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열’의 주인공은 식민지 시절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한 독립투사다. 10대 때 독립운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박열(이제훈 분)은 인력거꾼 등 당대 조선인이 겪었던 사회 최하층의 고생을 고스란히 경험하며 항일투쟁을 준비한다. 그는 아나키스트답게 군국주의 중심에 있는 일왕(천황) 제거를 목표로 삼았다. 중국 상하이에서 폭탄을 반입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관동대지진(1923년)이 일어났고, 계획만 세웠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는데 조선인 폭동을 주동한 인물로 체포된다. ‘조선인’ ‘아나키스트’라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정치적 음모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박열’은 군국주의 일본 정부가 관동대지진으로 술렁이는 민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조선인을 희생시키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지진의 혼란을 틈타 일본인에게 복수하려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여론전을 벌였다.
이때 체포된 아나키스트 박열은 곧 풀려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큰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호방하고 기개 넘치는 그는 일본의 음모에 정면으로 맞선다. 어차피 ‘대역죄’라는 죄목으로 ‘죽음의 재판’을 받을 처지라면, 그 과정을 독립운동의 광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박열’의 중심부는 이 재판 과정이다. 짐작하겠지만 젊은 청년의 용기는 거침이 없다. 재판은 박열의 정치적 연설장이 된다. 그는 천황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는 일본 권력층 앞에서, 그 천황은 악마라고 공격한다.
‘영웅’ 박열에 비해 군국주의 일본의 정치가,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은 고양이 앞 쥐처럼 좀스럽기 짝이 없다. 이렇듯 ‘박열’은 잊고 지낸 영웅적 독립투사의 진면목을 재발견한 미덕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표현 방식이 과도한 영웅 찬양이라 자꾸만 송구하고 겸연쩍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영웅을 계속 영웅이라고 칭송하면, 그건 오히려 논리비약 아닐까.
영화에서 묘사한 대로 박열은 ‘대역죄’에 해당하는 결정적 행동을 하기보다 항일 관련 계획만 세우다 음해 대상이 됐다. 만약 다른 나라 관객이 이 영화를 본다면 ‘조선인’ 청년 박열은 호방한 인물로 일방적으로 묘사되고, 그의 상대편(antagonist)인 ‘일본인’ 내무대신은 소리만 질러대는 비열한 인간으로 그려진 것을 수긍할 수 있을까. 논리는 실재보다 허구에서 더 요구되는데, 잘 짜인 허구에서 영웅은 보통 그에 걸맞은 경쟁자를 갖지 않는가.
이 영화에서 박열과 비교될 만한 다른 인물은 그의 아나키스트 동지이자 연인인 일본 여성 후미코(최희서 분)가 유일하다. 박열보다 여성인 후미코가 아나키스트가 되는 과정에서 더 큰 편견을 이겨냈을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가 그의 삶 속에 녹아 있을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 영웅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관객은 종종 눈치가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