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 새정치민주연합 중앙당창당 대회가 열린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김한길(왼쪽), 안철수 공동 대표가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기초선거 무공천 재검토 요구가 본격화한 것은 3월 중순이다. 통합 논의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는 시점이었다. 전남도지사 출마를 접은 박지원 의원이 깃발을 들었다. 그는 20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통합은 승리를 위한 것이고, 선거에서 승리해야 새 정치가 가능하다. 기초단체 정당공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술이 잘돼도 환자가 죽으면 안 된다”며 기초선거 무공천의 재검토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부영, 정동영 상임고문 등이 당 외곽에서 재논의를 요구한 적은 있지만 민주당 출신 현역 의원이 공개적으로 재검토를 요구한 것은 처음이다.
6·15와 10·4선언 누락 논란
김한길,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는 재검토는 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기초선거 무공천은 두 사람이 내세운 통합 명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악재가 터졌다. 통합신당의 정강정책 논쟁 과정에서 안 대표 쪽이 제시한 초안에 5·18광주민주화운동, 6·15남북공동선언과 10·4남북정상선언 등을 명기하지 않은 게 뇌관이 됐다. 안 대표 쪽 윤영관 정강정책 공동분과위원장은 “소모적인 이념 논쟁 여지를 없애고 초점을 민생에 두자는 것이 양측의 공통된 인식”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6·15와 10·4선언의 성과를 두고 보수와 진보 진영 간 논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를 털고 가겠다는 뉘앙스였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그동안 통합을 앞두고 불만을 억눌러왔던 강경파가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초선 강경파가 주축을 이룬 ‘더좋은 미래’의 간사인 김기식 의원은 트위터를 통해 “민생을 강조하기 위해 6·15, 10·4선언 계승 문구를 삭제한다는 게 무슨 궤변이냐”고 발끈했다. 그는 이어 “산업화와 민주화 모두를 긍정적 역사로 평가하자면서 역사적인 6·15, 10·4선언 계승은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듯하다”고 비판했다. 정청래 의원은 “뿌리를 자르고 꽃을 피우고, 주춧돌을 빼고 기둥을 세울 수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결국 안철수 대표는 3월 20일 광주를 찾아 5·18광주민주화운동, 6·15와 10·4선언 등을 명기하지 않은 정강 및 정책 초안을 제시한 것과 관련해 “뜻하지 않은 논란으로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면서 사과해야 했다.
안 대표의 리더십이 흔들리자 그동안 침묵하던 친노(친노무현) 세력도 반격을 시작했다. 그동안 통합신당 창당 과정에서 말을 아끼던 문재인 의원이 움직였다. 문 의원은 3월 24일 부산 지역 언론사 정치부장단과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당의 기초선거 무공천 방침에 대해 당원들을 상대로 의견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초선거 무공천은 정치개혁을 위한 공약이었지만 상대방인 새누리당에서 ‘게임 룰’을 바꾸려는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무공천을 할 경우 일방적인 선거 결과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문 의원의 대변인 격인 윤호중 의원은 “당이 이런 문제로 오락가락하면서 논쟁을 벌이기보다 조속한 시일 내 당 입장을 결정하는 게 좋겠다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지난 대통령선거(대선) 당시 기초선거 무공천을 주장했던 당사자인 문 의원이 사실상 재검토 필요성을 거론함에 따라 공천을 하자는 주장이 폭발력을 얻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최근 기초선거 무공천의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왼쪽)과 박지원 의원.
두 사람의 전격적인 회동으로 친노 측 반발은 당분간 수그러들 수 있다. 하지만 전선이 확대될 개연성은 여전하다. 기존에 신주류(김한길 대표 측)와 친노 대결에서 중립적 위치를 취하던 486세력이 무공천에 적극 반대하기 때문이다.
서울시당위원장을 맡은 오영식 의원은 “창당 이후 기초선거 무공천에 대한 대응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일산에 지역구를 둔 김현미 의원도 “국민의 비판이 있더라도 어려움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고 나중에 제도 개선을 통해 바꾸겠다고 하는 것이 옳지 않나 생각한다”며 무공천 철회 공론화 의지를 드러냈다.
친노·486 ‘무공천 재검토 연대’
이처럼 수도권에 기반을 둔 486 의원이 무공천을 적극 반대하는 이유는 충격적인 여론조사 결과 때문이다. 민주당 출신 이해식 서울 강동구청장은 지난해 한 언론의 여론조사에서 서울지역 25명 구청장 가운데 업무 수행도와 재선 지지율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구청장을 무소속 후보로 가정하고 여론조사를 해보니 새누리당 후보에게 모두 뒤진다는 결과가 나온 것. 서울지역 한 재선의원은 “당선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알려진 이 청장이 진다는 소식에 당내 수도권 의원들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이 구청장이 지면 다른 구는 해볼 필요도 없는 것”이라며 당내 분위기를 전했다.
서울시와 새정치민주연합 서울시당도 최근 여론조사에서 박원순 시장이 주춤하고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과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치고 올라오는 데 대해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주요인으로 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서울시 관계자는 “새누리당은 바닥에서 기초선거 공천 희망자들이 엄청나게 뛰어다니며 선거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지만 민주당은 기초선거 무공천을 주장해 출마 예정자들이 조용한 상황”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가 당분간 기초선거 무공천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친노와 486세력은 무공천 재검토를 계기로 연대할 수도 있다. 가뜩이나 당내 세력이 취약한 지도부에게 친노와 486세력의 결합은 위협적 요소다. 자칫하다간 집권 초기부터 지도력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통합신당 내부에 가로놓인 ‘시한폭탄 1호’는 명분과 실리가 복잡하게 얽힌 기초선거 무공천 문제다. 이 폭탄의 뇌관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따라 새정치민주연합과 안 대표의 미래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