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9일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세빗 2013. 기업고객을 위한 경연장이었다.
3월 5일 세계 최대 정보통신기술 전시회 세빗(CeBIT)이 개막한 첫날 영국 보더폰의 ‘엠마스 엥켈’ 부스. 국내외 취재진이 보는 앞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연방 총리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켰다. 비디오월에 나온 여러 식료품 사진 가운데 메르켈 총리는 코코넛 초코바를 골랐다. 스마트폰을 사진 앞에 대자 제품이 인식되고 장바구니 버튼이 나왔다. 장바구니를 누르고 결제 버튼을 누르자 쇼핑은 끝. 이제 몇 시간 후면 원하는 곳으로 물건이 배달된다. 하지만 세빗 참관 8년차인 메르켈 총리는 증강 현실 기술 덕에 QR코드 없이 간편하게 쇼핑하는 신기술에 쉽게 감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소비자 시각에서 개선점부터 지적했다. 물론 모바일 쇼핑월을 개발한 청년 창업가들에게 “이런 것이 우리 우커마르크에도 있으면 좋겠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커마르크는 메르켈 총리가 주말을 보내는 고향 마을이다.
1986년부터 해마다 3월이면 독일 북서부 하노버 시 전시장에서 세빗이 열린다. 한때 빌 게이츠가 윈도우95를 소개하며 컴퓨터 세상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던 이 전시회는 과거 명성을 잃은 지 오래다. 수치만 보면 더 그렇다. 3월 5~9일(현지 시각) 열린 올 전시회엔 관련 업체 4157곳이 참가했고, 28만5000명이 방문했다. 2001년 참가 업체 8100곳, 85만 명이 찾은 것과 비교하면 10년 사이 반 토막이 났다. 애플은 물론 구글, 페이스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최신 모바일 제품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발표되고, 가전은 미국 라스베이거스가 주도한다.
삼성전자 부스에 몰려든 인파
그러나 올해 세빗은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자신감을 찾은 듯하다. 도이치메세 수석임원이자 세빗 총괄 책임자인 프랑크 푀르슈만은 “이제는 참가 업체 수나 방문자 전시 규모가 아니라, 구매결정권자의 방문 비율과 실거래 여부를 관건으로 본다”면서 “규모가 작으면 자력으로 재정을 감당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세빗 목표는 소비자고객이 아닌 기업고객을 위한 B2B(Business to Business) 시장, 정보통신기술 산업과 기존 산업 간의 접점, 스타트업 플랫폼이 된 것이다.
세빗 주체 측은 올해 전시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참가업체들이 개별 목표치를 절반 이상 달성했고 거래 상담 건수도 700만 건을 넘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비트콤(독일연방 정보통신뉴미디어 협회) 디터 켐프 회장은 “특히 대기업들 만족도가 최고였다”고 전했다. 청년 창업자 참가율도 역대 최고였다. 지난해부터 ‘코드 엔’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스타트업 솔루션 경연대회를 마련한 것이 주효했다.
이번 행사 참가로 큰 효과를 본 업체 가운데 하나가 삼성전자 독일법인이다(삼성전자는 2009년부터 3년을 쉬고 지난해부터 독일법인이 다시 참가했다). 개막 첫날 메르켈 총리와 행사 동반 국가인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가 삼성전자 부스를 방문, ‘스마트 스쿨’ 제품을 살펴보는 장면이 독일 전역에 보도된 데 이어, 둘째 날 아우디 본사 임원진이 디스플레이와 오피스 솔루션을 둘러보고 갔다. 삼성전자 독일법인 관계자는 “전시 이틀째 들어온 비즈니스 상담 신청수가 지난해 총건수보다 2배 이상이라 매우 고무적”이라면서 “유럽에서 B2B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지난해보다 2배 큰 삼성전자 부스는 전시회 기간 내내 방문객과 취재진으로 붐볐다.
세빗 존재를 다시 한 번 각인시킨 것이 올해의 주제 ‘셰어 이코노미(공유경제)’였다. 주체 측은 정보통신기술로 기업 간 정보, 지식, 경험 공유가 확산되면서 새로운 환경이 생겨나는 현실을 포착했다. 데이터를 인터넷에서 공유해 처리하고 관리하는 클라우드 컴퓨팅이 독일 관공서들의 관심을 끌었고, 컬래버레이션, 즉 기업 간 협업에 대한 다양한 방식이 소개됐다. 여행객에게 빈방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 온라인 플랫폼으로 일약 유명해진 ‘에어비앤비’ 창업자의 발표는 공유 트렌드를 선도하는 소셜미디어를 대표했다. 이 밖에 방대한 정보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빅데이터’를 비롯해 ‘웹사이어티’ ‘인터넷과 사물의 결합’은 세빗을 첨단 행사로 이끈 일등 공신이다.
이제 ‘공유경제’라는 주제는 세빗을 넘어 독일 사회 화두로 등장했다. 세빗 기간 전후로 대다수 언론이 공유경제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소유 대신 공유’가 공론화됐다. 특히 이번 전시회 기간에 세빗 마케팅팀은 공유경제를 둘러싼 모순된 개념들을 통합하는 동시에 정보통신기술의 구실을 부각시켰다.
1984년 처음 등장한 ‘공유경제’는 마틴 와이츠먼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가 경제침체 극복 방안으로 제안한 개념이다. 기업 구성원이 지분을 공유하는 전략이 포함된, 소유하지 않으면서 사용하려는 소비 활동을 의미하는 새로운 사업 모델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이번에 내놓은 자전거대여 솔루션이나 다임러의 ‘카투고’, BMW의 ‘드라이브나우’ 렌터카 서비스가 그 예다. 소비자는 자전거나 자동차를 필요한 곳에서 빌려 타고 도착한 곳에 그냥 두면 된다. ‘드라이브나우’의 경우 1분당 29센트(약 415원) 하는 사용료에 보험료, 연료비 등 모든 제반 비용이 포함된다.
내년 동반 국가로 한국 러브콜
반면, 이미 있는 자원을 여럿이 빌려 쓰거나, 물물교환 또는 품앗이하는 경우는 굳이 구분하자면 ‘공유경제’라 할 수 있다. 베를린의 스타트업 카잽이 개발한 개인 간 자동차대여 플랫폼이 이에 속하는데, 자가용에 특별한 박스를 장착해놓음으로써 운행하지 않는 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대여해줄 수 있다. 열쇠와 대여정보, 결제 등을 스마트폰 하나로 통합했다. 이 모든 공유경제의 공통점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올해는 특히 독일연방 총리 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라 정보통신기술 산업에 대한 독일 정치권의 구상도 엿볼 수 있었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은 앞으로 자동차와 기계 산업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정보통신기술 산업이 새로운 성장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창업 문화를 발전시키지 못하면 유럽은 정보통신기술 산업에서 밀려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야당인 사회민주당 슈타인브뤼크 독일연방 총리 후보자는 “독일은 초고속인터넷부터 시급히 확충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디지털 능력이 장차 계층 상승의 새로운 수단으로 자리 잡을 것이므로 컴퓨터언어를 라틴어만큼 비중 있게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빗 개막 직전 발표된 소식 하나.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내기로 악명 높은 메르켈 총리가 슬라이드폰 자판을 누르는 대신 스마트폰 유저로 변신해 트위터를 하는 모습을 곧 볼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메르켈 총리는 해킹과 사이버스파이, 도청 등 보안 위험성 때문에 피처폰 2대를 음성통화용과 이메일용으로 구분해 사용했다. 최근 연방정부는 도이치텔레콤의 자회사 티시스템과 보안솔루션업체 시큐스마트에 보안이 해결된 스마트폰을 올해 7월까지 각각 5000대씩 납품 의뢰했다. 티시스템은 삼성전자 갤럭시S2와 S3, 시큐스마트는 블랙베리 Z10을 골라 보안시스템을 장착 중이다. 메르켈 총리는 세빗 첫날 두 기종을 다 만져보고 갔다. 둘 중 하나가 총리에게 낙점받으면 5000대가 최종적으로 총리 및 연방 관료들에게 지급될 예정이다. 이 소식만으로도 두 제품 이미지는 높아졌다. 세빗이 내년 동반 국가로 러브콜을 보낸 국가는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