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준비학교 수업 장면.
김훈 에세이 ‘무사한 나날들’의 한 대목이다.
대부분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준비 없는 죽음은 더욱 그렇다. 아무 의식도 의지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춥고 어두운 흙구덩이’로 끌려 들어가기를 원하는 이가 있을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다. 국립암센터 등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암 사망자 가운데 30%는 사망 1개월 전까지 항암화학요법을 받는다. 미국의 9%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수치다.
말기 환자 치료 중단권 존중
사망이 임박할수록 의료처치는 더욱 많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분석 결과 말기암 환자가 사망 전 2개월간 쓰는 진료비는 연간 총 진료비의 절반에 달한다. 이일학 연세대 의대 교수는 “이런 치료를 받는 환자의 상당수는 중환자실에서 각종 연명장치를 매단 채 생명을 유지하다 가족과 제대로 작별할 새도 없이 세상을 떠난다”며 “모든 치료는 기본적으로 아프고 힘든데, 성공 확률이 극히 낮은 치료를 죽기 하루 전까지 계속하는 것이 과연 환자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근 발표되는 각종 연구는 우리 국민이 이런 죽음을 원치 않음을 보여준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팀이 지난해 6월 진행한 ‘웰다잉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6.7%는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음’을 꼽았다. ‘가족이나 의미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30%)이 뒤를 이었다. 30여 년간 의사생활을 하며 수천 명의 죽음을 목격한 박상은 샘병원 의료원장은 “말기암 환자에게 왜 더 살고 싶은지, 며칠 또는 몇 달을 더 산다면 뭘 하고 싶은지 물으면 대부분 ‘며칠이라도 가족과 함께 일상의 삶을 더 살고 싶다’고 답한다. 아내가 주방에서 된장찌개를 준비하는 동안 자녀와 마루에서 뒹굴고 놀던 시간을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대통령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산하에 설치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제도화 특별위원회’(특위)는 최근 말기 환자의 연명치료 중단 결정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 환자 본인이 원치 않으면 일부 치료를 거부할 수 있고, 의사는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특위는 5월까지 관련 논의를 마무리한 뒤 입법화하는 것을 검토 중이다.
환자 본인이 뜻을 밝힐 수 없을 때는 어떻게 될까. 2009년 대법원은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치료를 받던 김모 할머니 가족이 “환자가 평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원했다”며 병원을 상대로 낸 인공호흡기 제거 청구 소송에서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2004년에는 서울 보라매병원에서 환자 가족의 요청으로 역시 의식불명 상태에 있던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뗀 의사가 살인방조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이 있다. 이일학 교수는 왜 이처럼 차이가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면서 1990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크루잔 대 미주리 주 보건부 사건’ 판결을 소개했다.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크루잔의 부모가 병원에 튜브를 이용한 영양 공급 중단을 요구하면서 시작된 이 사건에 대해 당시 미국 법원은 “부모가 강력히 원한다고 하더라도 연명치료를 중단하려면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판단능력이 있었을 당시 원했을 것에 관한 명백하고 확신할 만한 증거(clear and convincing evidence)가 필요하다”고 판시했다. 환자 본인이 연명치료 중단을 원했음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 경우 가족이라 해도 인공호흡기 제거나 영양 공급 중단을 결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 법원의 판결 역시 이와 맥이 닿아 있다. 김 할머니는 2005년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남편을 떠나보냈다. 당시 해외 출장 중인 아들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연명치료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의식도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천국 가면 다 만난다”며 거절했다. 이 사실이 ‘연명치료 거부’ 증거로 받아들여져 호흡기를 제거할 수 있었다. 2009년 세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도 사망 5개월 전부터 “호흡이 곤란해질 경우 자연적으로 삶을 마무리하겠다”는 뜻을 수차례 밝혔고, 이를 정진석 추기경이 공식적으로 확인함으로써 인공호흡기 부착 등의 연명치료를 받지 않은 채 죽음을 맞았다.
문제는 환자가 중병으로 명료한 판단이 불가능하거나 혼수상태에 빠져 의사를 표시할 수 없을 때 ‘판단능력이 있었을 당시 원했을 것에 관한 명백하고 확신할 만한 증거’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 의료계와 민간단체 등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사전의료의향서’ 작성을 권한다. 2012년 9월 ‘연세대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한국죽음학회’ ‘한국골든에이지포럼’ 등 4개 단체가 결성한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사실모임)은 관련 서식을 배포하고, 원할 경우 보관도 해준다. 작성자가 ‘뇌기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호흡과 체온유지 등 기본적 신체 기능유지가 불가능’할 때 등 특정한 상황에 놓일 경우 어떤 의학적 처치를 받거나 거부할지를 미리 밝혀두는 방식이다(사진 참조).
삶과 죽음 방식 스스로 결정
의료적인 지식이 있거나 관련 자문을 받을 수 있는 경우 심폐소생술 중단, 인공호흡기 부착 거부, 기도삽관 거부 또는 기관절개술 거부, 승압제·강심제 등의 약제 투여 거부, 통증약제 요청 등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밝혀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대한의사협회 등이 2009년 마련한 ‘연명치료 중지에 관한 지침’에 따르면 수분 및 영양 공급 등 일반 연명치료는 중단할 수 없지만, 앞서 언급한 특수 연명치료의 경우 종류와 조건에 따라 구체적으로 중단 및 지속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
현재 사전의료의향서의 효력이 법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명치료 중단을 둘러싸고 가족과 의료진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 강력한 증거로 제시할 수 있다. 홍양희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 회장은 “이 서식을 작성한 뒤엔 가족 등 주위 사람에게 알려 필요한 경우에 쉽게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갑에 사전의료의향서 작성 사실과 보관처를 적은 메모 등을 넣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최근 이에 대한 의료진의 인식이 높아져서 서울 아산병원 중환자실은 환자가 사전의료의향서를 제출하면 차트에 꽂아둔 뒤 치료할 때 참고한다”고 밝혔다. 현재 사실모임이 보관 중인 사전의료의향서는 약 8000장. 작성자는 10대부터 90대까지 망라돼 있으며 70대가 가장 많다.
이 단체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사전의료의향서를 쓸 수도 있다. 홍 회장은 “의료진이 최선을 다해도 환자가 회생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상태를 전제조건으로 의료 처치에 대한 자신의 뜻을 밝히면 사전의료의향서가 될 수 있다”며 “내용 역시 자유롭게 쓰면 된다. ‘회생 가능성이 0.1%에 불과할지라도 끝까지 치료해달라’고 적는 것도 가능하다. 중요한 건 자신의 삶과 죽음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고, 남은 사람들이 그에 따라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이러한 생전 유언(living will) 쓰기 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 민간단체 ‘품위 있게 나이 들기(Aging with Dignity)’가 제공하는 ‘다섯 가지 소원’ 서식이 널리 쓰인다. 작성자가 ‘1. 내가 치료결정을 내릴 수 없을 때 대신 결정을 내려주는 사람 2. 원하거나 원치 않는 치료의 종류 3. 원하는 편안함 정도 4. 원하는 간병 방식 5. 사랑하는 가족에게 알리고 싶은 사항’ 등 다섯 가지 ‘소원’을 기록해두도록 하는 것. 각 항목은 꽤 구체적이다. 두 번째 소원 ‘원하거나 원치 않는 치료의 종류’ 부분을 보면 작성자가 놓인 상황을 ‘임종시(내가 곧 사망하리라고 담당의사 및 다른 전문의료인이 판단한 경우)’와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 깨어나거나 회복 불가능한 경우(의식 회복이 불가능한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담당의사 및 다른 전문의료인이 판단한 경우)’, ‘영구적이고 심각한 뇌손상을 입었고 회복불가능으로 판단된 경우(예를 들어 눈은 뜰 수 있으나 말을 하거나 남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 등으로 나눈 뒤, 각 처지에서 생명연장 치료를 받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선택하게 한다.
직접 유언장, 사망기 등 써보면 유익
병원에서 임종을 준비하는 환자와 가족들.
우리나라에서는 작가 한말숙 씨가 2003년 한 문학잡지에 기고한 유언장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화제를 모았다. 한씨는 유언장 첫머리에 자식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밝힌 뒤 “1. 수의는 엄마가 준비해둔 것을 입혀라. 만일 미처 엄마가 준비를 못 했으면 연옥색 나이트가운(면 100%), 흰 레이스 달린 나이트캡, 손발도 같은 레이스로 써라. (중략) 2. 장례식은 병원 영안실, 가족장으로 검소하게. (중략) 영정 앞에는 헌화한 꽃만 두어라. 절할 때는 재래식으로 해라. 5. (중략) 묘비는 내가 그려서 보여준 대로 야트막하게 네모 모양으로 단단한 돌로 만들어라. 비싼 대리석 같은 것은 쓰지 마라. 묘비명은 ‘평생 감사하며 살다가, 한 점 미련 없이 생을 마치다. 황누구의 처, 황, 너희들의 이름 넷…” 등의 부탁을 적었다.
우리나라에서 ‘웰다잉’ 운동을 펼치는 ‘각당복지재단’은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으로 유언장 쓰기와 더불어 ‘나의 사망기’ 작성도 권한다(상자기사 참조). 자신을 3인칭으로 삼아 부고(訃告)를 작성하는 것으로, 삶을 객관적 자세로 돌아봄으로써 죽음을 평화롭게 맞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홍 회장은 “건강한 성인도 언제 어떤 사고가 닥치거나 어떤 질병에 걸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다.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상상해보고 나는 그 시점에 어떤 사람들과 어떤 모습으로 죽어가고 싶은지 고민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