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예천의 초산정. 발효를 마친 식초는 땅 속 옹기에서 숙성과정을 거친다.
회장으로 추대된 한상준 초산정 대표는 “그동안 식초협회가 없어 개인이 전통 발효식초를 연구하다 보니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며 “우리가 나서 국내 관광산업과 연계한 식초 마을을 조성하고, 전통식초학회 세미나 등을 열어 전통식초의 우수성을 적극 알려야 한다”며 식초인의 각성을 촉구했다. 한국전통식초협회는 9월 초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설립등기를 준비 중이다.
‘1만 년의 묘약’ 뛰어난 효능
식초시장에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다. 단순히 신맛을 내는 조미료였던 식초의 숨겨진 효능이 속속 알려지면서 식초가 건강식품으로 재조명받는 단계를 넘어, 이제는 전통 발효식초를 직접 만들어 먹으려는 ‘식초인’까지 대거 등장하고 있다. 대기업이 점령한 주정식초시장에 전통식초의 반격이 시장된 것이다.
식초는 고대 바빌로니아 고문서에도 등장하고, 로마제국 시대에는 클레오파트라 등 많은 귀족이 건강과 미용을 위해 즐겨 마셨다는 기록이 전한다. 식초를 ‘1만 년의 묘약’이라고 하는 이유다. 식초에 들어 있는 풍부한 유기산과 아미노산이 혈압을 낮추고, 비만과 당뇨를 예방하며, 간 해독을 돕고, 암에 대한 면역력을 높이며, 피부를 좋게 하는 효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 한의서 ‘향약구급방’에 식초를 약으로 쓰는 방법이 기록돼 있고 조선시대 실용지식서 ‘규합총서’에는 쌀식초 제조법이 등장한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식초는 풍을 다스린다. 고기와 생선, 채소 등의 독을 제거한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각 가정 부뚜막 위에는 ‘초단지’가 있었고, 먹다 남은 술을 초단지에 부어두면 자연발효가 일어나 식초가 만들어졌다. 탁주 등 술을 병에 넣고 초파리 같은 벌레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산소만 들어가도록 솔가지나 볏짚으로 병 입구를 막아 따뜻한 부뚜막에 보관하면 신맛이 나는 식초가 만들어진 것이다. 알코올이 시간이 지나면서 초산발효로 식초가 된 것인데, 프랑스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는 이 과정에서 초산균이 그 구실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역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家釀酒) 문화와 함께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전통식초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주세령’(1907) 공포로 전통주가 거의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졌다. 일제 당국으로부터 주조 면허를 받아야 하면서 집안 행사 때마다 수시로 빚어왔던 술을 만들 수 없게 됐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더욱이 해방 후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한 ‘양곡관리법’(1965)이 시행되면서 쌀로 빚던 술은 출처 불명의 수입 밀가루로 대체됐다. 그나마 명맥을 잇던 전통주가 사라지자 전통식초마저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식초 효능이 알려지고, 때마침 불어온 웰빙(well-being) 바람을 타고 국내 식초시장은 2008년부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올해 식초시장 규모는 15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1969년 한국농산이 사과식초를 선보인 이후 조미식초시장이 커졌고, 2005년부터는 식초음료가 등장하면서 시장 규모를 키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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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거치며 사라져
안타깝게도 한국은 장류, 젓갈, 김치 등 발효식품 종주국으로 꼽히면서도 ‘발효의 정점’인 전통식초는 여전히 일제강점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본 현미식초(흑초), 중국 쌀식초(미초), 이탈리아 청포도(발사믹)식초 등이 그 맛과 품질을 인정받아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지만 한국에선 우리 고유의 전통식초를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식초가 차지하는 시장 규모는 1~2%대로 추정될 정도다.
전통주가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진 전통식초 자리는 석유에서 추출한 빙초산과 주정(에틸알코올)을 속성 발효해 첨가물을 넣은 주정식초가 차지했다. 흔히 패스트푸드를 주문하면 따라오는 오이피클이나 무절임에 사용하는 식초가 빙초산이다.
7월 25일 오후 서울 서초동 한국전통발효아카데미에서 열린 한국전통식초협회 발기인 대회 모습(왼쪽). 시중에서 판매하는 사과식초의 식품유형은 ‘발효식초’이지만 작은 글자로 ‘주정’이라고 쓰여 있다. 음용식초는 산도가 낮아 ‘음료베이스’로 돼 있다.
서울 한 대형마트의 식초음료 매장.
주정식초는 석 달 가까이 걸리는 식초 생산기간을 줄이고 단가를 낮추기 위해 알코올발효 없이 주정(에탄올)을 물로 엷게 희석해 초산발효에 필요한 공기를 인위적으로 불어넣어 2~3일 만에 속성 발효한 식초. 조미식초는 대부분 주정식초인데, 주정식초는 신맛을 내는 초산 외에 아무 맛이 없어 첨가물을 넣어 맛을 낸다. 현미 엑기스가 들어가면 현미식초가 되고, 사과 엑기스가 들어가면 사과식초가 되는 것이다. 이는 식품 제조 공정상 원재료가 4% 이상 들어가면 원재료명을 식초 이름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만든 주정식초는 발효식초에 속하지만 식초 효능이 온전히 발현되는지는 알 수 없다. 식초 효능은 풍부한 유기산과 아미노산 등에서 나오는데, 주정식초의 경우 신맛은 다량 함유했지만 다양한 유기산과 비타민, 항산화성분인 폴리페놀 함량이 떨어지기 때문. 백용규 영산대 겸임교수의 설명이다.
“주정식초는 대형 초탑에 산소를 인위적으로 빠르게 공급해 며칠 만에 원하는 산도를 만들어내는 만큼 자연발효와 숙성 기간을 거쳐 만들어진 자연발효식초의 영양적 가치와 생리활성물질을 흉내 낼 수는 없다. 문제는 영양성분을 제대로 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술은 기호식품이지만 식초는 음식에 풍미를 더하거나 건강을 위해 먹는 것인 만큼 영양성분이 중요하다. 따라서 초산, 구연산 같은 유기산 함량과 폴리페놀 함량, 단백질 함량, 필수아미노산 함량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소비자의 선택을 돕기 위해서라도 영양성분 표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국내 대기업이 생산한 마시는 식초 ‘마시는 홍초’(대상), ‘백년동안’(샘표), ‘미초’(CJ)는 엄밀히 따지면 음료수다. 식품 유형에 ‘식초’가 아닌 ‘음료베이스’로 표기된 것도 이 때문. 식품공전에 따르면, 산도가 최소 4% 이상이어야 식초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국내 마시는 식초시장 매출 1위인 ‘마시는 홍초’에는 초산이 2% 포함돼 음료로 분류된 것. 소량의 식초에 액상과당, 정제수, 올리고당 등이 첨가돼 만들어진 식초음료라고 보면 된다.
CJ 관계자는 “식초냐 음료수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식품표기법상 초산 함량이 낮아 음료베이스로 표기했을 뿐 식초 효능은 갖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1호 식초 박사’인 계명대 식품가공학과 정용진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스에 비유하면 전통발효식초는 100% 생과일주스, 주정식초는 일반 주스라고 보면 된다. 주정식초가 효능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질적인 부분에서 전통발효식초보다 많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식초 효능만 생각한다면 전통발효식초를 권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전통식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전통발효식초 제조법 재정비 필요
하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전통발효식초 제조법부터 재정립해야 한다. 주정식초에 비해 가격이 10배가량 비싼 점과 일부 전통식초 장인이 식초 효능을 과장해 판매하는 것도 소비자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한국전통식초협회 황윤억 수석부회장은 “식초 효능이 많이 알려지면서 전통식초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실제 전통식초의 명맥을 잇는 식초 장인은 거의 없다”며 “전통 발효기술을 복원, 개발하는 연구부터 성분 분석을 통한 과학적인 데이터를 축적하는 일까지 식초 장인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단순 조미료에서 벗어나 장수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식초. 1907년 주세령 이후 끊긴 전통식초 명맥을 한국 식초인들이 다시 이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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