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네가 몇 해 전 이사하면서 “창고에서 옛 물건을 찾았는데 아무래도 형 것 같다”며 가져왔다. 받아보니 오호라, 슬라이드 환등기와 타자기였다. 요즘은 강의나 발표할 때 노트북컴퓨터에 빔 프로젝터를 연결해 파워포인트 자료를 쏘지만, 옛날에는 슬라이드 환등기로 사진을 보여주거나 투명 비닐에 자료를 복사한 뒤 빛에 비춰 보여주는 오버헤드프로젝터(OHP)를 주로 썼다. 그 시절 물건들을 보자 둥근 트레이에 슬라이드 사진을 빼곡히 꽂은 뒤 찰칵찰칵 넘기던 날들이 아련히 떠올랐다. 사진이 뒤집어지지 않게, 또 좌우가 바뀌지 않게 신경 써서 꽂고, 정렬이 편하도록 트레이에 꽂힌 슬라이드 윗면에 마커로 색을 칠하던 기억도 났다.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
슬라이드 환등기보다 더 반가웠던 건 갈색 덮개에 싸인 클로버 수동 타자기였다. 대학 때인지 대학원 때인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국문, 영문 타자기 두 대를 장만했다. 그것들로 또각또각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요긴하게 썼다. 돌아보면 개인용 컴퓨터가 막 등장하던 때였고, 워드프로세서라고는 보석글 정도가 막 등장할 무렵이었으니 타자기가 문서 작성에 꼭 필요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개인용 컴퓨터가 286에서 386으로 발전하고 보편화하면서 타자기는 점차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런데 20여 년 만에 다시 내게 돌아온 것이다. 덮개를 열어보니 1·4후퇴 때 헤어진 동생을 만난 듯 반가웠다.
줄 바꾸는 레버를 스르륵 밀고 옛날 생각하면서 글을 쳐봤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한 문장을 다 치기도 전에 글쇠들이 엉켰다. 종이를 끼운 뒤 옛 기억을 더듬어가며 다시 한 번 쳐봤다. 바싹 마른 잉크리본이라 희미한 윤곽만 찍혔지만 오랜만에 보는 타자 글씨가 정겹게 느껴졌다. 타자기를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문제는 잉크리본인데 어딜 가야 구할 수 있을까. 시내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여기저기를 훑었다. 세운상가에서도 허탕을 쳤는데, 고생 끝에 잉크리본을 구한 곳이 다름 아닌 을지로 지하상가다.
을지로 지하상가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작된다. 그 아래로 아주 너른 지하공간이 있는데, 지상 위 도로를 따라 이곳 상가도 서소문 쪽과 소공동 쪽으로 각각 뻗어나간다. 지하철역으로 보자면 시청역 앞에서 시작해 을지로입구역과 을지로3가역, 을지로4가역을 지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까지 이어져 있다. 길이가 약 4km에 이른다. 이 중 타자기 잉크리본을 찾은 곳은 을지로입구역 부근의 사무용품 가게 ‘제일전산토탈OA’였다. 들어가 보니 잉크리본뿐 아니라 옛날 잉크젯 프린터의 카트리지와 잉크까지 별의별 사무용품을 다 팔고 있었다.
요즘처럼 무덥고 습한 계절에는 을지로 지하상가를 비롯한 서울 도심 지하상가를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연인 같은 도시 서울과 만나는 특별한 데이트가 될 것 같다. 한 시간쯤 시간을 내면 충분하다. 완주가 힘들면 중간에서 멈추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갔다 나머지 구간은 다음에 걸어도 좋겠다.
시청역 바로 아래 지하상가에서 들를 만한 곳은 맞춤 와이셔츠 가게들이다. ‘핏’이 살고 ‘에지’가 있는 맞춤옷인데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지난해에 와이셔츠 석 장을 맞췄는데 한 장에 4만 원에서 6만 원 선이었다.
와이셔츠 가게 사이에는 유서 깊은 레코드가게 ‘서울음악사’가 있다. 처음 시청 앞 지하상가가 생겼을 때부터 지금까지 45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송인호 사장님한테 옛날이야기를 듣고 좋아하는 음악이 담긴 CD(콤팩트디스크)를 몇 장 사면 산책의 재미가 더해질 것이다. 필자도 며칠 전 들러 스웨덴 그룹 아바(ABBA)와 가수 팻 분의 노래가 담긴 음반을 샀다. 을지로 지하상가에는 레코드 가게가 하나 더 있다. 을지로3가역쯤에 있는 ‘옥타브’인데, 이곳 사장님도 30년 이상 가게를 지켜왔다.
다층적 보행네트워크
을지로3가역 주변에는 이 밖에도 명소가 많다. 각종 사무기기와 전자담배, 모자, 지도와 지구본 등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고, 사이사이 브랜드 의류점도 있다. 을지로4가역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수제 유리공예 공방과 한식, 중식, 일식 식당 및 카페, 제과점, 떡집, 분식집도 만나게 된다. 을지로4가역에는 지하도 벽면 한쪽을 전시공간으로 쓰는 갤러리 ‘을지로 아뜨리愛’가 있고, 이를 지나쳐 동대문 쪽으로 접어들면 스포츠용품과 옷가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캠핑용품 가게부터 각종 단체복을 주문 제작하는 가게까지 줄지어 있다.
이 길을 걸을 때면 곳곳에 재미있는 장소들이 숨어 있으니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시청 가까이에는 계단을 밟으면 피아노 소리가 나는 피아노계단이 있고,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등장하는 트릭아트도 감상할 수 있다. 구름 위로 솟은 남산타워(N서울타워) 꼭대기에 선 것처럼 보이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도 있다. 지하상가 기둥 뒤에서 아름다운 시를 적은 종이뭉치를 담아둔 ‘시의 항아리’를 찾아보는 일도 재미있을 것이다.
땡볕에 땀 흘리지 않아도 되고 비오는 날 우산을 들지 않아도 되는 곳, 천천히 걸으면서 구경하고 쇼핑하고 차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는 곳. 이 지하상가가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을지로를 비롯한 서울 지하상가 상인들은 손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여기저기 빈 가게가 많고, 아직 운영 중인 곳도 물어보면 다들 힘들다고 한다. 손님을 빼앗길까 봐 지하도 위 횡단보도 설치를 극구 반대하는 상인들도 있다. 충북 청주 대현프리몰은 지하도 입구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고 상품을 통로에 내놓지 않는 등 자구 노력을 통해 지하상가를 살리기도 했다.
물론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보행 공간은 길이다. 지상의 길이 살아야 도시가 산다. 그러나 세운상가의 입체보도, 그리고 을지로를 비롯한 지하상가와 지하보도들은 지표면의 보행네트워크를 보완하는 또 다른 보행 공간이 될 수 있다. 을지로 지하상가를 걸으며 서울의 다층적 보행네트워크를 체감해보면 어떨까.
없는 것 빼고 다 있어요
슬라이드 환등기보다 더 반가웠던 건 갈색 덮개에 싸인 클로버 수동 타자기였다. 대학 때인지 대학원 때인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국문, 영문 타자기 두 대를 장만했다. 그것들로 또각또각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요긴하게 썼다. 돌아보면 개인용 컴퓨터가 막 등장하던 때였고, 워드프로세서라고는 보석글 정도가 막 등장할 무렵이었으니 타자기가 문서 작성에 꼭 필요하던 시절이다. 그러나 개인용 컴퓨터가 286에서 386으로 발전하고 보편화하면서 타자기는 점차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런데 20여 년 만에 다시 내게 돌아온 것이다. 덮개를 열어보니 1·4후퇴 때 헤어진 동생을 만난 듯 반가웠다.
줄 바꾸는 레버를 스르륵 밀고 옛날 생각하면서 글을 쳐봤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한 문장을 다 치기도 전에 글쇠들이 엉켰다. 종이를 끼운 뒤 옛 기억을 더듬어가며 다시 한 번 쳐봤다. 바싹 마른 잉크리본이라 희미한 윤곽만 찍혔지만 오랜만에 보는 타자 글씨가 정겹게 느껴졌다. 타자기를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문제는 잉크리본인데 어딜 가야 구할 수 있을까. 시내에 나갈 일이 있을 때마다 여기저기를 훑었다. 세운상가에서도 허탕을 쳤는데, 고생 끝에 잉크리본을 구한 곳이 다름 아닌 을지로 지하상가다.
을지로 지하상가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시작된다. 그 아래로 아주 너른 지하공간이 있는데, 지상 위 도로를 따라 이곳 상가도 서소문 쪽과 소공동 쪽으로 각각 뻗어나간다. 지하철역으로 보자면 시청역 앞에서 시작해 을지로입구역과 을지로3가역, 을지로4가역을 지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까지 이어져 있다. 길이가 약 4km에 이른다. 이 중 타자기 잉크리본을 찾은 곳은 을지로입구역 부근의 사무용품 가게 ‘제일전산토탈OA’였다. 들어가 보니 잉크리본뿐 아니라 옛날 잉크젯 프린터의 카트리지와 잉크까지 별의별 사무용품을 다 팔고 있었다.
요즘처럼 무덥고 습한 계절에는 을지로 지하상가를 비롯한 서울 도심 지하상가를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연인 같은 도시 서울과 만나는 특별한 데이트가 될 것 같다. 한 시간쯤 시간을 내면 충분하다. 완주가 힘들면 중간에서 멈추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갔다 나머지 구간은 다음에 걸어도 좋겠다.
시청역 바로 아래 지하상가에서 들를 만한 곳은 맞춤 와이셔츠 가게들이다. ‘핏’이 살고 ‘에지’가 있는 맞춤옷인데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지난해에 와이셔츠 석 장을 맞췄는데 한 장에 4만 원에서 6만 원 선이었다.
와이셔츠 가게 사이에는 유서 깊은 레코드가게 ‘서울음악사’가 있다. 처음 시청 앞 지하상가가 생겼을 때부터 지금까지 45년간 한자리를 지켜온 송인호 사장님한테 옛날이야기를 듣고 좋아하는 음악이 담긴 CD(콤팩트디스크)를 몇 장 사면 산책의 재미가 더해질 것이다. 필자도 며칠 전 들러 스웨덴 그룹 아바(ABBA)와 가수 팻 분의 노래가 담긴 음반을 샀다. 을지로 지하상가에는 레코드 가게가 하나 더 있다. 을지로3가역쯤에 있는 ‘옥타브’인데, 이곳 사장님도 30년 이상 가게를 지켜왔다.
다층적 보행네트워크
을지로3가역 주변에는 이 밖에도 명소가 많다. 각종 사무기기와 전자담배, 모자, 지도와 지구본 등을 파는 가게들이 모여 있고, 사이사이 브랜드 의류점도 있다. 을지로4가역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수제 유리공예 공방과 한식, 중식, 일식 식당 및 카페, 제과점, 떡집, 분식집도 만나게 된다. 을지로4가역에는 지하도 벽면 한쪽을 전시공간으로 쓰는 갤러리 ‘을지로 아뜨리愛’가 있고, 이를 지나쳐 동대문 쪽으로 접어들면 스포츠용품과 옷가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캠핑용품 가게부터 각종 단체복을 주문 제작하는 가게까지 줄지어 있다.
이 길을 걸을 때면 곳곳에 재미있는 장소들이 숨어 있으니 눈을 크게 떠야 한다. 시청 가까이에는 계단을 밟으면 피아노 소리가 나는 피아노계단이 있고,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등장하는 트릭아트도 감상할 수 있다. 구름 위로 솟은 남산타워(N서울타워) 꼭대기에 선 것처럼 보이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도 있다. 지하상가 기둥 뒤에서 아름다운 시를 적은 종이뭉치를 담아둔 ‘시의 항아리’를 찾아보는 일도 재미있을 것이다.
땡볕에 땀 흘리지 않아도 되고 비오는 날 우산을 들지 않아도 되는 곳, 천천히 걸으면서 구경하고 쇼핑하고 차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는 곳. 이 지하상가가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을지로를 비롯한 서울 지하상가 상인들은 손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여기저기 빈 가게가 많고, 아직 운영 중인 곳도 물어보면 다들 힘들다고 한다. 손님을 빼앗길까 봐 지하도 위 횡단보도 설치를 극구 반대하는 상인들도 있다. 충북 청주 대현프리몰은 지하도 입구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고 상품을 통로에 내놓지 않는 등 자구 노력을 통해 지하상가를 살리기도 했다.
물론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보행 공간은 길이다. 지상의 길이 살아야 도시가 산다. 그러나 세운상가의 입체보도, 그리고 을지로를 비롯한 지하상가와 지하보도들은 지표면의 보행네트워크를 보완하는 또 다른 보행 공간이 될 수 있다. 을지로 지하상가를 걸으며 서울의 다층적 보행네트워크를 체감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