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4

..

추억… 유혹… 뒤죽박죽 알콩달콩 ‘로마 로맨스’

우디 앨런 감독의 ‘로마 위드 러브’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3-04-22 10:1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추억… 유혹… 뒤죽박죽 알콩달콩 ‘로마 로맨스’
    먼저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처럼 ‘젤라토’를 한 입 깨물고, 영화 ‘애천’(Three Coins in The Fountain·분수 안 3개의 동전) 속 여주인공처럼 뒤돌아서서 트레비의 분수에 동전을 던질 일이다. 짜릿한 로맨스를 빌든, 로마에서의 멋진 1년을 꿈꾸든 저 나름의 소원을 기원하면서 말이다.

    가로수길 ‘베세토 거리’에서 댄디한 슈트를 차려입고 ‘베스파’(이탈리아의 유명한 스쿠터 브랜드)를 모는 멋진 ‘이탤리언 가이’를 만나거나 포폴로 광장 또는 마테이 광장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당신에게 매력 만점의 여성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올지도 모르는 일.

    혼자든, 연인과 함께든 어떠랴. 콜로세움과 보르게세 공원의 유적, 캄피돌리오 광장을 거쳐, 저녁에는 로마 오페라극장에서 베르디나 푸치니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면. ‘카페 파리’와 거리의 예술가가 있는 나보나 광장을 산책하든, 캄포 데이 피오리 시장에서 저녁에 먹을 파스타 재료를 사는 로마인의 일상을 즐길 수 있다면. 하지만 명심하라. 자전거를 잃어버린 비토리오 데시카의 영화(‘자전거 도둑’) 속 절도범처럼 누군가 당신의 가방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로마의 공기에 섞인 바람기와 불현듯 맞닥뜨린 매춘부의 직업적 호의가 당신의 혼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바로 이곳은 예기치 않은 명성과 유혹, 로맨스, 스캔들, 그리고 파파라치의 도시 로마가 아닌가.

    그러나 누구라고 로마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로마를 찾은 수많은 여행객 중에는 우디 앨런 감독도 있다. 미국 출신인 78세의 이 노(老) 감독은 런던(‘매치 포인트’)과 바르셀로나(‘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파리(‘미드나잇 인 파리’)를 지나 로마에 도착했다. 그가 둘러본 로마의 풍경은 어떨까. 그는 위에 등장한 로마 곳곳의 장소에 카메라를 들이대 유혹과 명성, 스캔들, 로맨스 스토리를 유쾌한 희극으로 써나갔다. 영화 ‘로마 위드 러브’다.

    ‘78세 할리우드 거장’이 본 로마의 이면



    미국인 노부부가 로마에 도착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은퇴한 오페라 감독 ‘제리’(우디 앨런 분)는 사윗감을 만나려고 로마행 비행기에서 막 내린 참이다. 난기류에 휩싸여 비행 내내 고생한 제리는 도착부터 투덜투덜댄다. “빨갱이 사위라니 최악이군. 난 무신론자지만 공산당은 아니었다고! 요트나 타고 다니는 부자를 만날 것이지!” 딸의 예비 배필은 변호사이지만 빈자를 위한 무료 변론에 앞장서고 말끝마다 ‘노조’ ‘노동자의 권익’을 들먹이는 급진파. 하긴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안토니오 그람시의 공산주의가 격렬하게 대립했던 곳이 바로 로마 아니던가. 전후 반파시스트 레지스탕스 이야기를 그린,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효시이자 걸작인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 ‘무방비도시’의 무대도 로마다.

    앨런은 이탈리아가 오페라의 나라라는 점도 잊지 않았다. 오페라 전문가로서 아는 척이나 하려고 했더니 사윗감의 답이 기막히다. “증조부가 베르디”란다. 1813년 태어나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은 그 오페라 작곡가 말이다. 게다가 제리의 예비 사돈은 평생 장의사를 해왔지만, 타고난 목소리를 지녔다. 예비 사돈이 욕실에서 샤워하며 부르는 노래를 들은 제리는 성악가 데뷔를 권한다.

    이 영화에는 푸치니의 ‘투란도트’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 등 유명 오페라 아리아 및 공연 장면이 등장한다. 극중 제리는 한창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할 때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를 공연하면서 등장인물 모두에게 생쥐 분장을 시켜 무대에 올리는 등 엉뚱한 예술가로 설정됐다. 나이가 들어도 ‘예술의 파격’을 꿈꾸는 제리는 ‘욕실에서만 신이 내린 목소리’인 예비 사돈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오페라 무대에 세운다.

    이유는 다르지만 로마에 온 또 다른 노년의 미국인도 등장한다. 휴가 중인 유명 건축가 존(앨릭 볼드윈 분)이다. 존은 우연히 자신을 알아보며 열렬한 팬이라고 주장하는 젊은 건축학도 잭(제시 아이젠버그 분)을 만난다. 존은 잭을 따라 로마를 둘러보던 중 잭의 연애사건에 얽히게 된다.

    잭은 동거하는 연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초대한 또 다른 친구와 사랑에 빠진다. 새로 만난 두 남녀는 건축과 예술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다. 존은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잭을 지켜보며 ‘연애 코치’를 자임한다. 존에게 로마란 자신의 젊은 시절과 닮은 잭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추억의 공간이다. 반면 젊은 남녀에게 로마는 유명 예술가의 근사한 명언을 끊임없이 인용하게 만드는 ‘허세’의 도시이자, 과거와 현재의 사랑을 흔들어놓는 유혹과 로맨스의 휴양지다. 휴양지의 로맨스가 늘 그렇듯, 떠나버리면 그뿐인.

    이방인의 로마뿐 아니라 로마인의 로마도 있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감독이자 주연인 로베르토 베니니가 맡은 레오폴드. 평범한 중년의 로마 시민인 그는 어느 날 출근을 하려고 문을 나서는 순간, 수많은 취재진의 카메라 세례와 질문 공세를 받는다. “오늘은 뭘 먹었느냐” “오늘은 무슨 색 팬티를 입었느냐” 등 일거수일투족 모든 사생활이 언론의 타깃이 되는 스타가 된 것이다.

    추억… 유혹… 뒤죽박죽 알콩달콩 ‘로마 로맨스’
    ‘투란도트’ 등 유명 오페라 아리아 등장

    어느 날 눈떠 보니 스타가 된 레오폴드가 묻는다. “제가 왜 유명한 거죠?” 대답이 걸작이다. “유명하다는 것 때문에 유명하지요.” 그가 가는 곳마다 카메라가 따라붙는다. ‘파파라치’다. 파파라치의 기원지 또한 로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가십 뉴스를 뒤쫓는 사진기자 이름이 ‘파파라초’였다.

    이 모든 해프닝과 로맨스의 끝에 스페인 광장과 트레비의 분수가 있다. ‘로마 위드 러브’의 엔딩 신으로 여기 말고 더 마땅한 곳이 있을까. 오드리 헵번이 ‘진실의 입’에 손을 집어넣던 바로 그곳. 펠리니는 영화 ‘로마’를 찍으면서 “나는 로마의 깊은 지하감옥에 갇힌 꿈을 꿨다. 벽마다 유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고대 로마인들이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이라고 했다.

    미국 작가 토머스 벨러는 한 로마여행기에서 진실의 입 앞에서 길게 줄을 선 여행객들을 보면서 펠리니의 말을 살짝 바꾼다. “이 도시를 여행하는 내내 나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로마의 영화들이다.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