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31

2018.03.28

권재현의 심중일언

“기형도 시의 원점은 1975년 5월 16일 누이의 죽음에서 찾아야”

사후 29년 만에 기형도의 비밀 공개한 소설가 김태연

  • 입력2018-03-25 13: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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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의 절친이던 김태연 소설가가 연세대 신촌캠퍼스 내 윤동주 시비 뒷면에 적힌 윤동주의 기일을 가리키고 있다. 2월 16일은 기형도의 음력 생일이다. 또 그 아래 윤동주가 숨진 나이가 29세였다고 적혀 있는데 기형도 역시 29세에 숨졌다. [홍중식 기자]

    기형도의 절친이던 김태연 소설가가 연세대 신촌캠퍼스 내 윤동주 시비 뒷면에 적힌 윤동주의 기일을 가리키고 있다. 2월 16일은 기형도의 음력 생일이다. 또 그 아래 윤동주가 숨진 나이가 29세였다고 적혀 있는데 기형도 역시 29세에 숨졌다. [홍중식 기자]

    시인 기형도는 1989년 3월 7일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병인 고혈압으로 인한 급성뇌졸중이라는 사망 진단을 받았다. 그 후 석 달이 안 된 5월 30일 그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발간됐다. 그 시집 뒤편에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이란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현은 기형도의 시세계를 ‘극단적으로 비극적인 세계관’ ‘도저한 부정의 세계관’으로 규정했다. 

    기형도와 개인적 인연이 없던 김현은 그가 남긴 시만 놓고 그 연원을 추리해나갔다. ‘위험한 가계 · 1969’를 읽고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 때문에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판단했다. ‘빈집’에서는 불가능한 사랑 때문에 역설적인 ‘내적 망명’을 선택했다고 봤다. 그리하여 ‘가난’과 ‘이별’이란 지독한 상실의 체험이 시의 원천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한국 시에서 그런 부정성을 보여준 시인이 누구일까”라고 자문할 정도로 그 ‘도저한 부정성’의 기원은 끝끝내 밝히지 못한다. 다만 “나는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 봐 겁난다. 그 길은 너무 괴로운 길이다”라며 진한 연민의 감정을 토해냈을 뿐이다. 

    시집이 나오고 1년 뒤 명탐정 김현도 숨을 거뒀다. 이후 기형도에 대한 여러 책이 쏟아졌지만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기자의 생일은 기형도의 기일과 겹친다. 1990년 기형도 1주기 때 누군가 기자에게 ‘입 속의 검은 잎’을 선물했다. 선물한 사람도, 기자도 당시엔 3월 7일이란 날짜에 주목하지 못했다. 시집 뒤에 실린 김현의 해설을 읽다 비로소 이를 발견했고, 매년 생일 때마다 기형도 시집을 읽는 것이 일종의 리추얼이 됐다.
     
    그런데 올해는 기사 마감일과 겹쳐 그 리추얼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 뒤 서점을 찾았다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라는 소설책을 발견했다. 시 ‘빈집’의 첫 구절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를 원용한 제목이었다. 프롤로그에 1989년 3월 6일 저녁 6시에서 6시 반까지 당시 중앙일보 편집부 기자였던 기형도와 마지막 통화를 나눈 저자의 특별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날 기형도는 저자에게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찬사를 들려줬다고 했다. 그리고 9시간 뒤인 7일 오전 3시 반 기형도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 숨진 채 발견됐다. 

    소설은 그렇게 1979년 3월 6일 기형도와 첫 만남, 그리고 10년 뒤 같은 날짜에 이뤄진 기형도와 최후의 통화 등 내밀한 우정의 기록을 담고 있었다. 29세에 숨진 친구의 29주기를 맞아 소설 형식으로 펴냈지만 대부분 사실에 입각했다는 설명과 함께. 결국 책을 사서 끝까지 통독한 기자는 김현이 결코 밝혀낼 수 없던 그 미스터리를 풀어낼 수 있었다.

    가을 무덤-祭亡妹歌



                                                           기형도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영하)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나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하구(河口)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신경(神經)을 앓는 중풍환자(中風病者)로 태어나
    전신(全身)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一 노래, 二 그림, 三 시(詩)

    김태연 작가가 1979년 3월 6일 동갑내기 신입생이던 기형도와 첫 인연을 맺었던 연세대 언더우드관 돌계단에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홍중식 기자]

    김태연 작가가 1979년 3월 6일 동갑내기 신입생이던 기형도와 첫 인연을 맺었던 연세대 언더우드관 돌계단에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홍중식 기자]

    저자 김태연(58)은 누구일까. 기형도의 동갑내기 대학친구이자 같은 ‘연세문학회’ 출신으로 1987년 ‘폐쇄병동’이란 장편소설로 등단해 지금까지 소설 7편을 발표한 중견소설가다. 문학평론가 남진우, 소설가 성석제, 시인이자 소설가 원재길과 함께 기형도의 절친 문인 4인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연세대 신소재공학과 출신이지만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6년간 초빙연구원으로 일했고, 중학교 2학년 수학 교과서 집필에도 참여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국내 최초 수학소설 ‘이것이다’와 ‘이로써 영원히 계속 되리’를 발표한 재야의 수학 고수이기도 하다. 

    올해 기형도 기일 전 책이 출간되자 일간지 여러 곳에 그의 인터뷰가 실렸다. 기형도가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단언과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의 철학에 심취한 시인이었다는 내용만 보였다. 저자에게 전화를 했고 그 비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책을 다 읽고 전화한 기자는 처음이라고 했다. 꽃샘추위가 몰아닥친 3월 20일, 그와 기형도의 우정이 영근 연세대 신촌캠퍼스 윤동주 시비 앞에서 그를 만났다. 

    소설 속 그의 분신 허승구는 수학에 미친 ‘또라이’이자 두주불사의 술꾼이었다. 기형도와 첫 만남이 이뤄진 것도 수학과 술 때문이었다. 신입생으로 전공필수인 수학 강의를 듣다 수준이 너무 낮다며 박차고 나와 언더우드관 계단에 앉아 술을 마셨고, 이내 취해 곯아떨어졌다. 역시 신입생이던 기형도가 그를 업어 연세문학회 서클룸 소파에서 재워준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진짜 승구(김태연은 필명이고 본명은 김승구)는 희끗한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있었지만 아담한 체구에 눈이 맑은 사내였다. 예순이 다 된 나이에도 변함없이 술을 좋아한다는 그는 한동안 말을 아끼다 친구 이야기가 나오자 눈빛이 바뀌었다. 

    “29년간 한 해도 안 빼놓고 형도 기일만 되면 묘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버지 성묘는 빼먹을 때가 있어도 형도 묘지를 찾는 일은 한 해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완공된 기형도문학관(경기 광명시) 설립의 기획과 준비를 맡은 것도 저였습니다. 그렇지만 언론의 전면에 나서는 것만큼은 삼갔습니다. 녀석이 빛나도록 그림자처럼 지내는 나 같은 친구놈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소설에서 허승구는 기형도의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소설 속 기형도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상식적 인간이라면 넌 비상식적 인간이었고, 내가 시라면 넌 소설이었고, 내가 음악에서의 협화음이라면 너는 불협화음이었고 (중략) 내가 곡선처럼 유한 스타일이라면 넌 직선처럼 강한 스타일이었고 (중략) 내가 팔방미인이라면 넌 수학에 특화된 일방미인이었어”였다. 기형도는 기이하게도 그런 김태연을 유독 아끼고 좋아했다고 한다. 


    “사실 수학밖에 모르던 제가 연세문학회에 들어간 것도, 재학 도중 장편소설을 써 등단한 것도 기형도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당시엔 이공계 출신이 문학한다고 하면 깔보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형도는 그런 내색 한 번 없이 늘 저를 다독여줬어요. 한번은 ‘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라고 정색하고 물었어요. 녀석이 웃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플라톤, 칸트, 러셀,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가 모두 수학자였잖아’라고 답하더군요.”

    기형도는 제2의 윤동주를 꿈꿨다

    김태연 작가가 보관해온 기형도의 정치경제학 수업 노트 복사본. 강의를 들으며 필기한 내용인데도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잘돼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왼쪽은 김태연 작가의 장편소설 ‘폐쇄병동’과 기형도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가 나란히 실린 ‘문학정신’ 1988년 8월호 복사본. [홍중식 기자]

    김태연 작가가 보관해온 기형도의 정치경제학 수업 노트 복사본. 강의를 들으며 필기한 내용인데도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잘돼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왼쪽은 김태연 작가의 장편소설 ‘폐쇄병동’과 기형도의 시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가 나란히 실린 ‘문학정신’ 1988년 8월호 복사본. [홍중식 기자]

    실제 기형도는 종교가 철학이라고 할 만큼 철학에 심취했다고 한다. 가까운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꼭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곤 해 철학을 흐느끼는 병에 걸렸다는 핀잔을 곧잘 들었다고 한다. 둘은 친구였지만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기도 했다. 기형도가 철학과 정치·경제학 관련 선생이었다면, 김태연 자신은 그것에 대한 수학적 지식을 공유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인문학적 지식은 대부분 기형도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기형도가 팔방미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에 따르면 기형도는 중고교를 모두 수석 졸업한 수재이자 다방면의 예술적 재능까지 갖췄는데 그중 문학적 재능이 제일 떨어졌다고 한다. 

    “기형도의 재주 중 첫 번째는 노래였고 두 번째가 그림, 세 번째가 시였습니다. 형도의 시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장소가 어디든 형도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옆 좌석에서도 입을 다물고 경청했고 끝나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으니까요. 학창 시절 후배였던 안치환이나 강산에의 노래를 듣고 ‘그렇게 지르지만 말고, 형도처럼 좀 울리는 맛이 있어야 노래지’라고 구박할 정도였어요. 문학평론가 유종호 선생도 ‘뒤풀이 장소에서 기형도의 노래를 듣는 맛에 중앙일보 신춘문예 심사를 봤다’고 하더군요. 그림도 무척 잘 그려서, 형도가 초상화를 그려준 술집에선 정말 대접이 달랐어요. 시가 제일 마지막이었죠. 그래서 제게 기형도를 한마디로 설명해달라고 하면 ‘대체불가능한 음유시인’이라고 답합니다.” 

    소설에서 소름끼치는 장면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윤동주와 기형도의 싱크로율에 대한 것이다. 기형도가 서울대를 가고도 남을 성적이었음에도 일부러 연세대를 택한 이유가 윤동주가 나온 대학이어서라고 했다. 기형도의 인생목표는 ‘윤동주의 시처럼 오랫동안 사람들이 좋아할 좋은 시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소설에는 기형도가 죽기 얼마 전 윤동주 시비 뒷면에 적힌 윤동주의 기일이 2월 16일인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장면이 등장한다. 기형도의 음력 생일이 2월 16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신입생 시절 두 사람이 우연히 역술인을 만났는데 기형도의 음력 생일을 묻더니 “자네가 하늘을, 별을 상징하는 꼭 누구의 환생 같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몇 년 뒤 그 역술인을 김 작가가 다시 만났을 때 “자네 친구는 미인박명의 운명인데, 죽고 나면 아주 유명해질 팔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너무 소설 같아 사실이냐고 물어봤다. 김 작가는 “216이 ‘108+108’이라 번뇌가 많은 숫자라는 수리학적 설명 외에는 전부 사실”이라고 했다. 기형도가 216이라는 숫자에 집착이 컸다는 에피소드도 전부 사실이라고.
     
    윤동주 시비 뒷면에는 윤동주가 29세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고 적혀 있다. 기형도가 숨진 나이와 같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차이가 있다. 윤동주는 만 27세 1개월에 죽었고 기형도는 만 28세 11개월에 숨졌다. 하지만 스물아홉 언저리에 요절했다는 사실을 공유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윤동주는 타고난 성품이 고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 작가에 따르면 “기형도는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했다. 

    “제가 KDI에 근무하면서 난다 긴다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지만 형도처럼 머리가 좋으면서 착하기도 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형도가 학교에 다닐 때 가끔 늦게 집에 올 때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싸움이 날 때였대요. 형도가 싸운 게 아니라 싸움이 난 두 친구를 어떻게든 화해시키느라 늦었다는 거예요. 저는 맨날 애들과 티격태격하느라 늦었는데. 또 노트 필기를 기막히게 잘했는데, 시험 때가 되면 원하는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복사해 나눠줬어요. 친구들끼리 모이면 거기 없는 친구를 악의 없이 험담할 때도 있었는데, 저는 기형도 욕하는 친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약점이라면 누구에게나 인정받으려는 완벽주의 성향이 강했다는 것이다. 뭐든지 잘하는 대신 하나라도 처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또 자신의 시에 대해 역사인식이나 현실참여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하면 내상을 크게 입곤 했다고 한다. 

    “형도는 집안 형편은 가난한데 ‘깔끔 떤다’고 할 정도로 옷차림에 신경 썼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반평생을 병석에 누워 지낸 아버지의 수발을 들면서 환자 냄새가 배는 것에 결벽증 같은 게 생긴 듯해요. 또 기자가 된 뒤 데스크가 자신의 기사를 고치는 것을 못 견디다 편집부로 발령이 났죠. 기사 수정이야 언론계에선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일인데 유독 그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던 것 같아요.”

    누이의 비극과 동성애자라는 오해

    소설에는 5월 16일만 되면 이화여대나 숙명여대를 찾아가 말없이 우울한 하루를 보내는 기형도가 등장한다. 그럴 때마다 묵묵히 그 곁을 지켜준 것이 김 작가였다.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기형도의 부탁에 호기심을 눌러 참아오던 그는 기형도가 죽기 한 해 전 비로소 그 이유를 접했다. 

    기형도의 두 살 터울 누나가 여고 2학년 시절 집 앞 논두렁에서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채 발견됐다. 그 누이는 집안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 일시적이긴 하지만 기형도와 함께 고아원 생활까지 같이한 남다른 사이였다. 설상가상으로 2주 뒤 잡힌 범인은 남매가 함께 다니던 교회의 청년 신도였다. 당시 중학교 3학년생으로 사춘기 소년이던 기형도에겐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기형도는 이후 종교를 버렸고, 그 대신 염세적 실존주의 철학자라 할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의 철학에 빠져들었다. 

    “형도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누이를 위해 쓴 시라며 ‘가을 무덤-제망매가’를 보여주더군요. 그 시를 읽는 순간 얼마나 눈물이 쏟아지던지. 제 평생 그렇게 많이 운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형도는 울진 않았지만 눈에 눈물이 가득….” 

    감정이 복받쳐 올라 안경을 벗고 붉게 물든 눈자위를 닦던 그는 당시 기형도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난 그날 이후 정서적으로 죽은 사람이야.’ 기형도 누나의 죽음은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구체적 진상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이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것은 참척(慘慽)의 아픔을 두 번이나 겪은 기형도 어머니의 상처를 덧나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왜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형도가 산 세월이 29년이고 죽은 다음 다시 그만큼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형도 어머니나 두 누나도 이해해주리라 생각했어요. 게다가 제가 인터넷 접속을 잘 안 하는 편인데, 지난해 보니까 기형도를 아예 동성애자로 단정 짓는 글이 넘쳐나더군요. 그 오해만큼은 꼭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김 작가에 따르면 기형도가 동성애자의 둥지로 알려진 파고다극장을 자주 찾은 것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고대 서양철학자들이 동성애에 탐닉했던 이유를 찾아 이를 장편소설로 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형도가 구상한 것은 일종의 철학소설이었는데, 그 자신도 동성애자의 심리나 행태를 모르기 때문에 관련 취재 차원에서 찾아갔다는 설명이다. 

    “제가 ‘폐쇄병동’을 쓰려고 입대한 뒤 일부러 미친 척해 군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형도가 면회를 온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야, 혹시 내가 이 안에서 잘못돼 죽으면 내가 미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꼭 알려다오’라는 말을 여러 번 했고 형도는 그러겠다고 약속했죠. 그런데 정작 형도가 먼저 죽었는데 그 억울함을 제가 안 풀어주면 누가 풀어주겠는가 싶더라고요” 

    기형도가 남녀의 연애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거나 초연한 자세를 견지하려 했던 것 역시 누이를 잃은 상실감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를 만나면 “나는 오래 못 살 거다”라거나 “결혼하면 인형으로만 가득 채운 방을 갖고 싶다” 같은 말을 건넸다고 한다. 특히 뒤의 말은 앳된 나이에 시집도 못 가고 죽은 누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는데 동성애 성향이란 오해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그 순간 기형도 시의 도저한 비극성과 지독한 상실감이 주르륵 이해됐다. ‘쥐불놀이’에서 ‘사랑을 목발질하며/나는 살아왔구나’라는 구절, ‘바람은 그대 쪽으로’에서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沈默(침묵)은 언제나 이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는 구절, ‘빈집’에서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는 구절…. 

    ‘가을 무덤-제망매가’는 ‘입 속의 검은 잎’에 수록되지 못했다. 1994년 발간된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 비로소 수록됐다. 놀랍게도 김현은 이를 접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다. 시집 해설 첫 단락에서 기형도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언급하며 “ ‘제망매가’의 슬픈 어조와는 다른 냉랭한 어조로, 한 시인의 죽음을 알게 해주었다”고 썼다. 물론 여기서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지은 향가를 언급한 것이지만 그가 기형도의 시를 통해 그 무의식적 진실에 접근했음을 보여준다. 기형도의 시를 이해하려면 ‘기형도를 잃고 나는 쓰네’를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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