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월 17일 위정성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앞줄 가운데), 장가오리 중국 부총리(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등이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2회 전국위원회 2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2 중국 허베이성 바닷가 휴양도시 베이다이허 해변에 있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휴양소. 푯말에는 ‘내부 해수욕장, 허가증이 있는 사람만 해수욕을 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현대판 여름 행궁(行宮) 정치
이 때문에 지도부가 총집결하는 8월 베이다이허는 베이징(北京)보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낸다. 그렇다고 논의 결과가 외부에 공개되는 것은 아니다. 베이다이허 회의 자체가 휴양을 겸한 비공식적인 소모임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올해 회의는 8월 5일 류윈산(劉雲山)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이곳으로 과학·국방 분야 전문가 60명을 초청해 접견한 것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베이다이허는 청조 때 이미 외국인을 위한 휴양지로 지정됐다.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이 들어섰을 당시 이곳에는 별장 719동이 있었다. 한동안 잊혔던 베이다이허를 지도부 회합 장소로 이용한 건 54년부터다. 당시 국무원은 지도부가 7, 8월 이곳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신징바오(新京報)’는 당사(黨史) 전문가를 인용해 베이징에서 300km 거리인 베이다이허의 기후가 온화하고 모래 질이 좋은 데다 ‘상어가 적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전했다.
중국에서는 청조 때도 여름이면 황제가 허베이성 청더(承德)로 거처를 옮기는 등 여름 행궁 전통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에는 초원에서 수렵을 즐기며 피서를 했지만 지금은 지도자들이 해변에서 수영을 하면서 국사를 논의한다는 것이다. 수영은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 이래로 지도자들이 건재를 과시하는 퍼포먼스로 굳어졌다.
최고 지도부가 모이는 곳은 베이다이허에서도 보하이(渤海)만의 바다를 접한 시하이탄루(西海灘路) 변으로 압축된다. 이곳은 일반인 출입을 막으려고 해변을 따라 그물을 둘러쳐 놓았다. 그물 너머로 붉은색 지붕의 대형 별장이 늘어서 있다. 국가주석이 머무는 숙소 앞은 특별히 ‘1호 해변’이라고 부른다. 고급 휴양지 ‘프라이빗 비치(private beach)’처럼 운영하는 셈이다. 주요 지도자는 재임 기간 별장을 한 채씩 받는다. 본인 사망 이후에도 배우자가 3년간 이용할 수 있다.
베이다이허 여름 행궁은 1966년 문화대혁명 발발로 맥이 끊겼다가 84년 다시 과거의 영광을 찾았다. 하지만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이 취임한 2003년 중국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가 “상무위원들이 올여름에는 베이다이허에서 업무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하면서 여름 수도로서의 구실은 끝났다. 새 정부의 개혁 의지를 내보이려는 결정이었지만, 휴양지이자 전·현직 지도부가 회합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정부 기능이 옮겨가지 않았을 뿐 4년 뒤인 2007년부터 여름이면 당, 군, 정부의 주요 인사와 가족 등 수천 명이 다시 몰려들었다.
여기에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말이 나온다. 퇴임 후에도 상하이방(상하이 관료 출신 모임)을 이끌며 중국 정치를 막후에서 지배하던 그로선 라이벌인 후 주석의 결정이 원로그룹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조치로 보였을 법하다. 더욱이 장 전 주석은 재임 기간에 이곳으로 일본 ‘아사히신문’ 사장 등 외국 언론사 대표를 불러 서방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깊은 애정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현대사 관통 주요 결정의 현장
1958년 8월 마오쩌둥은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국가시책 40개 항을 결정했다.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설립, 대만 진먼(金門)섬에 대한 포격 결정이 포함됐다. 대약진운동은 영국과 미국의 경제력을 단기간에 따라잡겠다며 농가, 학교에까지 고로(高爐)를 짓고, 농업인력을 대거 제조업에 투입한 산업화 전략이다. 그러나 아사자(餓死者) 수천만 명을 낸 채 실패로 끝났고, 마오쩌둥의 권위는 추락했다. 그는 이를 만회하려고 66년 문화대혁명이라는 더 큰 재앙을 불러들였다. 인민공사는 중국의 말단 사회, 행정조직으로 생산 수단을 집단화하는 일종의 권력 장치였다. 마오쩌둥 사후에 유명무실화됐다.
톈안먼(天安門) 사태 후 보수파의 반발에 직면한 덩샤오핑(鄧小平)이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더 강력한 개혁·개방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발판도 베이다이허에서 벌어진 치열한 노선투쟁에서 승기를 잡은 덕분이다. 장쩌민이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후진타오 국가주석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한 것도 베이다이허 회의(2004)에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다이허는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주요 결정이 이뤄진 현장이다. 중국의 독특한 합의제 통치가 휴양지를 빌려 총의를 모으는 식으로 관철돼온 것이다. 그러나 이 총의는 민주주의 원칙이 배제된 지도자 그룹만의 총의였다. 이 때문에 베이다이허 회의는 소통의 효율성에도 형식과 내용 측면에서 서방, 반중(反中) 단체로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미국에 서버를 둔 중화권 매체 ‘둬웨이(多維)’는 “베이다이허 회의는 중국 정치의 낙후성을 보여주는 밀실주의”라고 혹평했다. 게다가 국민에게는 아직 생소하기만 한 여름휴가를 지도부만 즐긴다는 비난도 적지 않다. 중국에서는 10월 1일 국경절 때 일주일가량 휴가를 쓰기 때문에 여름에는 관공서를 빼고 휴가가 거의 없다.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시진핑(習近平) 체제에서도 이런 점을 의식해 과거보다 회의 규모를 줄이려는 경향을 보인다. 일각에서는 시 주석이 베이다이허 내 별장 신축을 제한하고 일부 원로 외에는 장기 투숙을 금하도록 했다는 말도 나온다. 시 주석 본인이 베이다이허에 갔는지도 아직 불분명하다. 여기에는 후진타오 전 주석이 그랬듯 원로들의 간섭을 배제하겠다는 정치적 판단도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행궁 밖에선 노선 투쟁 벌어져
3, 4 중국 지도부의 업무 및 주거공간인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5 중난하이를 배경으로 미국 학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리커창(李克强) 총리 주도로 추진 중인 경제개혁 방안도 이 자리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현 지도부는 산업구조 재편과 금융 부실 제거, 공공부채 개혁 등을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견해를 보이지만, 경기 둔화로 적지 않은 반발에 직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번 회의에서 기득권층의 반대를 극복하고, 개혁 당위성을 설득하는 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내에서 최근 ‘헌정(憲政) 논란’이 벌어지는 것도 베이다이허 회의와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당·국가(party-state) 체제다. 당이 국가에 우선한다. 헌법은 당이 아닌 국가의 기본법이다. 헌정을 하자는 것은 당 우선이 아닌, 국가 우선 통치 이념을 확립하자는 것이자 당 특권을 도려내겠다는 것을 뜻한다.
‘런민일보’는 8월 5~7일 연속으로 1면에 사실상 헌정을 반대하는 외부 기고문을 실었다. 요지는 미국식 입헌정치를 주장하는 측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밑동부터 허물어뜨리려는 ‘미국의 대리인’이라는 것이다. 반면 중국공산당 고급 간부를 육성하는 중앙당교의 기관지 ‘쉐시(學習)시보’는 5일 민주적 선거제 도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치체제 개혁을 촉구하고 나섰다. 당 철학과 노선을 제시하는 매체들이 이처럼 공개적으로 엇박자를 낸 것은 당 내부에서 헌정을 둘러싼, 더 나아가 보수와 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시 주석은 총서기 신분이던 지난해 12월 헌법공포 30주년 기념식에서 “공산당은 반드시 헌법과 법률의 범위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치체제 개혁에 손을 들어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시 주석 체제 들어 인터넷 여론에 대한 통제가 심해지고 마오쩌둥식 군중노선을 답습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등 그가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는지 모호한 측면도 있다.
역대 베이다이허 회의는 8월 20일경 막을 내렸다. 시진핑 시대 10년이 어디로 갈지를 놓고 세계가 베이징 동쪽의 작은 휴양마을에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