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여야 원내대표 주례회동이 열린 서울 여의도 국회 운영위원장실에서 회동을 끝내고 나온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여야 원내대표 합의→당내 강경파 반발→의총에서 거부→합의 결렬’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비단 세월호 특별법 처리 과정에서만 발생한 게 아니다. 올해 초 기초연금법 처리 때나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협상 같은 굵직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야당에서 곧잘 되풀이했던 모습이다.
새정치연합은 올해 초 기초연금법 처리를 위한 당론 채택 과정에서 일부 강경파 의원이 “양심상 허락할 수 없다”며 반발해 극심한 내부 진통을 겪었다. 전병헌 전 원내대표가 의총장에서 수차례 여야 간 협상 과정 및 당의 입장을 설명하고 소속 의원과 일반 국민을 상대로 여론조사까지 실시했지만 강경파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강경파는 전 원내대표를 겨냥해 “도대체 어느 당 소속인지 모르겠다”며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여야 합의문 휴지조각으로 전락
지난해 연말 여야 원내지도부가 외국인투자 촉진법 처리에 합의했으나 당시 박영선 법사위원장 등 민주당 일부 의원이 재협상을 요구하면서 이미 합의된 예산안과 세법 개정안 처리가 지연되기도 했다. 당내에선 협상과 타협보다 투쟁을 우선시하는 일부 강경파 의원의 편협한 태도가 당과 국민의 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든다는 지적이 나온다.
야성(野性)을 강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새누리당을 국정 운영의 한 축으로 인정하지 않고 적(敵)으로만 여기는 태도는 정치권의 불신만 가중할 뿐이란 얘기다. 전병헌 전 원내대표는 5월 7일 퇴임 기자간담회에서 “야당에게 가장 강력한 투쟁의 장은 국회고 가장 강력한 투쟁의 수단도 국회다. 원칙만 주장하려면 시민운동을 해야지 정치를 해선 안 된다”며 당내 진보 성향 강경파에게 작심한 듯 쓴소리를 쏟아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제1야당 원내대표가 되면 선출 순간만 영광스러울 뿐 이후에는 상처만 남는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어렵사리 협상 결과를 가져가면 당내 강경파로부터 ‘사쿠라’(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을 이르는 말)란 비난을 받기 일쑤다. 의총에서 합의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여당 내에서 “믿을 수 없는 파트너”라고 공격받는 난처한 처지에 놓인다. 한 전직 원내대표는 “국민은 이념의 선명성에는 관심 없다”고 일갈했다.
“협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100% 다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을 강경파도 잘 안다. 오직 소수의 극단적 지지층만 보고 정치를 하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타협과 협상이다. 모든 현안에 이념의 선명성이란 잣대를 놓고 접근할 수 있다. 단 집권을 포기했다면 말이다.”
7·30 재·보궐선거 참패 이후 새정치연합 내 각 계파는 당의 재건을 맡을 적임자로 박 위원장을 택했다. 하지만 박영선호(號)가 순항할지에 대해선 엇갈렸다. 여러 계파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당내 역학구도와 갑작스레 불어닥친 사정정국이 주요 변수로 꼽혔지만 박 위원장의 발목을 잡은 것은 뜻밖에도 세월호 특별법이었다.
박 위원장이 8월 7일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와 세월호 특별법 처리를 위한 11개 항을 합의했을 때만 해도 외부에선 박 위원장의 결단력을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당 내부에선 “절차도, 내용도 잘못됐다”며 박 위원장에 대한 비판이 더 많았다. 박 위원장은 유가족에게 이해를 구하는 한편, 8월 11일 의총을 통해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자 친노(친노무현), 초·재선 강경파, 정세균계 등 다양한 계파의 의원들이 의총 직전 주말에 의원들을 대상으로 설득 작업을 벌이며 8·7 합의 뒤집기에 나섰다.
포문은 강경파가 열었다. 8월 10일 오후 의원 44명이 공동명의로 “세월호 특별법 재협상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서에는 원내대변인으로 박 위원장에게 직접 지시를 받는 유은혜 의원도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유 의원은 “박 위원장의 협상이 유의미하다는 것은 인정한다”면서도 “유가족이 최소한 동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양해나 공유는 했어야 한다는 것이 내가 단식까지 하면서 지키려고 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당 중진 인사는 “박 위원장이 너무 서둘렀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특별법 처리가 급한 쪽은 오히려 새누리당이었다. 여당과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국민에게 무엇이 쟁점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게 한 다음 합의했어야 했다. 그전에 최소한의 당내 의견 절차도 필요했다. 새정치연합이 선거에 참패하면서 박 위원장이 세월호 문제를 빨리 정리하고 당내 혁신을 추진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대안 없어 장기 표류 불가피
세월호 특별법 재협상과 관련해 8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비공개 의원총회 도중 일부 의원이 복도로 나와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박영선 비대위가 조기에 무너지는 것은 어떤 계파에서도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다. 비록 8·7 합의에 대해선 온갖 비판을 쏟아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박 위원장이 물러나야 한다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한목소리로 “박 위원장을 중심으로 당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 관계자는 “박 위원장이 당내에서 유일하게 정통성을 가진 리더이기 때문에 그가 물러날 경우 대안이 없다”며 “누구든 지금 당을 맡는 것이 독배란 점을 무척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강경파의 뜻대로 8·7 합의는 백지화됐지만 새누리당이 “재협상 불가”를 고수하면서 세월호 특별법 처리는 장기 표류가 불가피해졌다. 어느 누구도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새누리당의 선의만 기대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완구 원내대표가 완강하다 보니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박 위원장은 “유가족의 기대 수준을 높인 김 대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고,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정치력이 출중한 김 대표가 사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특별법이 처리되지 않으면서 정부가 강력히 요구한 다양한 민생입법 처리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 못지않게 야당인 새정치연합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당 일각에선 세월호 특별법과 다른 민생법안의 연계가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특별법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섣불리 다른 민생법안을 처리할 경우 야당의 협상력은 더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럴 경우 여론의 역풍을 야당이 혼자 다 뒤집어쓸 우려가 있다. 새정치연합 한 재선의원은 “7·30 재·보궐선거에서 우리 당이 왜 졌는지를 2주라는 시간 안에 모두 다 잊은 것 같다”고 쓴소리를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