그램’에 적합한 책이라는 점이 인기 요인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고 말했다.

    9900원으로 99권까지

    아무튼 시리즈’는 앞으로 ‘떡볶이’ ‘미드’ ‘빨강’ ‘연필’ 등 19권의 책을 더 펴낼 계획이다. 아직 공식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출간 계획이 잡힌 책들도 몇 권 더 있다. 이들 세 출판사는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9900원으로 99권까지 출간하자”는 것이 포부였는데, 기대 이상으로 반응이 좋아 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이정규 대표는 “ ‘아무튼 시리즈’로 출판사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서점 담당자들에게 구구절절 출판사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며 “시장의 신뢰를 얻은 것도 1인 출판사로서 큰 성과”라고 말했다. 김태형 대표는 “혼자 했다면 2년도 되지 않아 22권을 출간할 만큼 빠른 속도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며 “1인 출판사들 간 연대가 사업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든든한 우군이 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조소정 대표는 “ ‘아무튼 시리즈’가 품으려는 ‘애호’는 취향뿐 아니라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려는 평소의 생각도 포함된다”며 “앞으로도 세 출판사가 각자 개성을 유지하면서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책을 출간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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