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진주회관’의 콩국수.
콩국수에 관한 조리법은 19세기 말 쓰인 조리서 ‘시의전서(是議全書)’에 나온다. ‘콩을 물에 불린 후 살짝 데치고 갈아서 소금으로 간을 한 후에 밀국수를 말아 깻국처럼 고명을 얹어 먹는다’는 구절이다. ‘콩국수’란 단어가 직접 언급된 책은 방신영이 쓴 ‘조선요리제법’(1923년 판)이다. 이후에도 콩국수란 말보다 콩국이란 말이 더 많이 쓰였다. 콩국에 대한 기록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1236년 편찬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대두즙(大豆汁)을 끓여’라는 구절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콩국을 얘기할 때 조선 중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백과사전인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쓴 것으로 유명한 이익은 18세기 귀농(歸農)의 선구자였다. 인생 후반부를 경기 안산(성호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보냈다. 1735년 그는 삼두회(三豆會)라는 모임을 결성한다. 그가 농사지은 콩으로 콩죽과 콩나물, 된장을 만들어 그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즐기는 모임이었다. 그에게 콩은 서민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천금 같은 식재료였다. 책에 ‘천하다. 하지만 굶주림을 구제하는 데는 콩만한 게 없다. 서리가 내려 콩이 죽지 않으면 행지(幸之·다행스러운 일)’라고 쓸 정도였다. 조선 농민들은 실제 콩국에 밀국수를 말아 먹으며 더운 여름을 이기고 살아왔다.
중구 태평동 삼성본관건물 뒤에는 서울 콩국수를 말할 때 첫손으로 꼽는 ‘진주회관’이 있다. 강원도 황태(黃太)를 진하게 갈아 넣은 콩국은 죽에 더 가깝다. 황태의 노란색이 콩국에 그대로 녹아 있어 황금색을 띤다. 밀가루와 콩가루, 감자가루를 섞은 면발도 쫀득하면서 고소한 맛이 난다. 국물과 면발이 진하고 진득하지만 간이 잘 맞고 시원해 개운함을 느낄 수 있다. 음식 맛에 빠져 한 그릇 먹다 보면 더위가 저만큼 달아나 있다. 여의도에 있는 ‘진주회관’도 같은 맛을 낸다. 같은 집안사람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서울 태릉입구역 ‘제일콩집’의 콩국수.
사시사철 먹을 수 있는 냉면과 달리 콩국수는 여름에만 파는 집이 많다. 여름은 그래서 이래저래 콩국수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