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 해안선 일주도로를 달리다 보면 곳곳에서 이런 풍경을 만나게 된다.
얼마 전 1월 12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무대에서 열린 파이브 나이트 콘서트(Five Nights Concert)에서 단연 주목받은 가수도 아이슬란드 뮤지션이다. 아우스게이르(23). 그는 초대형 콘서트의 피날레를 장식할 만큼 먼 나라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음악은 인류 보편의 언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은 이 경우 딱 떨어진다. 아우스게이르, 시귀르 로스의 음악을 들으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광활한 대지와 초록이 빛나는 들판, 깎아지른 듯한 빙하 절벽 등 아이슬란드만의 풍경이 멜로디를 타고 되살아난다. 그래서 아이슬란드 뮤지션의 음악은 아이슬란드 풍광을 고스란히 닮았다고 비평가들은 전한다.
아이슬란드의 랜드마크 격인 하르파 콘서트홀 내부 모습 으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고토 미도리의 연주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눈에 띈다(왼쪽). 수도 레이캬비크 도심에 있는 호수 풍경으로, 군데군데 얼음이 녹아 백조들이 바쁘다.
아이슬란드, 참으로 먼 나라다. 나라 이름부터 얼음 땅, 아이슬란드가 아닌가. 외딴섬, 꿈틀거리는 화산, 가까이는 J.R.R. 톨킨이 ‘반지의 제왕’ 집필에 결정적인 영감을 얻었다. 영화 ‘인터스텔라’ ‘노아’ ‘프로메테우스’ ‘토르:다크 월드’ ‘오블리비언’ ‘툼 레이더’ ‘스타트렉 다크니스’를 비롯해 미국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도 아이슬란드에서 촬영했다. 더 흥미로운 건 영화‘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아프가니스탄, 그린란드, 히말라야로 나오는 배경이 실제로는 전부 아이슬란드에서 촬영됐다는 사실이다. 이뿐 아니다. 아득히 멀리 ‘15소년 표류기’로 유명한 쥘 베른의 소설‘지구 속 여행’의 무대이고, 이 소설을 토대로 한 할리우드 영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2008)도 이곳에서 촬영됐다.
아이슬란드에 다녀왔다. 남들이야 “한겨울에 그 추운 빙하의 나라를 가다니” 하며 뜨악한 표정이었지만 내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아이슬란드는 아직까지 한국에서 가장 가기 힘든 나라 중 하나다. 실제로 직항편이 없어 홍콩, 싱가포르 등을 거쳐야 하는 등 접근성이 아주 떨어진다.
10대의 어느 날 시골 할머니 집 대청마루 에 배 깔고 엎드려 쥘 베른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엉뚱하고도 굳센 다짐을 했다. 언젠가 꼭 한 번 얼음의 땅, 아이슬란드를 가보리라.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드디어 지키게 된 것이다. 슬프게도 10대에 다짐한 맹세를 중년이 돼 지키게 됐다.
열흘간의 아이슬란드 여행은 그 풍경만큼이나 쓸쓸했다. 사실 아이슬란드의 풍경은 지구의 태초뿐 아니라 어쩌면 최후의 모습과 닮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래서 인류가 멸망한 후 먼 미래 혹은 우주 먼지로 소멸할 지구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려면 아이슬란드를 가보면 된다는 말까지 심심찮게 나온다. 그런 까닭에 전 세계 SF영화 제작자들이 아이슬란드로 몰려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먼 나라, 아이슬란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빙하와 혹독한 추위다. 하지만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리다. 빙하가 지천에 널려 있지만 지열 덕에 생각만큼 춥지는 않다. 해양성 기후로 1월 기온이 섭씨 0도를 오르내린다. 그래서 한겨울에도 녹색 빛깔의 초원이 펼쳐져 있다. 오히려 이웃한 그린란드가 그린 존이 전혀 없는 얼음 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섬은 이름과 자연이 정반대다. 19세기 덴마크가 이 두 곳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아이슬란드보다 그린란드에 더 많은 사람을 이주시키고자 펼친 속임수 정책 때문이다.
아이슬란드가 자랑하는 노천 온천 블루 라군은 유황 온천으로, 온천욕을 즐기며 맥주나 소다수를 마실 수 있다(왼쪽). 시도 때도 없이 솟구쳐 오르는 간헐천은 섭씨 100도가 넘는다.
서울에서는 쉽게 가기 힘든 땅, 일본 도쿄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스칸디나비아항공을 타고 12시간을 날아가면 덴마크 코펜하겐이다. 이곳에서 다시 3시간을 더 날아 수도 레이캬비크 외곽의 켈라비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감춰져 있던 아이슬란드의 실체가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기괴한 땅, 뜨거운 용암이 이글거리고, 간헐천이 제 맘대로 솟구쳐 오르며,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상상 속 풍경이 생생하게 눈앞으로 다가왔다. 듣던 대로 겨울에는 해가 노루꼬리만큼 짧다.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미드나이트 선셋’의 여름과 달리 아침 10시쯤 시야가 밝아오고 오후 4시면 캄캄해진다. 죽도록 심심한 캄캄한 밤 뒤에 게으른 아침이 찾아오고 유황 내음 풍기는 화산재가 섞인 바람이 문득문득 불어온다.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날 씨, 녹아내리는 빙하… 레이캬비크의 겨울 풍경은 암울하다.
그래서 영화 ‘노아’제작자 스콧 프랭클린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연습게임으로 창조한 땅이 아이슬란드”라고 이 검은 땅덩어리를 정의했고, 디스커버리 여행 가이드북은 아이슬란드를 가리켜 “극한 고독과 외로움의 대명사”라고 서술해놓았다. 억세게 적응력이 좋은 풀들은 있지만 나무는 자라지 못하는 땅, 용암이 연출해낸 검은 모래, 검은 땅, 초록 이끼가 가끔 등장하는 드넓은 녹색 초원 등은 지금까지 봐온 세상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자연이 연출하는 풍경이 너무 위압적이어서 인간의 능력 따위는 이곳에선 아예 잊어버려야 할 것 같다.
인구 32만 명, 서울 구로구 크기에 불과하다. 100% 비무장 국가, 아예 군대도 없다. 아이슬란드가 세계인에게 각인된 데는 화산이 단단히 한몫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최근 아이슬란드 최대 화산인 바우르다르붕가 산이 조만간 폭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2010년 화산 폭발로 화산재가 20km 상공까지 치솟으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유럽 등 서방국가들이 긴장하는 대목이다. 당시 아이슬란드 정부는 열흘간 영공을 폐쇄해야 했으며 관광객이 끊기는 등 아이슬란드에게는 재앙과 같은 해였다. 같은 해 아이슬란드 산악지역에서 200년 만에 두 번에 걸친 화산 폭발이 있었다. 화산재가 270km까지 날아갔으며 도로와 공항이 폐쇄됐다. 전 유럽은 화산재 공포에 떨어야 했고 당시 집에서 TV를 보던 나도 무척 놀랐다.
두 번째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 아이슬란드 정부는 국가 재정이 파산 상태라고 기습 발표해 아이슬란드 국민을 절망에 빠뜨렸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재기에 성공해 다시 5만 달러에 가까운 풍요를 자랑하고 있다. 남한 크기이지만 경작지 면적은 국토의 7%에 불과하다. 수도 레이캬비크의 거리에는 가로수가 아예 없다. 북위 64도 겨울은 아침 9시에도 해가 뜨지 않는다. 추위와 일조량 부족으로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나무를 찾아보기 힘든 땅, 그래도 사람들은 정을 붙이고 살고 있다. 걸핏하면 땅이 꿈틀거린다. 국토 대부분이 거대한 화산재로 덮여 있거나 바람에 누운 잡초들이 겨우 자라는 황무지다. 불과 얼음의 땅이라는 별명도 거기서 연유한다. 국토를 가로지르는 도로도 없다. 해안 쪽으로 링 로드(ring road)라 부르는 일주도로가 있고 주민도 대부분 도로 주변에 살고 있다.
사람 살기가 쉽지 않은 땅,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탐험가와 관광객에게 환영받고 있다. 현지탐방은 ‘골든 투어’ 코스가 단연 인기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지인 싱그베들리르 국립공원부터 귀들포스 빙하폭포, 간헐천인 게이시르까지 한데 묶어 보여준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 사이 탐방로가 있다. 가는 방향으로 보면 왼쪽은 북미대륙이고 오른쪽은 유라시아대륙 지각판이다. 탐방로를 걷다 보면 마치 지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쥘 베른의 ‘지구 속 여행’에서 지하세계 진입을 묘사하는 부분과 고스란히 일치한다.
이처럼 나와 같은 기성세대에게는 쥘 베른의 모험 소설이 한몫했겠지만 아이슬란드가 젊은 층 사이에서 여행지로 각광받는 데는 가수 비외르크나 시귀르 로스의 영향이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배낭여행으로 아이슬란드를 찾는 젊은 층 대부분은 시귀르 로스와 비외르크를 안다. 이곳 한국인은 유학 중 만난 아이슬란드 남성과 결혼해 눌러앉은 단 한 명뿐이다. 당연히 한국식품점은 물론이고 어딜 가도 있다는 중국식품점도 없다. 맥도날드도, 스타벅스도, 세븐일레븐도 없다.
여행자들의 ‘아이슬란드앓이’
아이슬란드 사람은 모두 뮤지션이라고 한다. 워낙 음악을 좋아해 나온 말이다. 그래서 가수 이효리, 이상순 부부도 아이슬란드 음악이 좋아 허니문 여행지로 이곳을 택했다고 한다. 레이캬비크에는 마니아 사이에 알려진 특별한 음반가게가 있다. 이름은 ‘12 To′nar’. 눈과 얼음으로 덮인 설산이 내려다보이는 할그림스키르캬 거리에 있다. 간판이 무척 예뻐 재빨리 인증샷을 찍었다. 이효리, 이상순 부부도 이 가게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그래서인지 국내에도 근래 들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손님이 있어 문자 위에 삐친 점까지 신기해 보이는 아이슬란드어로 쓰인 가게 이름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지 못했다.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는 천둥소리, 즉 우레라는 뜻이니 아마도 비슷하지 않을까.
재즈와 클래식, 그리고 아이슬란드 전통음악 음반과 티셔츠 등을 파는 가게 안에는 아늑한 패브릭 소파가 놓여 있다. 누구나 CD를 집어 탁자 위 플레이어에 넣고 들을 수 있다. 짙은 버건디색 벨벳으로 만든 소파에 앉아 나는 잠시 바흐의 파르티타를 들었다. 아르투르 그뤼미오의 파르티타는 언제 들어도 좋은, 나의 절친 음악이다. 이곳의 국민가수쯤으로 대접받는 시귀르 로스 음반도 눈에 띈다.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북구 미인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에스프레스 한 잔을 건넨다. 차가운 날씨에 전해진 따뜻한 커피 한 잔 때문일까. 문득 간사하게도 누군가 레이캬비크에 간다면 ‘12 To′nar’에 들러보라고 권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아늑한 벨벳 소파에 앉아 북구 미인이 건네는 에스프레소를 음미하며 시귀르 로스를 듣어보길 권하고 싶다. 그러나 CD 구매는 안 된다. 이곳 물가는 경기가 들 만큼 비싸다.
아이슬란드를 다녀오면 누구나 마음의 병을 앓게 된다고 한다. 아이슬란드 음악을 들으며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또다시 아이슬란드 여행을 꿈꿔야 하는 마음의 병 말이다. 불같이 차가운 나라 아이슬란드는 여행객을 자신만의 얼음 속에 꽁꽁 얼려두는 전설 속 마녀와 다름이 없다. 열흘간의 아이슬란드 여행은 빙하로 시작해 빙하로 끝났다. 떠오르지 않는 태양을 기다리는 긴긴 겨울밤, 객실 창으로 본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터질 듯 걸려 있었고, 나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올드 팝을 숨죽여 들으며 술을 마셨다. 그런 아이슬란드 밤하늘에 걸린 둥근달 속엔 쥘 베른의 소설 ‘지구 속 여행’을 읽던 어린 내가 있다.
기괴한 모습의 절벽들은 쥘 베른의 소설 ‘지구 속 여행’의 배경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