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20일 신민당 참여를 선언하는 윤보선의 기자회견에 배석한 함석헌(왼쪽)과 장준하(오른쪽).
해방 후 매체의 역사에서 지식인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잡지가 ‘사상계’라는 데는 별 이론이 없다. 2만여 정기구독자와 함께 4·19혁명을 전후한 시기에는 최대 7만여 부까지 발행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사상계를 들고 다녀야 대학생 행세를 하던 풍속’이 생겨나기도 했다.
지난 10여 년간 학계에서는 전후 지성사에서 ‘사상계’가 가지는 중요성을 인식하고 집중적인 연구를 벌여왔다. 이에 따라 ‘사상계’가 전후 지식인의 집적체이며, 단순한 잡지 차원을 넘어 1950~60년대 대한민국의 싱크탱크 노릇을 했음이 드러났다. 단적인 예로 5·16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 자문단체인 기획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해 당시 군정세력들이 ‘사상계’를 펴놓고 필요한 인물들을 망라해 위원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사상계’ 필진들이 당대 지식인 사회를 주도하던 최고 엘리트라는 인식이 당시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상계’가 오늘날 알려진 형태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발행인도 장준하가 아니었고 순수 민간 잡지도 아니었다. 장준하가 만든 것은 문교부(현 교육부) 산하기관의 기관지인 ‘사상(思想)’이었다.
‘사상계’의 전신(前身)인 ‘사상’은, 부산 피난 시절 문교부 산하에 국민사상연구원이 설치된 후 그 기관지 형태로 발간됐다. 6·25전쟁 중인 1952년 4월, 부산 광복동 다방에서 장준하와 서영훈이 만난 자리에서 장준하의 제의로 탄생했다. 장준하와 서영훈, 온전히 두 사람이 잡지를 만들었다. 장준하는 국민사상연구원 일을 총괄해야 했던 까닭에, 서영훈이 원고를 교섭하고 편집하는 일을 맡았다. 서영훈은 당시 장준하에 대해 말한다. “그는 쉴 줄을 몰랐다. 그는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사상’ 창간호 1952년 9월호가 국판 144쪽으로 나왔다. 창간사는 이교승 명의로 서영훈이 썼다. 두 사람은 8개월여 같이 일하면서 월간으로 4개 호를 냈다.
족청에서 만난 장준하와 서영훈
1953년 ‘사상계’ 창간호 표지.
서영훈이 월남 직후 찾아간 곳이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었다. 족청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약 2년이었는데, 족청 중앙훈련소 교무처에서 간부 요원으로 근무하면서 제2대 교무처장으로 온 장준하를 처음 만났다. 서영훈은 장준하와 족청에서 5개월을 같이 근무했다. 문서나 글을 쓸 일이 생기면 주로 서영훈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 시기 장준하의 인상을 서영훈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첫인상은 너무 차가웠다. 술 먹는 자리에서 성경책을 꺼내 술상에 놓는 사람이었다. 냉철하고 자기 일에 철두철미했다.”
시간이 지나 ‘사상’을 만들던 때도 장준하의 성격이 그대로였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철두철미한 일처리가 변치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민사상연구원의 책임자였던 장준하는, ‘사상’이 ‘관제’ 사상지도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발행인과 발행처가 정부가 아닌 민간인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장준하가 쓴 ‘사상’ 창간호 편집후기에는 ‘사상’의 편집 방향이 잘 나타나 있다.
“이 겨레의 활로를 개척함에는 선인들의 경험과 아울러 새롭고 또는 넓고 깊은 세계적인 사고가 요청된다. ‘사상’은 그 편집에 있어서 특히 연구적이며 이념적인 것에 치중하였다.”
이 언급에는 ‘사상’이 지식인 잡지로 기능하기를 바라는 면이 분명히 드러나 있으며, 또 전통보다 ‘세계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이 암시돼 있다. 조선조 이래 서북인의 지역적 특수성과 관련해서 이해될 수도 있는 이 ‘세계주의’ 지향은, 그렇지만 적어도 당시의 한국 상황을 고려한다면 실제로는 ‘미국’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실제 ‘사상’의 발간에 미국공보원(후일 미문화원)이 용지를 무상 공급했다. 배본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사가 맡았다. 미국공보원의 후원은 잡지 ‘사상’이 한국 정부의 기관지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국공보원은 당시 한국의 여러 잡지에 용지를 원조하고 있었고, ‘사상’의 발간이 4개 호만에 중단되고 장준하 단독으로 ‘사상계’를 발간할 때도 6개월 분량의 용지를 무상으로 기증하겠다는 제안을 해 초기 ‘사상계’가 자리를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사상’은 매우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폐간됐다. 서영훈이 고형곤 교수(고건 전 국무총리의 부친)에게 원고를 청탁하려고 전쟁 중 부산으로 옮겨온 이화여대 임시 교사(校舍)에 찾아갔다 ‘문리대 학장이라는 중년여성’과 우연히 대화를 나눈 게 문제가 됐다. 학장은 ‘사상’이 무엇 하는 잡지인지를 캐물었는데, 갓 서른의 서영훈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있을 리 없었기에 묻는 대로 대답한 것이 사달이 났다. 그 여성은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였다. 박마리아는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백낙준 박사가 흥사단과 서북세력을 규합해 자기 세력을 만들려고 잡지를 내고 있다”고 악의적으로 고자질을 했다.
여기서 백낙준이 거론된 데는 설명이 필요하다. ‘사상’ 창간호에는 발행인 이교승의 창간사 외 문교부 장관 백낙준의 축사가 실려 있다. 장준하가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사상’을 처음 발행하던 1952년 9월 백낙준이 문교부 장관이었다. 재임기간은 1950년 4월부터 52년 10월까지로, ‘사상’ 창간 후 두 달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2010년 5월 11일 열린 ‘철기 이범석 장군 38주기 추도식’에서 서영훈이 추도사를 읽고 있다. 평남 덕천 출신인 서영훈은 월남 직후 이범석의 조선민족청년단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다섯 살 위 장준하와 처음 만났다.
백낙준은 오늘날 일반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평북 선천 출신으로 장준하의 선천 신성중 선배였다. 미국 파크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프린스턴신학교, 프린스턴대 대학원을 거쳐 예일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백낙준은 1927년 귀국해 연희전문에 성경 교수로 부임했다. 귀국 직전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귀국 후에는 조선기독교서회와 YMCA에 깊이 관여했다. 1946년 연희전문이 연희대학교로 승격했을 때 초대 총장에 취임했고 이때 신과(神科)대를 설립했다. 서북 출신인 백낙준은 흥사단계 우익 민족주의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장준하가 ‘사상’을 만들던 배후에는 문교부 장관 백낙준이 있었던 것이다.
여러 기록을 고려할 때 백낙준은 장준하를 ‘무척 아낀’ 듯하다. 이듬해 장준하가 ‘순수 민간지’로 ‘사상계’를 시작할 때 많은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휴전 후 서울로 올라온 사상계사에 공간도 지원했다. 사상계사가 들어선 종로 화신빌딩(현 종로타워 자리) 맞은편 한청빌딩은 연세대 재단 소유의 건물이었는데 총장 직권으로 이 건물 4층을 제공했다.
요컨대 흥사단계를 예의주시하던 이기붕과 박마리아가 백낙준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고, 박마리아가 이승만에게 ‘사상’지를 흥사단 계열 사람들이 만드는 잡지라고 못 내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 ‘사상’ 폐간을 가져왔던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서영훈의 역할에 대해서는 조금 더 서술돼야 한다. ‘사상’이 폐간된 후 서영훈은 잠시 대한해운공사에서 근무하다 1953년 3월 대한적십자사(적십자사)에 들어갔다. 이후 거의 평생을 적십자사에서 일했다. 적십자사 청소년국장에 부임한 후 맨 먼저 한 일이 청소년적십자(RCY)를 만든 일이었다. RCY에서 훗날 유엔 사무총장이 된 10대의 반기문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다.
적십자사의 중요성은, 남북한 화해와 통일 논의가 있을 때 항상 ‘매개’로 작용했다는 데서 확연히 나타난다. 분단 이후 초기 남북 당국 간 접근은 으레 ‘남북적십자회담’을 맨 머리에 세우곤 했다. 1971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 제의, 9월 예비회담, 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8월 29일 평양에서 본회담(서영훈도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개최 등은 그 예들이다.
한국 현대지성사의 맥락에서 보면, 서영훈 역시 도산 안창호의 후예로 분류할 수 있다. 서영훈이 흥사단 단우가 된 것은 다소 늦은 1966년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흥사단 핵심이던 주요한의 딸이 적십자사 국제 대표였던 인연이 있었고, 또 이전부터 잘 알던 안병욱의 권유가 있었다. 이런 인연은 후일 서영훈이 흥사단 이사장으로 선출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서영훈의 흥사단 활동은, 1953년 이후 서영훈이 실제 ‘사상계’ 발간과는 무관한 자리에 놓여 있었음에도 여전히 사상계 지식인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주요한이 이사장을 하던 63년 부활한 흥사단 아카데미 운동은 ‘사상계’ 주간 출신 안병욱의 노력으로 활발해지는데, 안병욱 등 과거 ‘사상계’를 매개로 형성됐던 흥사단계 인맥이 자연스럽게 서영훈의 흥사단 활동을 이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2년 9월 12일 제2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서울에서 열리자 중구 소공동에서 북한적십자 대표단을 환영하고 있는 서울 시민들.
흥사단 아카데미 진영은 1970년대 반정부 세력이 됐으나(아카데미 출신자 가운데 이상수, 황우여, 설훈 등 이후 여야를 아울러 정계에 진출하는 이들이 나왔다), 서영훈은 정치 운동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진지하게 흥사단 활동을 이어갔다. 서영훈은 전두환 정권기인 83년 1월 흥사단 이사장이 된 후 동숭동 흥사단 본부의 강당을 개방해 민주화운동 단체의 집회에 제공하기도 했다. 김대중, 문익환, 김근태 등 야권과 재야 인사를 알게 된 것이 이 시기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때 이미 환갑의 나이였다.
기본적으로 서영훈은 여야나 진보, 보수 등 정치 진영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또한 이북 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맹목적 반공의식을 노출하지도 않았다. 남북적십자회담 한국 측 대표로 참가하던 당시, 1970년대라는 엄혹한 시대였음에도 “북한에게 배울 건 배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서영훈이 단 한 번 현실정치에 관여한 일이 있다.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된 일로, 서영훈이 집권당 대표를 맡던 이 시기에 6·15 남북공동선언이 있었다. 그렇지만 서영훈의 짧은 정치활동을 여야의 진영논리로 해석할 수는 없다. 통일은, 이북 출신들에게는 논리 이전에 언제나 마음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무엇이었다.
결과적으로 서영훈은 적십자사를 통해, 또 이후로도 남북 평화통일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한 셈이 됐다. 짧은 정치활동을 마치고 2001년 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했을 때 신문들은 ‘고향에 돌아왔다’고 표현했다. 해방 후 함석헌과 류영모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스스로 밝힌 서영훈은 민족주의자라기보다 세계주의자였고, 진정한 의미의 평화주의자였다.
1967년 2월 14일 신민당 유진오 당수가 백낙준(왼쪽)을 찾아가 신민당 참여를 권고하는 모습. 백낙준은 연세대 전신인 연희대 초대 총장, 제2대 문교부 장관, 참의원 의장 등을 지냈다(왼쪽). 1920년 미국 유학 시절의 백낙준(뒷줄 왼쪽). 평북 선천 출신인 백낙준은 장준하의 신성중 선배로 장준하가 ‘사상’을 만들 때 배후에서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