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어린 나이에 부푼 꿈을 안고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토고 소녀 앙리에트 아코파. 어린 소녀의 꿈은 곧 산산이 무너지고 가혹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다. 당찬 아프리카 여성으로 거듭난 것이다. 파란만장한 그의 이야기는 현대판 노예로 사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이 된다.
앙리에트는 1979년 토고 소코데에서 태어났다. 일부다처제를 고집한 아버지는 비교적 수입이 좋았고 자식을 끔찍하게 아꼈다. 앙리에트는 어린 시절 부족할 것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평화롭던 일상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앙리에트의 오빠와 언니가 연거푸 사망하면서부터. 갑자기 자식 둘을 잃은 아버지가 방황하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그러던 1993년 어머니 중 한 명이 가족에게 토고를 방문한 프랑스 여성 시몬을 소개했다. 그는 파리 거주자로 우아한 몸가짐에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시몬은 앙리에트 가족에게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앙리에트를 프랑스에 데려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집안일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먹여주고 재워주며 교육적인 부분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앙리에트 아버지는 고민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이대로 딸을 데리고 산다면 학교마저 보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주위에선 면역력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온갖 질병으로 하나둘 죽어나갔다. 가족은 물론 앙리에트의 건강과 교육, 미래가 모두 걱정이었다. 시몬의 솔깃한 제안도 거부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프랑스로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앙리에트도 마찬가지. 어린 나이지만 오빠와 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두려웠던 그는 유럽 아이들처럼 학교도 가고 건강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시몬의 제안이 기쁘게 들렸다. 가족을 두고 떠나는 것이 걱정이긴 했지만, 성공해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더 컸다. 1994년 앙리에트는 그렇게 파리에 도착했다.
악몽의 시작, 무너져버린 소녀의 꿈
파리 도착 직후 앙리에트는 토고와는 너무 다른 프랑스의 차가운 분위기에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악몽의 시작일 뿐이었다. 토고에선 그토록 친절하게 느껴지던 시몬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집에 도착한 시몬은 “앞으로 네가 지낼 곳”이라며 세탁실을 가리켰다. 세탁기와 탈수기, 냉동고 등으로 가득 차 있어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침대는커녕 난방도 되지 않는 바닥에 얇은 홑이불 한 장만 깔려 있었다. 게다가 세탁실에는 이미 다른 두 사람이 지내고 있었다. 시몬의 조카 마올리와 시몬 집에서 가사를 도맡은 스테파니였다.
그다음 날부터 앙리에트의 힘겨운 일상이 시작됐다. 앙리에트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시몬 부부의 아침식사 준비를 시작으로 마올리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파리에 위치한 아프리카 각국 대사관을 돌며 시몬이 만든 옷을 팔아야 했다. 저녁에도 마찬가지. 다림질과 설거지, 빨래 등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앙리에트가 의지할 만한 사람은 한 방을 쓰는 스테파니뿐이었다. 역시 토고 출신인 스테파니는 네 살 때 시몬 손에 이끌려 이 집에 들어왔는데,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악몽이 길어지자 앙리에트는 탈출을 결심하고 토고에 있는 아버지에게 몰래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앙리에트를 24시간 감시하던 시몬이 전화를 빼앗아 “지금 앙리에트는 잘 지내고 있으며, 사춘기라서 신경이 예민한 것 같다”고 둘러댔다. 앙리에트 아버지는 시몬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9개월을 보낸 어느 날 시몬은 앙리에트를 자신의 친구집으로 보낸다.
이번 집주인은 대기업을 운영하는 프랑스인 남편과 임신한 모리타니 출신의 아내였다. 그곳에서도 앙리에트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부부가 한겨울에도 온수를 틀지 못하게 막아놓아 앙리에트는 찬물로 샤워를 해야 했고, 먹는 것도 집주인 부부가 먹고 남은 음식물이 전부였다. 여주인은 출산을 하면서 앙리에트에게 “네가 아이를 돌봐주면 조금 있다 학교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앙리에트는 그 말을 굳게 믿었지만 이번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여주인은 2년 후 둘째를 출산했고, 앙리에트는 또 다른 집으로 보내졌다.
이번 주인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보수를 지급했다. 그러나 프랑스 최저임금의 절반도 안 되는 월 380유로가량이었다. 새집에서는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었지만 체류증이 없어 바깥 활동이 제한됐고, 여전히 학교는 갈 수 없었다. 이런 참담한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앙리에트는 토고에 있는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를 의심하며 파리를 방문한 삼촌은 곧바로 앙리에트의 생활상을 파악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파리에 도착했던 앙리에트는 결국 1998년 삼촌과 함께 프랑스를 떠났다.
앙리에트는 출발점인 토고로 돌아왔다. 가족 품에서 지난 시절을 위로받을 수 있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프랑스의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어느 날 마을 이웃이‘현대노예반대위원회’(위원회)에 이 모든 사실을 알리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위원회는 앙리에트와 그 가족에게 “미성년자를 상대로 노동을 착취한 시몬 부부를 고소하라”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고소를 망설였다. 괜히 일이 커지는 것 같았고 재판에서 이길 자신도 없었다. 힘없는 외국인에게 프랑스 법원이 얼마나 신경을 써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한편으로는 부부의 보복이 있을까 두려웠다.”
여러 날을 고민하던 앙리에트는 결국 위원회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1차 재판에선 앙리에트가 승리했다. 프랑스 법원은 시몬과 그 남편에게 징역 7개월과 집행유예 3개월, 3만 유로의 벌금형을 내렸다. 그러자 부부는 곧바로 항소했고, 프랑스 법원은 이번엔 1500유로의 벌금형만 내려 솜방망이 처벌 논란을 불렀다.
제자리 그리고 어린 소녀의 반란
“예상보다 가벼운 판결이 내려지자 화가 났다. 미성년자의 인권을 유린한 사람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는 것이 답답했다. 오기가 생겼다. 다시는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싸워야 했다.”
앙리에트는 달라져 있었다. 위원회의 도움으로 그는 유럽인권재판소로 향했다. 시몬 부부와 함께 자국 거주자의 노동착취에 대한 법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프랑스 정부까지 고소했다. 앙리에트는 “위원회에서 만난 나 같은 아프리카 여성들을 위해 결심했다. 나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은 그때의 상처가 몸에도 남아 있었다. 대부분 고문이나 강간까지 당한 상태였다. 그들이 반항하지 못했던 이유는 주인이 외교관 등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주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와 똑같은 악몽에 시달린 모든 여성을 대신해 내가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앙리에트 이야기는 올리비에 드 브로카의 도움으로 발간한 자서전‘현대 노예’와 영화‘루시의 산책’,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산드린 레이가 2시간 분량으로 그려낸‘너무도 시끄러운 사춘기’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며 프랑스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2003년 5월 15일 베르사유 상고재판소는 무임금 노동착취와 인권을 모독하는 노동환경을 이유로 시몬 부부의 유죄를 인정해, 징역형과 더불어 앙리에트에게 1만5000유로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더불어 유럽인권재판소는 프랑스에 이와 같은 사건을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게 형법을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프랑스는 형법 225-13항에 ‘자립성 혹은 나약한 자에게 요구되는 무보수 노동은 징역 5년형과 15만 유로의 벌금형으로 엄중히 다스린다’와 225-14항에 ‘한 개인을 종속시키거나 자립성 혹은 나약한 자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일치하지 않는 환경에서 노동을 행하게 될 경우 5년의 징역형과 15만 유로의 벌금형으로 엄중히 다스린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힘겨웠던 재판이 끝난 후 앙리에트는 프랑스어를 익혔다. 그러고는 간호조무학교에 입학해 성실히 학업을 마친 그는 병원에서 환자를 보살피며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을 찾았다. 현재 서른 살을 넘긴 앙리에트는 아일랜드 출신 남편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프랑스 동부 로렌 지방의 티옹빌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앙리에트는 1979년 토고 소코데에서 태어났다. 일부다처제를 고집한 아버지는 비교적 수입이 좋았고 자식을 끔찍하게 아꼈다. 앙리에트는 어린 시절 부족할 것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평화롭던 일상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앙리에트의 오빠와 언니가 연거푸 사망하면서부터. 갑자기 자식 둘을 잃은 아버지가 방황하면서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그러던 1993년 어머니 중 한 명이 가족에게 토고를 방문한 프랑스 여성 시몬을 소개했다. 그는 파리 거주자로 우아한 몸가짐에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시몬은 앙리에트 가족에게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앙리에트를 프랑스에 데려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집안일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먹여주고 재워주며 교육적인 부분을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앙리에트 아버지는 고민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이대로 딸을 데리고 산다면 학교마저 보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주위에선 면역력이 없는 어린아이들이 온갖 질병으로 하나둘 죽어나갔다. 가족은 물론 앙리에트의 건강과 교육, 미래가 모두 걱정이었다. 시몬의 솔깃한 제안도 거부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프랑스로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앙리에트도 마찬가지. 어린 나이지만 오빠와 언니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두려웠던 그는 유럽 아이들처럼 학교도 가고 건강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시몬의 제안이 기쁘게 들렸다. 가족을 두고 떠나는 것이 걱정이긴 했지만, 성공해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더 컸다. 1994년 앙리에트는 그렇게 파리에 도착했다.
악몽의 시작, 무너져버린 소녀의 꿈
파리 도착 직후 앙리에트는 토고와는 너무 다른 프랑스의 차가운 분위기에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악몽의 시작일 뿐이었다. 토고에선 그토록 친절하게 느껴지던 시몬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집에 도착한 시몬은 “앞으로 네가 지낼 곳”이라며 세탁실을 가리켰다. 세탁기와 탈수기, 냉동고 등으로 가득 차 있어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침대는커녕 난방도 되지 않는 바닥에 얇은 홑이불 한 장만 깔려 있었다. 게다가 세탁실에는 이미 다른 두 사람이 지내고 있었다. 시몬의 조카 마올리와 시몬 집에서 가사를 도맡은 스테파니였다.
그다음 날부터 앙리에트의 힘겨운 일상이 시작됐다. 앙리에트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시몬 부부의 아침식사 준비를 시작으로 마올리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파리에 위치한 아프리카 각국 대사관을 돌며 시몬이 만든 옷을 팔아야 했다. 저녁에도 마찬가지. 다림질과 설거지, 빨래 등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앙리에트가 의지할 만한 사람은 한 방을 쓰는 스테파니뿐이었다. 역시 토고 출신인 스테파니는 네 살 때 시몬 손에 이끌려 이 집에 들어왔는데,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악몽이 길어지자 앙리에트는 탈출을 결심하고 토고에 있는 아버지에게 몰래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앙리에트를 24시간 감시하던 시몬이 전화를 빼앗아 “지금 앙리에트는 잘 지내고 있으며, 사춘기라서 신경이 예민한 것 같다”고 둘러댔다. 앙리에트 아버지는 시몬의 말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9개월을 보낸 어느 날 시몬은 앙리에트를 자신의 친구집으로 보낸다.
이번 집주인은 대기업을 운영하는 프랑스인 남편과 임신한 모리타니 출신의 아내였다. 그곳에서도 앙리에트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부부가 한겨울에도 온수를 틀지 못하게 막아놓아 앙리에트는 찬물로 샤워를 해야 했고, 먹는 것도 집주인 부부가 먹고 남은 음식물이 전부였다. 여주인은 출산을 하면서 앙리에트에게 “네가 아이를 돌봐주면 조금 있다 학교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앙리에트는 그 말을 굳게 믿었지만 이번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여주인은 2년 후 둘째를 출산했고, 앙리에트는 또 다른 집으로 보내졌다.
이번 주인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보수를 지급했다. 그러나 프랑스 최저임금의 절반도 안 되는 월 380유로가량이었다. 새집에서는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었지만 체류증이 없어 바깥 활동이 제한됐고, 여전히 학교는 갈 수 없었다. 이런 참담한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앙리에트는 토고에 있는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를 의심하며 파리를 방문한 삼촌은 곧바로 앙리에트의 생활상을 파악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파리에 도착했던 앙리에트는 결국 1998년 삼촌과 함께 프랑스를 떠났다.
앙리에트는 출발점인 토고로 돌아왔다. 가족 품에서 지난 시절을 위로받을 수 있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프랑스의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던 어느 날 마을 이웃이‘현대노예반대위원회’(위원회)에 이 모든 사실을 알리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위원회는 앙리에트와 그 가족에게 “미성년자를 상대로 노동을 착취한 시몬 부부를 고소하라”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고소를 망설였다. 괜히 일이 커지는 것 같았고 재판에서 이길 자신도 없었다. 힘없는 외국인에게 프랑스 법원이 얼마나 신경을 써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한편으로는 부부의 보복이 있을까 두려웠다.”
여러 날을 고민하던 앙리에트는 결국 위원회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1차 재판에선 앙리에트가 승리했다. 프랑스 법원은 시몬과 그 남편에게 징역 7개월과 집행유예 3개월, 3만 유로의 벌금형을 내렸다. 그러자 부부는 곧바로 항소했고, 프랑스 법원은 이번엔 1500유로의 벌금형만 내려 솜방망이 처벌 논란을 불렀다.
제자리 그리고 어린 소녀의 반란
“예상보다 가벼운 판결이 내려지자 화가 났다. 미성년자의 인권을 유린한 사람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는 것이 답답했다. 오기가 생겼다. 다시는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계속 싸워야 했다.”
앙리에트는 달라져 있었다. 위원회의 도움으로 그는 유럽인권재판소로 향했다. 시몬 부부와 함께 자국 거주자의 노동착취에 대한 법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프랑스 정부까지 고소했다. 앙리에트는 “위원회에서 만난 나 같은 아프리카 여성들을 위해 결심했다. 나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다른 여성들은 그때의 상처가 몸에도 남아 있었다. 대부분 고문이나 강간까지 당한 상태였다. 그들이 반항하지 못했던 이유는 주인이 외교관 등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주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나와 똑같은 악몽에 시달린 모든 여성을 대신해 내가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앙리에트 이야기는 올리비에 드 브로카의 도움으로 발간한 자서전‘현대 노예’와 영화‘루시의 산책’,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산드린 레이가 2시간 분량으로 그려낸‘너무도 시끄러운 사춘기’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며 프랑스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2003년 5월 15일 베르사유 상고재판소는 무임금 노동착취와 인권을 모독하는 노동환경을 이유로 시몬 부부의 유죄를 인정해, 징역형과 더불어 앙리에트에게 1만5000유로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더불어 유럽인권재판소는 프랑스에 이와 같은 사건을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게 형법을 개선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프랑스는 형법 225-13항에 ‘자립성 혹은 나약한 자에게 요구되는 무보수 노동은 징역 5년형과 15만 유로의 벌금형으로 엄중히 다스린다’와 225-14항에 ‘한 개인을 종속시키거나 자립성 혹은 나약한 자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일치하지 않는 환경에서 노동을 행하게 될 경우 5년의 징역형과 15만 유로의 벌금형으로 엄중히 다스린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힘겨웠던 재판이 끝난 후 앙리에트는 프랑스어를 익혔다. 그러고는 간호조무학교에 입학해 성실히 학업을 마친 그는 병원에서 환자를 보살피며 그토록 원했던 평범한 삶을 찾았다. 현재 서른 살을 넘긴 앙리에트는 아일랜드 출신 남편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프랑스 동부 로렌 지방의 티옹빌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