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의 대학살 추모공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편에 섰던 오스만 제국은 연합국 일원인 러시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독립을 갈망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등 러시아에 적극 협력하자, 1639년부터 아르메니아를 점령해온 오스만 제국은 분노했다. 제국 군대는 1915년 4월 24일 아르메니아 지도자와 지식인 등 325명을 전격 연행해 처형하고, 18세부터 50세까지 아르메니아 남성을 강제로 징집했다. 이들은 대부분 집단 사살되거나 질병, 추위, 기아 등으로 숨졌다.
오스만 제국은 또 아르메니아 부녀자와 노약자 100만여 명을 현재의 시리아 사막으로 추방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미국 미네소타대 연구조사에 따르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만 제국 영토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은 213만여 명에 달했지만, 22년에는 48만여 명만 남은 것으로 집계됐다.
비판 나선 프란치스코 교황
아르메니아는 서쪽으로 터키, 동쪽으로 아제르바이잔, 북쪽으로 조지아, 남쪽으로 이란과 각각 국경을 접한 내륙 국가다. 아르메니아는 고대부터 왕국을 세우고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유지했다. 301년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국가로 역사에 남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 대륙 중간에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 지역은 그동안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몽골, 오스만 제국, 러시아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1991년 옛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르메니아는 줄기차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건을 ‘집단학살(genocide)’로 규정하고 터키 측에 사과와 보상을 요구해왔다. 반면 터키는 전시에 발생한 불가피한 사건이며 사망자도 3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반박해왔다. 집단학살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당시 사건에 대해 사과하거나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게 터키 측 주장. 터키 교과서는 아르메니아인을 ‘배신자’로 표현하고, 심지어 대학살은 ‘거짓’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특히 사건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터키 정부는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유엔총회가 1948년 채택한 집단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 제2조에 따르면, 집단 학살은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저지른 모든 행위’를 말한다. 터키 측은 집단학살을 인정할 경우 국제적으로 불명예와 치욕을 당할 뿐 아니라 아르메니아 희생자 유족들에게 엄청난 보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을 우려해왔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 정치의 복잡한 함수관계로 아직까지도 제대로 정의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바티칸 교황청과 터키 정부는 당시 사건을 규정하는 문제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월 12일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대학살 100주기 추모 미사에서 “지난 세기 인류는 세 차례에 걸쳐 거대하고 전례 없는 비극을 겪었다”면서 “아르메니아인이 20세기 첫 제노사이드의 희생자라는 비극을 기억하는 것은 의무”라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악을 숨기거나 부인하는 것은 상처에 붕대를 감지 않아 출혈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며 터키를 비판했다.
이에 대해 터키 정부는 바티칸 주재 자국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는 등 강력히 반발했다.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터키 총리는 “교황이 터키를 음해하는 악의 전선에 합류했다”며 거친 표현을 사용해 비난했다. 다만 다부토글루 총리는 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 100주기를 맞아 “우리는 1915년 추방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오스만 아르메니아인 후손들의 아픔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공유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물론 이 성명에는 집단학살이나 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다는 표현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오바마의 ‘변심’
유럽 국가 중에서도 당시 사건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국가는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스, 폴란드 등 23개국뿐이다. 반면 유럽의회는 4월 15일 당시 사건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도 2007년과 2010년 터키가 집단학살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반면 2008년 대통령선거 캠페인 당시 집단학살이라는 말을 썼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후 태도를 누그러뜨려 ‘참혹한 사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이자 이슬람권에서 만만찮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터키를 ‘배려’해 집단학살이란 용어의 사용을 기피해왔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잔혹행위(atrocity)’라고 표현했다. 스테판 두자릭 유엔 대변인은 “반 총장은 1915년 일어난 일을 정의하는 게 민감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 역시 터키가 6·25전쟁 참전국이란 점을 감안해 집단학살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 덕에 한국은 2007년 터키 정부가 진행한 전차 입찰경쟁 당시 집단학살을 인정한 프랑스 대신 협상대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는 올해 대학살 100주기를 맞아 당시 사건을 집단학살로 인정받기 위해 외교력을 총동원해왔지만, 국력이 월등한 터키의 방해로 국제 사회의 전폭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터키 정부는 100주기 추모일에 맞춰 ‘겔리볼루 전투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하는 등 맞불까지 놨다. 겔리볼루 전투는 1915년 4월 25일부터 16년 1월 9일까지 터키 겔리볼루 반도에서 벌어진 오스만 제국 군대와 영국·호주·뉴질랜드 연합군 간 전투를 말한다. 당시 양측에서 모두 50만여 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아직까지도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아르메니아와 터키의 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 갈등으로 확대될 조짐까지 보인다. 참혹한 반인륜적 사건이 벌어진 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역사적 진실’은 국제 정치의 냉혹한 현실 속에 여전히 파묻혀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