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8

..

반공 국가주의와 지역주의 사이

한국 대표 보수주의자가 된 선우휘…정치 성향보다 ‘인정’ 중시, 이념 뛰어넘는 평안도 사랑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입력2015-10-12 13:1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반공 국가주의와 지역주의 사이

    1979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깃발 없는 기수’ 원작은 선우휘의 동명 중편소설로 해방 후 건국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좌우익으로 갈려 싸우는 혼탁한 세상을 신문기자 허윤의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이다.

    유신이 선포되던 1972년 10월, 지명관은 일본으로 떠났다. 1970년대 유신정권기부터 80년대 전두환 정권기까지 일본 시사월간지 ‘세카이(世界)’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하면서 한국 정치 상황과 민주화운동을 바깥에 알린 익명의 필자 ‘TK생’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지명관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지명관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지명관이 ‘월간조선’ 1986년 8월호에 이례적으로 한 편의 추도문을 보냈다. 선우휘의 부고 직후였다. 당시 일본에 있던 지명관은, 그해 6월 13일 새벽 선우휘의 부고를 들었다고 한다.

    “그날은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은 것이다. 그와 나와는 2년 차이를 두고 평안북도 정주읍 정주보통학교에 다녔다. 그는 개교 이래의 수재에 숭앙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타이를 때는 ‘휘를 보라’라고 할 정도였다. 그가 그 당시의 최고 난관이라고 하던 경성사범에 진학했을 때…”(지명관의 ‘선우휘 형을 떠나보내고’).

    1980년부터 사망 전까지 선우휘는 ‘조선일보’ 논설고문으로 ‘선우휘 칼럼’이라는 제목의 극우 보수 성향의 글을 집필했다. 지명관과는 반대 길이었다.

    선우휘만큼 한국 사회의 여러 모습과 변화를 몸으로 보여주는 인물도 드물다. 그는 해방 후 한국이 처한 결정적 국면에서 항상 현장에 있었다. 그게 가능했던 데는 선우휘가 현실을 포착하는 소설가이면서 무엇보다 언론인이던 이유가 컸을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 선우휘라는 인물 자체가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선우휘의 선택과 행보는 의미하는 바가 많다. 그는 학병세대였으며 교사, 군인, 언론인을 두루 거치면서 해방 후 역사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선우휘는 오늘날까지 수많은 한국인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커다란 하나의 집단 성향, 곧 ‘지역주의’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1922년생 선우휘는 학병세대임에도 일제강점기 말 학병동원령에서 제외됐다. 당시 이공계와 사범계는 동원령에서 제외됐는데 경성사범 학생 선우휘도 그 혜택을 받았다. 그럼에도 지성사에 국한해 이야기하자면 선우휘는 월남 학병세대의 중심에 가장 가까이 있다.



    작가로서 선우휘는 1950년대 후반 형성된 지식인 사회의 최대 화두였던 ‘한국 사회의 근대화’를 가장 표 나게 서사화한 사람이다. 57년 제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단편소설 ‘불꽃’은 단숨에 그를 문단의 총아로 만들었고,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지금까지 인정되고 있다. 동인문학상 수상 당시 선우휘는 현역 대령이었다. 선우휘의 동인문학상 수상식에는 당시 육군참모차장이던 장도영 중장도 참석했다. 선우휘는 수상 이후 예편하고 해방기 잠시 평기자로 근무했던 조선일보로 다시 들어갔다.

    오늘날 조선일보의 이데올로기 입지에 선우휘가 끼친 영향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선우휘는 재입사한 이래 평생을 조선일보에 재직했다. 1963년 사장이 된 방우영이 대대적 회사 구조개편의 파트너로 선우휘를 택했다고 한다. 71년부터 80년까지 주필을 지냈고, 80년부터 86년 퇴임 때까지 논설고문으로 있었다.

    피가 뜨거웠던 지식인

    반공 국가주의와 지역주의 사이

    선우휘는 192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기자와 인천중 교사를 지낸 뒤 정훈장교로 입대했다, 58년 예편 뒤 다시 언론계로 돌아왔다.

    선우휘에 대한 여러 회고를 종합해보면, 그는 ‘감정’을 무척 중요시하고 ‘지역주의적인’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는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고향 평안도 쪽 사람들이라면 끝까지 돕고 보호하고자 했다. 함석헌에 대해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 격분하기도 했다. 술과 노래를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번 술을 마시면 인사불성이 될 지경까지 갔다고 한다.

    많은 이가 1965년 무렵을 전후해 선우휘가 보수 성향으로 변화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선우휘는 젊은 시절부터 보수 우익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관되게 보수 성향이었다. 해방기 20대인 선우휘에게 테러로 악명 높았던 극우 성향의 반공 청년단체 서북청년회(서청)는 작지 않은 비중이었다. 정식 입회는 하지 않았지만, 서청 단장인 선우기성이 동향인 정주 출신인 데다 일가 먼 친척 형님이었고 개인적으로도 막역한 관계였다. 서청을 회고할 때마다 선우휘는 그 비합리성을 지적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옹호론을 펼쳤다. 월남 학병세대의 ‘논리 이전의 감각’으로 반공을 가장 확연히 노출한 존재가 선우휘였다.

    해방 후 선우휘는 조금씩 ‘오른쪽으로’ 이동해갔다. 좌익이라면 중도노선도 용납될 수 없었다. 자서전에 가까운 소설 ‘노다지’에서 여운형을 “값싼 인기를 얻으려고 기를 쓰는 가짜” “임화니 김남천이니 하는 마르크스 보이, 창백한 문학청년들한테 질질 끌려다니는 주견머리 없는 사람”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1949년 정훈장교 시험에 합격해 소위로 임관한 선우휘는 전쟁 직전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이던 극우 이데올로그 이선근 밑에서 ‘화랑보(花郞報)’를 제작했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이선근을 수행하는 기록장교로 일하면서, 대전으로 이동하는 국방부를 따라 이선근과 동행했다.

    해방 이전 교사 생활을 했고, 해방 후에는 신문기자였던 선우휘가 군인이 된 동기는 무엇일까. 문학연구자 한수영은 선우휘의 소설 가운데에서 한 장면을 포착했다.

    반공 국가주의와 지역주의 사이

    선우휘 단편소설 ‘불꽃’은 1975년 유현목 감독이 영화화했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에 교육받은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수인에게 있어서 군인이란 가장 순수한 인간에 들었다. 노일전쟁 해전에서 이긴 도고 제독과 여순에서 이긴 노기 장군은 나라에 충성된 인간의 표본이었다.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을 알고는 있었으나 인상이 희미했다. 그 뒤 일본인 동급생들이 태평양전쟁에 나가 그 상당수가 특공대로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순수하게 살았고 아름답게 죽어갔다는 점에 있어서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해방된 지금도 수인은 가끔 그들을 생각하는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죽어간 것이 왠지 부럽게 느껴지는 수가 있었다”(선우휘의 ‘노다지’).

    한수영은 다음과 같이 선우휘를 평한다.

    “태어날 때부터 조국이 없었던 식민지 소년 선우휘에게, 충성을 바쳤던 천황이 죽자 동반자결했던 노기 장군의 순사(殉死)에 관한 일화는 ‘국가에의 귀속감’을 맛보게 한 강렬한 대리체험의 계기가 되어주었다. 해방 직후 북한 사회가 파시즘을 닮아가고 있다고 우려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교육을 통해 체화된 ‘국가주의’의 화신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이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이러한 이율배반은 선우휘 개인뿐 아니라 이들 세대 일반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모순성이다”(한수영의 ‘한국의 보수주의자 선우휘’).

    ‘국가주의의 화신’을 선우휘 세대 일반이 가진 성격이라고 본 것은 다소 지나친 견해이지만, 선우휘가 ‘군인’이 되고자 했던 배경에 국가주의자로서의 성향이 작용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게다가 그는 ‘피가 뜨거운’ 사람이었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현대사의 격동기에 책상머리에서 글만 쓰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반공 국가주의와 지역주의 사이

    선우휘의 단편소설 ‘불꽃’은 현실주의자인 할아버지, 3·1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민족주의자 아버지,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해 해방 후 교사가 된 아들까지 3대가 겪는 비극을 그렸다. 사진은 동명 영화의 한 장면.

    “나는 형이고 너는 동생이다”

    1964년 11월 22일 조선일보 편집국장 선우휘와 정치부 기자 리영희가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앙정보부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관련 기사를 문제 삼았다. 30대 중반 젊은 기자 리영희의 기사는 중립국들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안을 제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이 남한 단독가입을 추진하던 정부 정책에 배치됐던 것이다. 선우휘는 법원의 구속적부심으로 5일 후 석방됐고 리영희는 구속만기로 27일 만에 석방됐다. 리영희를 석방하는 대가로 ‘무언가’가 필요했을 때, 선우휘가 자신의 편집국장직을 내놓았다.

    선우휘의 삶과 생각의 궤적을 논하는 이들은 이 사건을 근거로 1965년 이전의 선우휘와 이후의 선우휘를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선우휘가 아주 보수적인 인물은 아니었는데 이후 점차 변해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전말에는 중요한 포인트 하나가 있다. 선우휘가 자신의 편집국장직을 내놓으면서까지 리영희의 석방을 위해 뛰었던 배경에는 리영희가 ‘평북 삭주’ 출신이라는 사실이 있었다.

    선우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그의 삶과 생각에서 반공주의에 버금가는, 어떤 면에서 반공을 능가하는 주요한 뿌리는 ‘지역주의’였다. 극우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서청 같은 극단적 형태로는 그 성향이 드러나지 않았던 까닭에는 역설적으로 지역주의라는 또 하나의 비합리적인 ‘거멀못’이 있었다.

    해방 후인 1946년 4월 선우휘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게 된 것도 조선일보가 ‘동향의 어른’ 방응모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때부터 정주 사람들은 조선일보를 ‘우리네 신문’이라고 일컬어왔다. 금광왕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정주 출신 계초 방응모가 인계 맡아 비로소 사세를 확립시키고, 정주 태생 춘원이 함께 일한 신문으로 정주 사람들 자랑거리였던 것이다”(선우휘의 ‘노다지’). 소학교 때부터 선우휘와 절친한 사이였던 지명관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로도 선우휘 아버지와 방응모가 가까웠다고 한다.

    반공 국가주의와 지역주의 사이

    2003년 6·25전쟁 특집드라마로 방영된 EBS 문학산책 ‘단독강화’의 한 장면. 선우휘가 1959년 발표한 동명 소설은 부상을 입고 낙오한 국군 병사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북한군 병사가 만나 서로 의지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조선일보에 대한 선우휘의 애정은 대단했다. 6·25전쟁 당시 1·4후퇴 때 조선일보 시설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것은 당시 군 정훈장교였던 선우휘 덕이었다. 그는 상부의 방화 지시에 불복하고 조선일보 시설을 그대로 뒀다. 1965년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양호민(‘사상계’ 주간 겸임)이 한일협정에 반대하다 ‘정치교수’로 낙인찍혀 해직됐을 때, 조선일보로 데려오도록 애쓴 것도 선우휘였다. 또 그는 민주화운동 진영의 함석헌, 지명관 등을 끝까지 보호하려고 했다. 일본 ‘세카이’지에 글을 싣던 ‘TK생’을 중앙정보부가 추적하고 있을 때, 이를 따돌린 인물도 선우휘였다. 지명관은 말한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견해가 “피차 달랐어도 철저하게 그는 자기가 내 형이다, 동생을 돌본다, 하는 생각이 철저했다”. 지명관의 회고 그대로, 선우휘는 “행동파적이고 봉건적이고, 한국적인 그 부모를 생각하고 그런, 굉장히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모럴을 가진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온정적인 사람이었다.

    반독재운동 앞장선 계훈제와의 만남

    연재 중 사망함에 따라 유고가 되고 만 선우휘의 글 한 편이 있다. ‘월간조선’ 1986년 7월호 ‘나의 언론생활 40년’이다. 해방기가 끝날 즈음, 선우휘의 삶에서 조선일보 기자 생활과 인천중(현 제물포고) 교사 시절 사이 잠깐 동안 공백기가 있었다. 마음이 힘들 무렵, 하필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순화병원에서 수용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때 평북 선천 출신 동갑내기 계훈제를 만났다. 선우휘는 유고에서 이 일을 잊지 않고 기록했다. 집필 당시 계훈제가 80년대 반독재운동의 최선두에 서 있을 때였다.

    “당시 동생이 뒤따라 월남하여 이북학생연맹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그 이북학생연맹의 위원장이 어느 날 나의 병실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 후 그는 몇 번이나 병원을 찾아와 나를 위로해주었고 (중략) 늘 허름한 녹색 군복에 허름한 군화를 신고 있었다. 당시 발진티푸스라면 전염하기 쉬운 위험한 전염병으로, 그런 속에서 보여준 그 키 큰 허름한 차림의 이북학생연합 위원장의 인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후 오랫동안 나는 그의 인정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지금 어떤 정치단체에 가담하고 있다. 그가 앞으로 어떤 정치노선을 갈 것인지는 모르나, 제발 그 옛날의 젊은 시절에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던 초심만은 잃지 말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정치 성향보다 인정이 중하다고 믿는 나는 장차 그가 어떤 정치노선을 가더라도 전에 나에게 보여주었던 인정만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