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곤 교수는 한때 프랑스어 능력시험 도전을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이전에 프랑스어를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교 시절 제2외국어를 의무적으로 선택했어야 했고,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그 대상이었다. 나는 자연계열 지망생이라 당시 통념에 따라 독일어를 선택했다. 사실 여기저기서 전해 들은 프랑스어 발음의 어려움에 대한 공포가 선택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앙’ ‘엥’ ‘옹’ ‘욍’ 같은 프랑스어 비모음, 즉 콧소리는 이해 불가능한 소리로 들렸고,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규칙이라고 할 정도로 일상화한 묵음은 알파벳의 존재 의미까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극심한 연음(리에종)과 축약(엘리지옹) 현상은 우리말 발음조차 깔끔하지 못한 촌놈에겐 마치 프랑스어가 신성불가침의 언어로까지 느껴지게 만들었다.
와인 상표 발음 제대로 하려 시작
그런데 이렇게 꺼리던 프랑스어 공부를 50세도 몇 해를 넘긴 후에나 새삼스럽게 시작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생활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프랑스어 때문이었다. 필자는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일과를 끝낸 후 술 한잔을 즐기는 편이라, 자연스럽게 프랑스산 와인이나 안주용 치즈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문제는 와인 라벨에 찍힌 마치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프랑스어 상표의 음이었다. 아무리 영어 발음을 기반으로 해당 단어의 발음을 유추해도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프랑스어 단어의 발음만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프랑스어 입문서로 독학을 해봤지만, 공부한 그때만 잠시 기억에 남을 뿐 별 효과가 없었다. 결국 학원 강의를 수강해야겠다고 결정했지만 마땅한 강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학원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당시 다른 외국어를 배우고 있던 개인 일정상 일요일밖에는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어느 날 인터넷 검색을 하는데 일요일 ‘왕초보반’을 발견한 것이다. 작은 학원이었지만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2006년 5월 첫 번째 일요일 오전, 소박하게나마 프랑스어 공부의 출발을 맞게 됐다. 그렇게 한 달을 공부하니 책으로 독학할 때보다 발음에 조금 자신감이 붙었다. 역시 문제는 지속성이었다. 일요일 몇 시간 동안 배우는 얕은 프랑스어 실력은 2~3개월이 지나면서 ‘발음만이라도’라는 나의 소박한 소원을 지탱해주지 못했다. 비록 발음 하나만이라도 그 언어에 대한 굳건한 바탕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다시 학원을 알아봤고, 이번에는 토요일 반나절 시간을 내 서울 강남 소재 P학원 기초회화반에 등록했다. 기본 교재를 중심으로 토요일 반나절 총 석 달 코스로 진행하는 강의였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다섯 달 동안 반복해 듣다 보니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프랑스어 발음만이라는 원래 목표를 생각하면 그 이상 공부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공부를 중단하려니 지금까지 노력한 것이 허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공부를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난관이 있었다. P학원에는 상급 과정이 개설돼 있지 않았던 것. 고심 끝에 집에서 좀 멀긴 해도 종로에 있는 S프랑스어 학원 일요일반 강의를 수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다 보니 2007년 2월부터는 주말마다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 각기 다른 3개 외국어 학원에 다니며 어학 공부를 하는 고행 길에 들어서게 됐다. 물론 일본어 공부도 혼자 꾸준히 해나갔다.
S프랑스어 학원에서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한국계 여강사가 특유의 박력 있고 자신감 넘치는 강의로 수업을 재미있게 진행했다. 지금까지 책 위주로 배우다 비록 초보적 수준이지만 회화 중심의 강의를 통해 프랑스어 실력을 착실히 쌓아갔다. 내친 김에 6개월간 같은 강의를 연이어 수강했다. 하지만 그 행운도 오래가지 않았다. 학원 사정으로 해당 강의가 없어지게 된 것.
마땅히 들을 만한 다른 강의가 없어 부득이 시간을 조정해 토요일에 개설된 같은 강사의 델프(DELF) B1 시험준비반 강의를 들었다. 델프는 프랑스 정부가 인정하는 능력 평가시험으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프랑스어 관련 시험이다. 이 중 B1 등급은 국내 상당수 대학의 프랑스어 학과에서 졸업 자격으로 정하고 있을 정도로 쉽지 않은 수준이다. 그만큼 학생들의 관심도 높고 강의 수강생도 많았다.
온갖 고난에도 공부 계속
당시 담당 강사는 평소 내 실력과 성실성으로 미뤄 다소 어려움은 있겠지만 수강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교재 내용도 만만치 않았고 빠르게 흘러나오는 청취 내용은 무슨 말인지 파악이 거의 되지 않았다. 회화 시험에 대비한 말하기 연습에서도 말문이 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같이 수강하는 학생들의 수준도 유난히 높아 소외감까지 느껴졌다.
지난 6개월간 강의를 수강해 친근해진 강사는 조금만 지나면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줬지만, 효율성 측면에서 공부를 계속해나가는 것이 무모하게 여겨졌다. 어차피 공부의 한 방법으로 시험을 선택했을 뿐, 시험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8월부터는 델프 B1 강의를 포기하고 문법을 정리해주는 다른 강의를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03년부터 10년 이상 이어져 오는 나의 긴 4개 외국어 공부 여정에서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해 중간에 포기한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그만큼 씁쓸했고, 프랑스어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도 계속 여운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프랑스어 공부 자체만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해나갔다. 원어민 강의를 포함해 회화, 문법, 독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강의를 시간이 허락하는 한 들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프랑스어를 접할 일이 전혀 없는 처지에서 공부를 지속해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프랑스어 공부 환경이 나쁘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제2외국어 그룹에 속하는 중국어나 일본어에 비할 수는 없지만 결코 나쁜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프랑스어는 학습 자료가 풍부하다. 웬만한 대형 서점에는 빠짐없이 다양한 프랑스어 교재가 구비돼 있고, 시청각 자료도 손쉽게 구해볼 수 있다. 학원만 해도 단과반만 개설돼 있는 곳을 제외하면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전문 학원도 몇 군데 있다. 특히 요즘은 국내에서도 프랑스 라디오나 TV 방송을 거의 실시간으로 듣거나 볼 수 있다. 이런 양호한 공부 환경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얻는지는 결국 학습자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마침내, 한때는 수강 자체를 포기하기까지 했던 델프 B1에 공식 도전장을, 그것도 1년에 4개 외국어 능력 평가시험 도전의 일환으로 던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