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의 운해 일출.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는 천왕봉 일출에 버금가는 절경이다.
지리산은 1967년 12월 우리나라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두대간의 가장 마지막에 중심축처럼 솟은 웅장한 경관과 맞물려 우리나라 산악의 대표성과 상징성, 그리고 역사성을 고루 갖춰 흔히 민족 영산으로 불린다.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삼신산(三神山) 중 하나로 알려졌으며, 중국 전설 속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부른다.
지혜로운 사람이 머무르는 산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 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1887년)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쓴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에 등장하는 지리산(智異山)이다. 신라 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고 해 지리산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백두산 맥이 뻗어 내렸다는 의미에서 두류산(頭流山)이라 했다.
지리산의 품은 넓다. 영호남 800여 리, 경남 함양·하동·산청, 전남 구례, 전북 남원 등 3도 5개 시군에 걸쳐 있어 동서를 호남과 영남문화권으로 나눴다. 그 너른 품 안에서 천연기념물 반달곰, 사향노루, 수달 등 동물 2718종과 식물 1372종이 산다. 대략 471km2 반경에 걸친 지리산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 등 대표 봉우리를 비롯해 25.5km의 주 능선에 토끼봉, 명선봉, 영신봉, 촛대봉 같은 1000m가 넘는 준봉을 거느린다.
지리산 역사는 기원전 89년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해 달궁으로 쫓겨오면서 시작된다. 까마득한 마한왕조 때부터 불과 60여 년 전인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의 장구한 역사는 도피와 피난으로 점철됐다. 항일의병, 동학혁명군, 신분을 숨긴 자, 도망친 양반과 노비, 출가한 승려 등 세상을 등진 사람이 찾아왔고 지리산은 그들을 품었다.
작가들은 이렇듯 쫓겨온 자의 슬픈 이야기와 좌절된 꿈을 상상력으로 복원해 ‘태백산맥’(조정래), ‘토지’(박경리), ‘역마’(김동리), ‘지리산’(이병주) 같은 걸출한 작품을 탈고해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지리산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걸작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산등성이와 계곡 아우르는 노고단~뱀사골
돼지령의 억새가 운해를 배경으로 하늘거린다.
주 능선의 장쾌함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고루 갖춘 길이 성삼재~노고단~뱀사골 코스다. 당일 산행으로 지리산 서부의 절경인 노고단, 반야봉, 뱀사골 등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거리는 20.2km, 9시간쯤 걸린다. 성삼재를 들머리로 노고단을 오르는 길은 지리산 등산 코스 가운데 가장 쉽다. 성삼재 해발고도가 1102m이기 때문에 절반 이상을 거저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구례 공용버스터미널에서 성삼재로 가는 첫차는 오전 3시 50분. 이렇게 빠른 첫차는 지리산이니까 가능하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악 도로를 따르다 성삼재에 내린다. 새벽 성삼재에 서면 뼈를 에는 추위가 덮친다. 헤드랜턴을 켜고 산행을 시작하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다.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자 산꾼 한 무리가 지나간다. 그들이 켠 랜턴이 도깨비불처럼 움직이면서 빛의 터널이 만들어진다. 어둠을 뚫고 전진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1시간쯤 걸으면 노고단대피소에 닿는다. 허겁지겁 라면을 끓여 배를 채우고, 노고단에 오른다.
시나브로 견고한 어둠의 장벽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노고단고개에 오르자 탄성이 터져 나온다. 운해다. 구름바다를 뚫고 ‘지리산 엉덩이’로 부르는 반야봉이 우뚝하다. 구름이 자꾸 반야봉을 타고 넘는다. 구름이 참 자유로워 보인다. 반야봉 오른쪽으로 천왕봉 머리가 살짝 보이고, 그 옆으로 붉은빛이 쏟아져 나온다. 일출 시각을 잘 맞췄다. 오전 6시 36분 천천히 어둠을 집어삼키며 말간 해가 뜬다. 지리산 일출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을 최고로 치지만, 운해 속에 펼쳐지는 노고단 일출도 뒤지지 않는다.
지리산이 젖은 길을 햇볕에 내어 말린다. 이른 아침 순한 햇빛을 얼굴에 받으며 산길을 걷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서늘한 아침 공기 속에 향긋한 낙엽 냄새가 가득하다. 노고단을 우회하는 숲길이 끝나면 돼지령이다. 앞쪽으로 왕시루봉이 구름 이불을 덮고 늦잠을 자고 있다. 돼지령부터는 조망 시원한 산등성이 길이다. 오른쪽 구례 방향으로 섬진강이 살짝 보인다.
피아골삼거리를 지나면 임걸령샘이 나온다. 샘에는 콸콸 물이 쏟아진다. 산정에 물이 풍부한 곳은 오직 지리산뿐이다. 단맛 나는 물을 들이켜고 다시 길을 나서면 반야봉으로 가는 길이 갈리는 노루목삼거리. 여기서 반야봉 이정표를 따른다. 반야봉까지는 50분쯤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한다. 주 능선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사람 발길이 뜸하다. 반야봉의 품에는 우리나라 특산종인 구상나무가 가득하다. 구상나무에 코를 대면 신비로운 향기가 샘솟는다.
지리산의 단풍 명소로는 피아골과 뱀사골을 으뜸으로 친다. 뱀사골 계곡의 최고 절경인 탁용소에 가을이 찾아왔다.
반야봉 꼭대기에 서면 세상이 모두 발아래에 있다. 특히 노고단에서 토끼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흘러가는 주 능선의 조망이 일품이다. 흘러가는 산등성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맛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반야봉을 내려오면 전남, 전북, 경남 3도가 만나는 삼도봉. 잠시 바위에 앉아 반야봉과 천왕봉을 조망하기 좋다.
삼도봉에서 제법 급경사를 내려오면 화개재다. 여기서 왼쪽 반선 방향으로 내려서면 장장 9km가 넘는 뱀사골 계곡이 시작된다. 지리산 계곡 중 단풍 명소로 피아골을 제일로 치지만, 뱀사골 단풍이 더 좋다는 사람도 많다. 한동안 거친 돌길을 내려오면 간장소가 나온다. 옛날 보부상이 소금을 짊어지고 내려오다 물에 빠뜨려 물 색깔이 간장처럼 변했다는 곳이다.
간장소 다음으로 제승대, 병소, 병풍소, 탁용소 등이 나타난다. 뱀사골 계곡은 전체가 절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곳이 탁용소다. 이무기가 목욕한 뒤 용이 돼 승천한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반들반들한 바위들이 이무기가 승천하며 몸부림친 것처럼 구불구불 역동적이다.
거대한 다리가 놓인 곳은 와운마을 갈림길이다. 여기서 40분쯤 와운마을로 올라가면 천년송을 만날 수 있다. 이 갈림길에서 도로가 시작된다. 산길은 도로 아래로 나 있다. 예전에는 도로를 따라 걸었지만, 계곡 옆으로 데크 길을 내 걷기가 좋아졌다. 데크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둥그런 바위가 오룡대다. 수려한 하류 풍경을 감상하며 1시간쯤 더 내려오면 반선에 닿으면서 황홀한 산행이 마무리된다.
여행정보
구례 송이식당의 산채정식.
성삼재~노고단~뱀사골 코스는 20.2km, 9시간쯤 걸린다. 거리를 줄이고 싶으면 성삼재~노고단~피아골 코스를 추천한다. 거리는 11.5km로 5시간 걸린다. 서울 용산에서 오후 10시 45분 기차를 타면 구례구역에 오전 3시 3분 도착한다. 여기서 시내버스를 타고 성삼재로 이동해 산행을 시작하면 노고단에서 일출을 볼 수 있고, 일정도 전체적으로 여유 있게 된다.
● 교통
서울 용산에서 구례구행 기차를 이용한다. 05:20~22:45, 하루 13회 운행한다. 버스는 서울남부터미널(02-521-8550)에서 구례까지 06:30~22:00, 하루 9회 있다. 구례 공용버스터미널(061-780-2731)에서 성삼재까지는 03:50~17:40, 하루 8회 다닌다.
● 맛집
구례는 들판이 넓은 데다 섬진강을 끼고 있어 예부터 먹거리가 풍부했다. 전통적으로 산채정식을 잘하는 집이 많다. 화엄사 입구 송이식당(061-782-5785)은 지리산 산나물이 가득한 산채정식을 내놓는다. 1인 1만3000원. 구례시내 서울회관(061-782-2326)은 반찬 40여 가지로 산채정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3인 3만3000원. 뱀사골을 내려오면 천왕봉산채식당(063-626-1916)이 산채요리를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