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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맘이어도 괜찮아

일본 위미노믹스의 그늘

“여성이 빛나게 하겠다”던 아베, 여성의 일 ·  육아 부담 가중시켜

일본 위미노믹스의 그늘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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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영국에서 막 공부를 시작했을 때 우연히 T라는 일본 남성을 알게 됐다. 그는 일본 최고 명문대인 도쿄대를 졸업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다 MBA 과정에 진학한 엘리트였다. 늘 하얀색 셔츠를 단정하게 입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 호감을 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내가 가졌던 좋은 인상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어느 날 그가 싱글벙글 해맑게 웃으며 “제 아내도 도쿄대를 나왔어요. 매우 똑똑한 여성이죠. 그런데 지금은 집에서 애만 키워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T의 천진한 웃음에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 도쿄대까지 진학했음에도 육아와 살림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하고 집에 머물렀어야 했을 아내에 대한 배려는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T 외에도 여성이 출산 후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육아를 전담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 유학생을 종종 만났다. 그래서일까. 몇 년 뒤 영국 옥스퍼드대의 일본인 교수가 “일본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젊은이가 더는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남성 못지않게 교육 받고 소득도 있는 일본 여성이 굳이 결혼해 T의 아내와 같은 처지가 되려 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쿄대 나와 애만 키워요”

2월 2일 일본 워킹맘의 현실을 상세하게 보도한 미국 ‘뉴욕타임스’ 기사와 어린이날  남자 어린이들의 무사 성장과 입신양명을 비는 뜻에서 매다는 도쿄타워의 잉어 깃발 고이노보리(鯉のぼり)를 구경하는 일본인 가족, 2017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여성지도자회의에서 연설에 나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신화  =  뉴시스, 뉴욕타임스 홈페이지 기사 화면 캡처]

2월 2일 일본 워킹맘의 현실을 상세하게 보도한 미국 ‘뉴욕타임스’ 기사와 어린이날 남자 어린이들의 무사 성장과 입신양명을 비는 뜻에서 매다는 도쿄타워의 잉어 깃발 고이노보리(鯉のぼり)를 구경하는 일본인 가족, 2017년 11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여성지도자회의에서 연설에 나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신화  =  뉴시스, 뉴욕타임스 홈페이지 기사 화면 캡처]

오히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아베 정권이 추진한 ‘위미노믹스(Womenomics)’가 표면적으로나마 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위미노믹스는 1999년 캐시 마쓰이 골드만삭스 수석전략가가 일본 고령화의 해법으로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를 주장하며 제안한 개념이다. 여성 인력의 활용이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이 제안은 14년 뒤인 2013년 ‘여성이 빛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아베 신조 총리의 선언과 함께 일본 사회에 본격적으로 도입됐다. 

‘남자는 일, 여자는 가정’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은 일본 사회에서 과연 위미노믹스가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초반의 회의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골드만삭스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율은 1999년 56%에서 2019년 2월 71%로 높아졌다. 보고서는 이 추세가 계속돼 일본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율이 남성의 참가율(83%)에 근접한다면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10%까지 추가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아베의 선언대로 일본은 정말 ‘여성이 빛나는 사회’로 거듭나고 있는가.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저출산·고령화를 겪었고, 여성의 평균 초산 연령도 2016년 30.7세(도쿄는 32.3세, 한국은 31.4세)로 높은 편이다. 만약 일본 사회가 오랜 성차별의 고리를 끊고 남녀가 함께 빛날 수 있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면,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한국에게도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언론보도는 아베의 위미노믹스가 기존의 차별 구조는 유지한 채 오히려 일본 여성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올해 2월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일본의 워킹맘 : 기록적인 책임, 아빠의 도움은 거의 없어(Japan’s Working Mothers : Record Responsibilities, Little Help from Dads)’라는 특집 기사에서 일본 워킹맘의 어려운 현실을 상세히 다뤘다. 기사에 등장하는 38세의 일본 여성은 퇴근 후 청소, 세탁, 요리 같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혼자 아이들을 돌본다. 유치원과 학교가 요구하는 온갖 숙제와 아이의 일상에 관한 각종 기록도 그의 손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남편은 밤 11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한국인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풍경을 자세하게 기술한 것을 보면 NYT 기자에게는 그 모습이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기사는 ‘일본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출이 역사적인 규모로 이뤄지고 있지만, 여성에게 맡겨진 산더미 같은 집안일과 육아 부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아베의 위미노믹스에 대해 일본 여성들이 “남편도 돌보고 아이도 돌보는데, 직장 일까지 하라고?”라며 한숨을 쉬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저임금, 비정규직 많고 승진은 못 해

30대 중·후반에 출산한 일본 늦맘의 경우 상황은 더욱 녹록지 않다. 소마 나오코 일본 요코하마국립대 교수는 2010년대 만혼과 고령 출산의 증가로 어린 자녀와 연로한 부모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더블 케어’의 부담이 늘어날 것을 우려한다. 그는 최근 연구에서 더블 케어를 담당하는 30대 후반~ 40대 여성의 상당수가 실제로는 자녀 돌봄, 노인 돌봄, 유급 노동 등 ‘삼중고(Triple Burden)’를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Yamashita and Soma, 2017). 

통계 수치도 위미노믹스의 그늘을 보여준다. 일본 여성은 일본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25% 적게 번다. 중위임금의 3분의 2 미만을 받는 저임금 여성 노동자의 비율도 22.1%에 달한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17). 비정규직이나 파트타임의 비율도 높다(56%). 지난해 새로 취업한 여성의 73%가 비정규직에 취업했을 정도다(Japan Times, 2019). 과장급 이상 관리직에서 여성 비율은 13.2%로 35~44%에 달하는 독일, 영국, 싱가포르, 미국에 비해 매우 저조한 수준이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2018년 글로벌 젠더 갭 지수에서 일본은 149개국 중 110위에 그쳤다. 아베는 “미국 여성보다 일본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율이 높다”고 자랑하지만, 실상은 일본 여성이 여전히 집안일과 육아 부담을 감당하느라 파트타임이나 비정규직을 택할 수밖에 없고, 승진 등 적절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상황을 보며 빛 좋은 개살구라고 혀를 끌끌 차주고 싶지만, 여성의 경제활동과 관련된 각국 통계를 들여다볼 때마다 늘 일본 뒤에 한국이 있어 차마 그럴 수 없다. 지난해 기준 한국 여성의 노동시장 참가율은 52.9%에 불과하고, 앞서 언급한 저임금 여성 노동자 비율은 35.3%로 OECD 회원국 중 1위를 차지한다. 100대 기업 과장급 이상 여성 관리자의 비율도 8.7%에 불과하다(2016년 기준). 2018 글로벌 젠더 갭 지수에서 한국의 순위는 일본보다 6계단 뒤진 115위였다.


오히려 ‘일  ·  육아 병행’ 프레임 깨야

일본 도쿄에서 엄마와 아이들이 퍼포먼스를 펼치는 아티스트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신화  =  뉴시스]

일본 도쿄에서 엄마와 아이들이 퍼포먼스를 펼치는 아티스트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신화  =  뉴시스]

위미노믹스를 처음 제안한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여성의 고용시장 참여 촉진을 통해 한국이 남녀 고용 격차를 좁힐 경우 GDP가 14.4%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견 고무적인 전망이다. 그러나 일본 사례에서 보듯, 고용의 양적 확대에만 치중한다면 오히려 여성의 부담만 안팎으로 가중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상주의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어쩌면 한국과 일본에 필요한 것은 ‘워킹맘’을 지원함으로써 여성의 일과 육아 병행을 가능하게 한다는 프레임워크 자체를 깨는 일인지도 모른다. 근무 조건을 개선하고, 좀 더 유연하면서도 자유로운 일터 환경을 만들어가는 일, 어린아이와 노쇠한 부모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돌봄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결코 워킹맘/여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출퇴근시간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고, 휴가를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며, 명확한 기준을 가진 시스템에 따라 업무 기여도가 평가된다면 굳이 따로 워킹맘/여성을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김 대리’는 독감 걸린 아이와, 싱글인 ‘박 과장’은 연로한 부모와 함께 병원에 다녀오기 위해 눈치 보지 않고 하루 휴가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김 대리는 엄마일 수도, 아빠일 수도 있다. 박 과장 역시 아들일 수도, 딸일 수도 있다. 

또한 여성이건, 남성이건 성별에 관계없이 원하는 배우자가 가장이 돼 소득을 책임지고 다른 배우자는 살림과 육아에 전념한다거나, 부부가 합의하에 각자 가장 적합한 비율로 일과 육아를 나눠 담당할 수 있다면 어떨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육아 부담을 도맡아 경력이 단절되거나,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파트타임을 전전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채 직장 내 경쟁과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는 것도 부당하지 않은가. 

카비타 람다스(Kavita Ramdas)라는 인도 출신의 유명한 미국 페미니스트를 만난 적이 있다. 첫아이를 출산한 뒤 그는 자신이 살림과 육아에 도통 소질이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고민 끝에 남편에게 아무래도 자신은 나가서 돈 버는 일에 전념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그의 남편은 반색하며 자신은 아이를 키우면서 집안을 돌보고 싶다고 했다. 이후 이들 부부는 아내가 생계를, 남편이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해군 제독이던 카비타의 아버지는 살림하는 사위를 매우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사위가 어린 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지켜보던 늙은 해군 제독의 뺨에 조용히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놀란 카비타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그의 아버지는 “나는 한 번도 너와 저런 시간을 보내지 못했구나”라고 대답했다. 이후 카비타의 아버지는 사위를 매우 존중하고 이해했다고 한다.


양성평등 가치관, 한국이 일본보다 높아

일본 위미노믹스의 그늘
아이를 낳고 돌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페널티’가 아니다. 소중한 권리다. 어쩌면 이 권리를 가장 누리지 못하는 한국과 일본의 남성들이 가장 앞장서 ‘육아할 권리’를 외쳐야 한다. 스웨덴에서 남성 육아휴직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육아휴직이 남성의 소중한 권리임을 사회가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일본의 위미노믹스가 한계를 갖는 것은 이와 같은 양성평등(Gender Equality)의 실현과 그것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이 아닌, 인구 고령화에 따른 인력 부족 해소를 위해 여성 노동력 활용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록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나 소득 등 여러 지표에서 한국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의식 측면에서는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그래프 참조). 이를테면 최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실시한 가치관 조사에서 일본 남성은 55.8%가 ‘남성 육아휴직에 찬성한다’고 밝힌 데 비해, 한국 남성은 81.4%가 찬성 의사를 나타냈다. ‘가계의 생계는 남성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한국 여성은 15.8%가 찬성해 일본 여성(32.9%)의 절반에 불과했다. ‘남자가 할 일은 돈을 버는 것이고, 여자가 할 일은 가정을 돌보는 것이다’라는 견해에 대해서도 한국 여성의 7.4%, 한국 남성의 11.4%만이 찬성한다고 밝혔다. 일본 여성(19.2%), 일본 남성(17.2%)보다 훨씬 낮은 수치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한국이 지향할 위미노믹스가 일본의 그것과는 다를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다.






주간동아 2019.07.26 1199호 (p62~65)

  • 전지원 토론토대 글로벌사회정책연구센터 연구원 latermotherho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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