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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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후손들 진짜 뿔난 이유 보니…

‘명량해전’ 참전 안 했는데 영화 ‘명량’서 절대악으로 묘사해 ‘발끈’

  •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입력2014-09-22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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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설 후손들 진짜 뿔난 이유 보니…

    배설 장군의 후손인 경주 배씨 대종회원들이 9월 15일 경북 성주경찰서에 고발장을 접수하고 있다.

    ‘1700만 관객’이라는 한국 영화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영화 ‘명량’의 열기가 여전히 뜨겁다. 이번에는 좀 엉뚱한 방향으로.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을 배신하고 거북선에 불을 지르는 등 부정적 인물로 묘사된 배설(裵楔·1551∼1599) 장군의 후손들이 영화 관계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김한민 감독 등 3명 고소

    경주 배씨 문중이 연합해 발족한 소설·영화 ‘명량’ 관련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는 9월 15일 경북 성주경찰서에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명량’ 제작자 겸 감독 김한민, 각본가 전철홍, 소설가 김호경 씨를 고소했다. 비대위가 이들을 고소한 건 영화와 소설 ‘명량’이 배설 장군을 제대로 고증하지 않고 악인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비대위는 보도자료에서 “소설 작가와 영화제작사 측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기대했으나, 무책임한 변명을 하며 사자 명예훼손과 자손에 대한 인격권 침해가 중단될 수 있는 조처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면서 “우리는 어떠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소설과 영화를 통해 훼손한 선조 배설 장군의 명예를 회복하기만을 원한다. ‘작가의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조상의 명예를 짓밟는 행위는 없어야 한다”고 고소장 접수 이유를 밝혔다.

    영화 속에서 배설 장군은 왜군을 제외하면 유일한 ‘절대악’으로 묘사됐다. 칠천량해전에서는 도망갈 생각으로 의도적으로 전투에 참전하지 않은 것처럼 그려졌고, 왜군과 내통하며 이순신 장군 암살을 시도했다. 거북선을 불태우고 혼자 도망치다 아군인 안위가 쏜 화살에 맞아 사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속 배설 장군의 행동은 상당 부분 사실이 아니다. 사료에 따르면 그는 애초 명량해전에 참전하지도 않았다. 비대위가 접수한 고소장에는 소설 ‘명량’의 역사 왜곡 항목도 있다. 소설에서는 왜군이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불탔다는 말에 “우리가 매수한 배설이 벌인 일인가”라고 되묻는 부분이 나오는데, 당시 거북선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역시 성립할 수 없는 장면이다.

    배씨는 10개 안팎의 관향이 있으나 모두 뿌리가 같은 동계혈족이다. 배설 장군은 경주 배씨 성산파다. 배설 장군이 13대 할아버지라는 배한동 비대위원장은 “‘명량’을 보고 온 친척이 영화에 문제가 있다며 꼭 보라고 연락해왔다. 영화를 봤을 때는 이미 1000만 관객을 넘어선 시점이었다”고 말했다.

    “사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내용을, 그것도 실존 인물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한 건 잘못된 일입니다. 역사물에서도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존중해야 하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관객이 알고 본다고 해도 일반 작품보다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배설 장군을 영화에서는 비겁자, 소설에서는 심지어 왜놈 첩자로까지 묘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의도성은 없다 해도 이순신 장군을 영웅화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을 완전히 죽인 겁니다. 이 일로 후손들이 스트레스와 정신적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배영진 경주 배씨 대종회장은 “영화를 보고 무척 분개했다. 제작사가 이 사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화 개봉 전 시사회에서라도 작품을 봤으면 왜곡된 부분을 삭제하거나 상영되지 않도록 조치했을 텐데, 사전에 막지 못한 게 안타깝습니다. 이제 영화 상영중지 가처분 신청을 한다 해도 1700만 관객이 든 작품이고, 볼 사람은 다 봤으니까요. 극 전개를 위한 악인이 필요했다면 다른 이름을 쓰거나 영화 마지막에 ‘배설 장군이 참수됐지만 이후 공로를 인정받아 복직됐다’는 자막이라도 있었으면 오해가 덜했겠죠. 작품이 흥행해 후속편이 나올 거라는 이야기도 있던데, 또다시 배설 장군을 왜곡해 욕보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명량’ 제작사인 ㈜빅스톤픽쳐스(대표 김한민) 관계자는 9월 1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기사로만 상황을 접했고 후손들과 직접 접촉한 적은 없다. 그분들이 국민권익위원회 쪽에 민원신청을 해 그에 대한 의견을 내라고 연락받은 상태다. 섣불리 대응하면 오히려 문제가 커질 것 같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오늘 오후 이 사안에 대한 회의를 했고, 이번 주 내 입장을 정리해 공식 채널로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설 후손들 진짜 뿔난 이유 보니…
    전후 권율에 붙잡혀 참형당해

    배설 후손들 진짜 뿔난 이유 보니…

    배설 장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난중일기’와 ‘선조실록’.

    그렇다면 실제 배설 장군은 어떤 인물인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583년(선조 16) 별시무과에 급제한 그는 임진왜란에 참전했고, 1597년 7월 15일 원균이 여러 장수를 소집해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으나 전세가 불리함을 짐작하고 비밀리에 퇴각할 것을 모의했다. 한산도로 물러난 그는 군사 시설 및 양곡·군기와 군용 자재를 불태우고 남아 있던 백성을 피난시켰다. 이후 이순신의 지휘를 받았으나, 그해 신병을 치료하겠다고 허가받은 뒤 도망쳤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는 그의 부정적 면모가 도드라지는데, 후손들은 이에 대해 “이순신과 배설이 적대관계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난중일기’ 1597년 7월 21일자(음력)에서는 노량에 이르니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라는 대목이 나오고, 7월 22일자에는 “아침에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8월 12일자에는 “거제현령(안위), 발포만호(소계남) 편에 경상수사 배설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고 적었고, 8월 19일자에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고 적었다. 8월 27일자에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왔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갔던 것이 아니오’라고 하였다”고 적었고, 8월 30일자에는 “배설이 제 종을 시켜 소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를 하겠다고 하였다. 몸조리를 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이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9월 2일자에는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갔다”고 적혀 있다. 명량해전이 발발한 건 그로부터 2주 뒤인 9월 16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무신으로서의 실력을 엿볼 만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선조실록’ 1594년(갑오년) 54권(8월 10일자)에서 인사 문제를 논하던 선조가 “부하 중에 발탁할 만한 자는 없는가”라고 묻자 유성룡이 곽재우와 배설을 추천하고, 1595년(을미년) 60권(2월 6일자)에서는 선조가 “배설이 용맹이 있는 장수라고 하나 수질(水疾)이 있으면 주사(舟師)에 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1596년(병신년) 72권(2월 16일자)에서는 이조판서 김우옹이 “만약 별도로 대장을 두어 융무(戎務)를 총괄하게 한다면 곽재우·박진·배설 같은 사람이 적임자일 것”이라고 말한다.

    배설 후손들 진짜 뿔난 이유 보니…

    영화 ‘명량’(사진)에서와 달리 실제 기록에 따르면 배설 장군은 명량해전을 앞두고 병세 악화를 이유로 배에서 내렸다.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평가가 달라진다. ‘선조수정실록’ 1597년(정유년) 31권(7월 1일자)에는 “적이 수군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통제사 원균이 패하여 죽고 경상우수사 배설은 도망해 죽음을 면하였다. (중략) 배설이 먼저 도망하자 아군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부분이 나온다. ‘선조실록’ 90권(7월 22일자)에는 한산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온 선전관 김식에게 선조가 “배설도 ‘비록 군법에 의하여 나 홀로 죽음을 당할지언정 군졸들을 어떻게 사지에 들여보내겠는가’라고 했다 한다”는 부분이 있다. 93권(10월 11일자)에서는 비변사가 “배설이 주장(우두머리가 되는 장수)을 구원하지 않고 도망쳤으며 이제 또 주장의 명령을 어기고 어둠을 틈타 도망쳤으니, 정상이 지극히 미워할 만하여 율에 처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고한다.

    1599년(기해년) 110권(3월 6일자)에서는 “배설은 지난 정유년 7월 한산의 전투에서 패전한 수범이었으나 외지에 망명해 있었으므로 조정이 찾아내지 못했는데, 이번에 도원수 권율이 선산에서 잡아 차꼬를 채워 서울로 보냈으므로 참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시신을 묻은 것만으로도 죄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후손들이 이번에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사후 배설 장군은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1605년(선조 38) 4월 9060명을 녹훈하면서 발행한 ‘선무원종공신녹권’(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람을 선무원종공신에 책록(冊祿)하는 증서)에 1등 공신으로 이름이 올랐다.

    사자의 명예훼손죄

    후손이 조상의 명예회복을 위해 소송을 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1년 인기리에 방송한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조선 전기 문신 신숙주의 후손들로부터 분노를 샀다. 당시 신숙주의 후손 108명은 ‘공주의 남자’를 방송한 KBS와 드라마 집필 작가를 상대로 사자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신숙주가 계유정난에 개입해 부당하게 정사를 처리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그의 아들 신면이 세조의 딸로 설정된 세령공주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것처럼 묘사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법원은 창작자 손을 들어줬다. 2012년 9월 12일 서울남부지방법원 민사15부(유승룡 부장판사)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며 “드라마 속 설정은 작가에게 허용되는 범위에서 역사적 사실을 각색한 것으로 보이며 방영에 앞서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허구라는 점을 고지해 시청자도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했을 것이다. 우리 법은 죽은 사람의 명예가 훼손되거나 인격권이 침해된 경우 유족만이 그 구제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하고 있어 후손들은 망인의 명예가 훼손되거나 인격권이 침해돼도 특별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2004년에도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684부대 훈련병의 유족, 2006년 KBS 드라마 ‘서울 1945’에 나온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장택상 전 총리의 유족도 사자 명예훼손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과가 다를 수도 있다. 기존에 패소한 민사소송과 달리 이번에는 형사소송이고, 있지도 않았던 장소에 실존 인물을 끼워 넣었다는 점에서 고의성이 있었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기 때문. 형법 제308조 ‘사자의 명예훼손죄’ 규정에 의하면 공연히 허위사실을 적시해 사자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단 죽은 사람의 친족이나 자손의 고소가 있어야 한다. 최진녕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는 “과거에도 이런 소송이 있었을 때 대법원은 표현의 자유를 높이 평가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무혐의를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단순히 이번 사례만 본다면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인물을 끼워 넣었다는 부분에선 유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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