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60년간 치고 빠지기…봄 아닌 ‘가을’ 이후 진짜 위기

주요 권력변동과 무력도발 전수 조사…‘도발 후 평화 공세’는 하나의 행동 패턴

  • 황일도 기자·국제정치학 박사 shamora@donga.com

    입력2014-01-06 11: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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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하순에서 3월 초순 사이 북한이 도발할 위험이 있다. 유일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한 장성택 처형으로 일시적으로는 내부가 강화될 수 있겠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불안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권력 불안요소와 군부의 과도한 충성경쟁으로 오판이 있을 수 있고, 그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도발을 벌일 수 있다.”

    지난해 12월 17일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전군 주요 지휘관과 가진 화상회의에서 밝혔다는 ‘1~3월 위기설’의 골자다. 김 장관은 하루 전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외교안보장관회의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1월에는 장성택 숙청에 따른 후속처리로 분주할 것이고 3월에는 한미연합훈련 키리졸브가 예정돼 있어 도발이 어려우므로, 그사이 시점을 택할 개연성이 크다는 게 군 당국의 보충설명이다.

    전문가들 견해는 엇갈린다. 국책 연구기관의 분석은 대체로 국방부의 판단과 맥을 같이 한다. 지난해 12월 31일 국가안보전략연구소가 발표한 연례 정세전망 보고서는 “대규모 숙청으로 초래된 엘리트층의 분열과 주민 불만 등으로 인한 체제 위기를 해소하고 내부 단결을 도모하고자 의도적으로 국지도발을 감행할 개연성이 있다”며 그 시점을 키리졸브 훈련이 끝나는 3월 말로 지목했다. 평양 내부 권력변동이 야기한 혼선을 수습하고자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도발 전략을 택할 공산이 크다는 취지다.

    평양이 자신감 쌓였을 때 군사도발

    반면 학계 전문가들의 판단은 사뭇 다르다. 도리어 최고권력이 안정을 찾은 상태에서 군사도발을 감행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장성택 처형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1~3월은 도발에 나설 공산이 오히려 적다는 것.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인민생활 향상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장성택을 처형했으므로 김정은도 이를 신경 쓸 수밖에 없고, 따라서 대외적으로 유화 제스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군사도발은 평양으로서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선택인 만큼 내부적으로 충분히 자신감이 쌓였을 때 이뤄질 것이라는 견해다.



    어느 쪽이 맞을까. 과연 북한의 군사도발과 한반도 위기상황이 다시 한 번 코앞에 닥쳐온 것일까. 이를 확인하려고 ‘주간동아’는 6·25전쟁 발발 이후 64년간 북한의 주요 권력변동 사건과 무력도발을 전수 조사해 그 흐름을 시간순서대로 살펴봤다. 평양 최고권력의 불안정 상황이 실제로 군사도발로 이어져 왔는지, 만약 그랬다면 그 시차는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려는 의도에서다. 이와 함께 남북 당국 간 대화와 회담이 열린 횟수까지 들여다보면 한층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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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실권 장악과 60년대 도발

    北 60년간 치고 빠지기…봄 아닌 ‘가을’ 이후 진짜 위기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2013년 12월 24일 김정일 최고사령관 추대 기념일을 맞아 526대연합부대 지휘부를 시찰하고 있다.

    북한의 주요 군사도발에 대해서는 미국 의회조사국(CRS)이 작성한 ‘북한의 도발 연대기, 1950~2003(North Korea: Chronology of Provocations, 1950-2003)’ 보고서와 일본 전문가 미치시타 나루시게의 분석을 주로 참고했다. 북한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변동 사건은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과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이전 분석을 주요 자료로 삼았다. 남북회담의 횟수와 내용, 성격에 대해서는 통일부가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해놓은 자료를 활용했다.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결과가 아래 그래프다.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사실은 큰 틀에서 평양의 권력변동과 대남·대미 군사도발 사이에 분명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즉 북한에서 권력투쟁이나 최고지도자의 사망, 후계 공식화 등의 사건이 진행된 후에 도발 횟수나 강도도 함께 증가했음이 수치상으로도 확인되는 것이다.

    6·25전쟁 종전 이후 10여 년간 잠잠했던 평양이 군사도발을 큰 폭으로 증가시켰던 1960년대 후반은 누가 김일성 이후의 지도자가 될 것이냐를 두고 권력엘리트 사이에서 치열하게 논쟁이 진행된 직후였다. 64년 6월 김정일이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에 임명돼 권력에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권력투쟁이었다.

    그 결과가 당시까지 사실상 ‘김일성 계파’로 불리며 실권을 장악했던 갑산파의 숙청이었다. 일제강점기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벌였던 박금철, 이효순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 김정일의 권력 승계에 반대했던 이들은 1967년 4월 제거됐고, 이후 북한 체제는 김일성 유일체계와 김정일 후계구축 단계로 빠르게 접어들었다.

    같은 시기 북한은 한국 해군 PCE-56 해상경비정 공격(1967년 1월), 1·21사태(1968년 1월), 푸에블로호 나포(1968년 1월), 울진·삼척 지역 침투(1968년 10월), 미 해군 EC-121 정찰기 격추(1969년 4월) 같은 초대형 군사도발을 줄줄이 이어나갔다. 1968년 한 해에만 한국군 145명, 민간인 25명, 미군 17명이 사망했을 정도로 대결 수위가 높았다. 전시나 다름없던 위기 국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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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로 청와대를 기습하려다 생포된 김신조(가운데)가 사살된 공비들의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왼쪽). 1996년 9월 23일 군 특수부대 요원들이 좌초된 북한 잠수함을 예인하려고 준비작업을 벌이고 있다.

    위기 지나면 남북대화 급증

    이러한 흐름은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의 최고지도자 등극이 이어진 1990년대 중·후반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를 전후해 평양은 1차 북핵 위기를 비롯해 잠수정·잠수함의 동해안 침투, 노동·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 비무장지대에서의 교전 등을 연이어 일으키며 긴장 파고를 높게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뇌졸중 발병 이후 김정은의 최고권력 장악이 진행된 2009년 이후에도 2차 핵실험과 대청해전, 천안함·연평도 사건 등이 줄줄이 이어졌다. 한마디로 평양의 절대권력이 흔들린 직후, 혹은 새로운 권력의 기틀을 다지는 시기에 군사도발이라는 카드를 빈번이 활용해왔다는 뜻이다.

    다만 이러한 공식이 절대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연안파와 소련파 등 경쟁그룹을 축출하고 김일성과 그 추종세력이 평양에서 독점적인 권력을 차지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던 1956년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 대표적이다. 지금과는 남북관계나 국제정치 상황에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북한 정치사에서 가장 치열한 권력투쟁으로 손꼽히는 이 사건을 전후해서는 군사도발이 한 차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초·중반의 아웅산 폭발사건, KAL기 폭파 등도 김일성의 절대권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시점에 이뤄졌다. 2000년대 초반 2차 북핵 위기 역시 김정일 후계구도가 이미 충분히 궤도에 오른 다음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다면 장성택의 충격적인 실각과 처형으로 평양 권력이 큰 혼란을 겪은 현재 시점은 어떨까. 과연 1~3월 북한이 대형 군사도발을 감행할 개연성이 높은 것일까. 앞서 그래프를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이에 대한 답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꼼꼼히 따져보면 권력변동의 주요 사건과 실제 군사도발 사이에는 적잖은 시차가 있기 때문. 3~4년 단위의 큰 틀에서 보면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지만, 그렇다고 권력변동이 벌어지면 곧장 군사도발에 나서는 식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앞서 설명한 1960년대 후반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갑산파 숙청이 이뤄진 것은 67년 4월이었지만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나포는 그 9개월 뒤 벌어졌다. 68년 12월 김창봉, 허봉학 등 주요 군부지도자를 숙청했을 때도 가장 가까운 시점에 감행한 대남도발은 70년 6월 한국군 방송선 나포와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사건이었다.

    199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고 2년여가 지난 시점부터 동해안 잠수정 침투 등의 사건이 벌어진 것. 2000년대 이후를 보면 김정일의 사망과 3차 핵실험 사이에도 1년 이상 시차가 있다.

    北 60년간 치고 빠지기…봄 아닌 ‘가을’ 이후 진짜 위기

    2010년 11월 23일 오후 인천 옹진군 연평도에 북한이 발사한 포탄 수십 발이 떨어져 곳곳이 불타고 있다.

    김정은 신년사 “북남관계 개선 노력”

    北 60년간 치고 빠지기…봄 아닌 ‘가을’ 이후 진짜 위기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제1비서의 신년사를 게재한 1월 1일자 ‘노동신문’. 김 제1비서는 이날 오전 9시 ‘조선중앙TV’를 통해 녹화 방송된 신년사에서 “북남관계 개선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평양 권력에 중요한 변동이 발생하자마자, 혹은 변동 와중에 군사도발을 감행한 경우는 사실상 전무하다. 내부적으로 이를 추스르려고 일정 시간을 보낸 뒤 긴장을 조성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그간의 흐름을 그대로 적용해보면,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이 대남도발로 위기국면을 조성할 시점은 1~3월보다는 최소한 올해 하반기 이후가 될 공산이 커 보인다. 이전 패턴으로 보면 진짜로 위험한 건 그 후라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대목은 그래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군사도발과 남북회담의 관계다. 도발 사태가 이어지는 동안 남북 간 대화가 소강상태였음은 당연한 일이지만, 위기국면이 지난 다음에는 어김없이 회담이 급속도로 늘었음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80년대 중반과 80년대 말,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2006년과 2007년이 모두 마찬가지. 냉전종식으로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탔던 90년대 초반의 대화 횟수 폭증을 제외하면, 북한의 도발 퍼레이드는 거의 예외 없이 남북대화 증가로 이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대규모 연쇄 군사행동 이후 이른바 ‘평화 공세’를 퍼부었던 그간 평양의 대외정책 행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 동안 괴로웠으니 이제부터는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제의를 쏟아내곤 했던 것. 그 같은 태도변화가 1972년 7·4공동성명이나 89년 고위급회담, 2000년과 2007년 정상회담 같은 대형 이벤트로 이어지면서 대화 횟수가 급증하기에 이른다. 도발국면 1~2년 뒤 어김없이 대화국면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2014년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꾸준히 이어진 도발국면의 정리단계에 가깝다는 결론이 나온다. 추세상으로는 오히려 남북대화가 증가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얘기다. 1월 1일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조선중앙TV’를 통한 육성 신년사에서 “북남(남북) 사이 관계 개선을 위한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며 “민족을 중시하고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과거를 불문하고 함께 나아갈 것이다. 북남관계 개선을 위해 앞으로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그간의 이러한 ‘도발 후 평화 공세’라는 패턴이 고스란히 작동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분간 대화국면이 조성된다고 해도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공산이 크다. 장성택 처형이라는 권력변동의 여파를 진정시키고 체제 내부의 자신감을 회복한 후에는 다시 긴장고조를 택할 확률이 높기 때문. 특히 대화국면에서 경제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는 데 실패한다면 이러한 선택을 할 개연성은 더 커질 것이다. 앞서 말했듯 주요 권력변동과 군사도발 사이에는 최소한 6개월 이상의 시차가 있었고, 이를 그대로 적용하면 ‘진정한 위기’는 가을 이후 혹은 2015년 즈음 발생할 수 있다. 이때 벌어질 도발 수위는 2013년 2~3월 ‘말 폭탄’ 정국에 비해 한층 높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지난 60여 년 세월 동안 평양이 내부 권력투쟁 이후 보여온 하나의 행동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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