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KT 사옥에서 열린 고객정보 유출 관련 기자회견에서 황창규 KT 회장이 머리 숙여 사죄하고 있다.
KT는 여러모로 민감한 시기에 통신업계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동안 유무선통신시장의 전망이 어둡다는 판단 아래 KT를 필두로 국내 통신사들은 돈이 될 만한 연관 사업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오히려 뚜렷한 실적 없이 기업 경쟁력의 한계를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최근 경찰 수사로 드러난 KT 온라인 고객센터 ‘올레닷컴(olleh.com)’의 980만 건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다. 현재도 수사가 진행 중인 통신사의 이번 보안 누출 사건은 거의 전 국민의 고객정보를 다루는 통신업계로선 치명적인 사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면초가 아닌 십면초가 상황
하지만 더 큰 문제는 KT의 이번 사고가 처음이 아닌, 2년 만에 반복된 인재(人災)라는 점이다. 2012년 7월 KT는 본사와 대리점을 잇는 내부 전산망을 해킹당해 870만 명의 고객정보가 유출된 바 있다. 당시 KT는 표현명 사장 등 고위 경영진이 총출동해 대국민 사과와 함께 보안 분야에 대한 집중투자를 약속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약속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민기업인 KT에 대한 신뢰가 추락한 셈이 됐다.
게다가 이번 사고는 소비자와 직접 맞닿은 온라인 고객센터가 보안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을 무시한 채 마구잡이로 구축됐다는 점에서 국내 대표 정보기술(IT) 기업을 지향한 KT의 경쟁력을 의심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
IT 업계 한 관계자는 “고객의 소중한 개인정보를 홈페이지에 그대로 노출하다시피 한 기업을 어떻게 믿고 관련 IT 사업을 맡길 수 있겠나”라고 질타했다. KT는 최근 ‘탈(脫)통신’을 화두로 통신 외 여러 시스템통합(SI) 사업에 적극 진출하고 있었기에 이번 사고가 남긴 충격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방만한 KT의 경영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은 올 초 불거진 자회사 KT ENS의 3000억 원대 사기대출 연루 사건이다. 스마트폰 케이스와 주변기기 등을 만드는 중소기업 8곳이 KT ENS의 김모 부장과 짜고 허위 매출 채권을 담보로 은행에서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대출받아 사라진 것이다. 금융권은 2008년 이후 6년 가까이 이런 사기가 이어진 점으로 미뤄 KT ENS도 사기대출 사건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KT ENS 측은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예고되지만 세간의 관심은 “어떻게 한 기업을 대표하는 인감도장이 허술하게 관리될 수 있는가”에 모아졌다. 사건에 연루된 KT 직원이 점심시간 등을 활용해 수차례 회사 인감도장을 찍어주는 등 사기 공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KT ENS 문제는 사기대출 사건 연루에 그치지 않고 결국 기업 부도로 이어졌다. 3월 12일 강석 KT ENS 사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해외 프로젝트파이낸싱(PF)과 관련한 기업어음(CP)의 보증 요청을 감당하지 못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한다”고 밝혔다. 이 회사가 루마니아에서 진행하는 태양광 관련 사업의 단기어음 491억 원을 막지 못해 생긴 일이다. 시장이 받은 충격은 작지 않았다. 국내 10위권 대기업으로 평가받는 KT 계열사가 자금난을 이유로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KT는 현재 54개 계열사를 갖고 있다.
KT ENS는 1986년 기업 유선통신 부문을 따로 떼어 설립한 KT네트웍스가 전신이다. 2004년 KT렌탈을 흡수합병했다가 2005년 렌털 사업 부문을 인적 분할한 뒤 2013년 KT네트웍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KT ENS로 새롭게 출발했다. 현재 네트워크 장비의 공급, 구축, 유지 및 보수를 위한 장비 총판 사업에 주력하며 별정통신사업, 부가통신사업, 인터넷 관련 제반 사업, 태양광발전과 신재생에너지 같은 그린 IT사업도 하고 있다.
KT 자회사인 KT ENS 협력업체의 3000억 원대 사기대출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지방경찰청 경제범죄수사대 소속 수사관들이 2월 11일 오전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협력업체를 압수수색하기 위해 건물로 들어서고 있다.
이번 루마니아 사건처럼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워 다수의 해외 사업을 진행한 것에 대해서도 우려의 눈길이 많아졌다. 무분별하게 외형 확장에 나선 KT ENS의 해외 사업이 위기를 맞은 국내 대형 건설사들의 행태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 회사는 유동성을 확보하려고 PF에 의존한 결과, 지급 보증 규모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495억 원에 불과하던 PF 지급 보증 금액이 2012년 1170억 원, 2013년 9월 말 2400억 원으로 늘어난 것이다. 결국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부실을 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KT 계열사의 자금난이 비단 KT ENS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고민이다. 계열사 54개 가운데 상당수가 외형 확장에만 신경 쓸 뿐 실속은 없기 때문이다.
통신 업계는 이번 KT ENS의 법정관리 신청이 KT 계열사의 부실 현실화와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대한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본다. 물론 KT가 지급 보증에 나서 문제를 가릴 수도 있었지만 황 회장은 이를 공개함으로써 직원들에게 ‘망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던진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KT가 가진 숙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당장 45일에 달하는 장기 영업정지를 돌파해 시장 지배력을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다. 하지만 기존 경쟁사뿐 아니라 저가 휴대전화로 기세를 올리는 알뜰폰 업체도 만만치 않아 KT에게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전망이다.
3월 10일 황 회장은 KT 직원 3만여 명에게 e메일을 보내 ‘지금 상황에서 하나만 더 잘못돼도 KT에는 미래가 없다’고 전제하면서 ‘말만 하고 책임지지 않거나, 기획만 하고 실행은 나 몰라라 하거나, 관행이므로 어영부영 넘어가는 행동은 절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하는 태도와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최후통첩이었다.
황 회장이 취임 초기 내건 목표 ‘1등 KT’는 과연 얼마나 현실성 있는 구호일까. 시장은 아직까지 차가운 시선으로 KT를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