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년, 캔버스에 유채, 73×92cm
이해 10월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면서 두 사람은 고흐가 빌린 셋집에 나란히 아틀리에를 꾸미고 ‘화가들만의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격렬하고 극단적인 성격의 고흐와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고갱은 작품 세계에 대한 견해 차이로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달 만인 이해 12월, 마침내 다툼으로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고흐가 면도날로 자신의 귀를 잘라내는 자해를 함으로써 공동생활은 끝나고 만다.
사건이 터진 날 저녁에도 두 사람은 격렬하게 싸웠고, 고갱은 집을 나와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피투성이가 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고흐를 발견한 고갱은 즉시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연락한 뒤 짐을 챙겨 아를을 떠났다. 두 사람은 2년 후 고흐가 피스톨로 가슴을 쏴 자살할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 훗날 고갱은 고흐와의 공동생활에 대해 “비록 서로 맞지 않는 점들은 있지만, 고통과 병마에 시달리며 도움을 바라는 선량한 친구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이 갈등한 원인은 색채를 사용하는 데 대한 견해가 판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에 대한 견해 차이라는, 어찌 보면 사소한 차이를 넘어서기에는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 극단적이었다. 고흐와 고갱은 함께 살 수 없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이미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갱이 고흐 모습을 그린 이 초상은 그런 운명적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1888년 여름 아를에서 고갱이 오기를 기다리던 고흐는 해바라기 그림을 여러 장 그렸다. 해바라기 그림으로 고갱의 방을 꾸밀 생각이었다. 아를에 도착해 방 벽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을 본 고갱은 이해 11월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의 모습을 그렸다. 이처럼 서로 그림을 주고받으며 자극을 주고 격려하자는 것이 원래 고흐가 원했던 화가들의 공동생활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초상화를 본 고흐가 자신과 고갱 사이의 견해 차이를 확연히 느꼈다는 데 있다. 아니면 그는 단순히 고갱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고갱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보면서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이건 분명히 나다. 그런데 미쳐 있는 나인 것 같다.”
정말로 이 말을 실현하기라도 하듯, 한 달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 고흐는 정신착란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다. 그는 즉시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수용됐고, 아를에 도착했던 1888년 봄의 평온하고 정상적인 상태로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