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영(49) 씨는 울지 않았다. 울지 않으려 했다. 인터뷰 내내 꼿꼿하던 그가 바르르 입술을 떨다 끝내 눈물을 떨어뜨리던 순간,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야 했다. 임씨는 이내 머리를 흔들고 마음을 다잡았다.
“제가 잘 지내는 게 승민이를 위한 거라고 믿어요. 이 자리에서 절대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버틸 거예요. 다시 승민이를 만날 때까지.”
유서 통해 드러난 끔찍한 괴롭힘
그는 자식을 잃은 어미다. 2011년 12월 중학교 2학년생이던 그의 아들 권승민 군은 ‘친구’를 가장한 동급생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집 베란다 밖으로 몸을 던졌다. 유서에는 “죄송해요 엄마. 사랑해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기다리고 있을게요”라고 적혀 있었다. 가족 사랑이 끔찍하던 승민 군다운 유서였다.
2형제 중 막내인 승민 군은 딸 같은 아들이었다. 중학교 교사인 임씨가 고단한 몸으로 퇴근하면 활짝 웃으며 문을 열어주고 어깨도 주물러줬다. 춤추고 노래하며 엄마 피로를 풀어줄 때도 많았다.
임씨는 학교에서 근무하다 아들이 투신했다는 연락을 받고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왔던 그날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승민이는 흰 천에 덮인 채 아파트 단지 화단에 놓여 있었다. 여전히 따뜻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그는 소리쳤다. 아직 살아 있다고, 어서 ‘119’를 부르라고.
“하지만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더군요. 승민이가 그렇게 시신이 돼 실려 가는 걸 보는 순간 세상이 무너졌죠.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 일이 정말 벌어진 것이 맞는지…. 정신없었어요. 숨이 막혔습니다.”
병원에서 사체를 검안하면서 임씨는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아이 몸이 멍투성이였던 것이다.
“엉덩이부터 허벅지 사이에 하얀 살이 보이지 않았어요. 시퍼런 멍, 초록색 멍, 그리고 불그레한 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멍까지….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온통 멍 자국이었죠.”
비밀은 승민 군 유서를 통해 드러났다. 아이는 A4 용지 2장 앞뒤를 빽빽이 채운 글로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이유를 밝혔다.
“3월 중순에 ○○○이라는 애가 게임을 같이하자고 협박하더라고요. 제가 그때부터 컴퓨터를 많이 하게 된 거예요. 그 게임에 쓴다고 제 통장 돈까지 가져갔고,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12월 들어서 자살하자고 몇 번이나 결심했는데, 그때마다 엄마 아빠가 생각나 저를 막았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저도 정말 미치겠어요. …오늘은 12월 19일 그 녀석들이 저에게 라디오를 들게 해서 무릎을 꿇리고, 벌을 세웠어요. 또 제 몸에 칼로 자국을 새기려고 하다 실패하자 제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어요.…걔들이 나가고 난 뒤 나는 비통했어요. …저는 원래 제가 진실을 말해서 우리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만, 이제 제 인생 아니, 제 모든 것을 포기했네요. …우리 가족들 제가 이제 앞으로 없어도 제 걱정 없이 잘 살아가기를 빌게요. 저의 가족들이 행복하다면 저도 분명 행복할 거예요. …매일 맞던 시절을 끝내는 대신에 가족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부디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빌게요.”
학교와 가해자 측 적반하장 행동
아들이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니, 그것도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고통을 당해왔다니. 임 씨는 “유서를 몇 번이나 읽은 뒤에도 그 내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평소 아들과 대화가 많다고 자신했다. 유서에서 몇 번이나 가족 행복을 당부할 만큼 살가운 아들은 집에서 학교생활 얘기를 즐겨 했다.
“언제부턴가 자꾸 용돈을 더 달라고 하기에 ‘혹시 친구들이 돈을 빼앗는 거 아니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헤헤’ 웃으면서 ‘엄마, 제가 요즘 먹고 싶은 게 많아요’ 하고 애교를 부리더군요. 그 말을 믿었죠. 승민이는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힘든 티를 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유서 내용은 사실이었다. 아들 친구들은 아이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실은 승민이가 학교에서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다”고 털어놓았다. 라디오 전선줄에 목이 묶인 채 끌려다녔고, 화장실에서 물고문도 당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돈을 벌려고 폐지를 줍고 다니는 걸 봤다는 증언도 나왔다. 아파트 폐쇄회로(CC)TV를 통해 아들이 가해자로 지목한 ‘녀석들’이 무시로 그의 집을 드나든 사실도 확인했다. 유서에서 “마지막 부탁인데 우리 집 키번호 좀 바꿔주세요. 걔들이 알고 있어요”라는 호소를 읽은 임씨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당시 남편은 경북 안동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주말에만 집에 왔죠. 저는 퇴근 시간이 일정했고요. 가해자들은 집에 승민이 혼자 있는 시간을 파악하고 그때만 찾아와 아이를 괴롭힌 거예요.”
이 사건은 학교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렸다. 부모가 자녀 양육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가정의 자녀, 교우관계에 문제가 있는 아이가 피해자가 되리라는 예상과 달리 승민 군은 부부 교사와 형의 사랑아래서 자랐다. 초등학생 시절 부회장을 했을 만큼 밝고 활달했다. 그런데 왜 승민 군은 지속적인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걸까. 임씨는 “나 자신에게 수도 없이 물었던 질문”이라고 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가해자 가운데 한 명이 승민이에게 ‘나 아는 사람 중에 조직폭력배가 있다. 부모에게 말하면 너뿐 아니라 부모까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더군요.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게 아닌가 싶어요. 어린 마음에 엄마 아빠를 지키려 했던 거죠.”
임씨가 눈물을 떨어뜨린 건 이때였다.
“그렇게 ‘내가 다 지고 가자’ 결심하고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혹시 ‘이렇게 뛰어내려도 우리 엄마가 달려와 나를 구해줄 거야’ 기대하지는 않았을지….”
끝내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현실로 돌아왔다. “이 고통은 내가 평생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짐이었다.
임씨가 버텨야 하는 이유는 첫째 가족의 행복을 간절히 원하던 승민 군을 위해서고, 둘째 동생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형 때문이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큰아들은 사건 당시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신음했다. “그 자식들 내가 다 죽여버리겠다”며 병원 벽에 주먹질을 해대는 형을 품에 안고 임씨는 “너까지 잘못되면 엄마는 정말 살 수 없다. 내가 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해자들 처벌받게 하고, 승민이 명예 회복시킬 테니 엄마만 믿으라”고 통곡했다. 막내 시신 앞에서는 “다시는 너처럼 고통 받는 아이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임씨와 형을 돌보려고 승민 군 아버지는 학교를 명예 퇴직했다.
임씨는 “학교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당할 만하니까 당했지’ 하는 시선이 많다. 나는 결코 그렇게 흘러가도록 둘 수 없었다. 우리 아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걸, 이 사건 책임은 가해자에게 있다는 걸 밝혀야 했다”고 말했다. 승민 군이 피해사실을 상세히 기록한 유서를 남긴 덕분에 경찰 조사는 즉시 이뤄졌다. 하지만 이후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해자를 용서해달라는 요구가 끝없이 이어진 것이다.
“진정으로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으면서 ‘당신 자식 죽었다고 또 다른 어린애들 앞길을 가로막겠다는 거냐. 그러고도 당신이 교사냐’는 분들이 있더군요. 납득할 수 없었어요. 가해자가 처벌받는 게 억울하면 죽은 승민이는 뭐가 되는 건지…. 담임교사와 학교 측도 승민이보다 가해자들을 보호하려고 더 열심히 뛰는 것처럼 보였어요.”
조금이라도 세상 바뀌어 다행
심지어 승민 군 책상 위에 꽃을 놓고 싶다고 전화한 시민에게 학교 측이 “죽은 아이 영웅 만들 일 있느냐”고 대꾸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학교와 가해자 측 태도에 충격을 받은 임씨는 그들을 상대로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나이가 어려도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벌을 받아야 한다. 학교와 교사, 가해자 부모도 학교폭력을 막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다.
가해자에 대한 형사재판은 가해자 측이 항소를 거듭해 상고심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6월 대법원은 승민 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친구’ 2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두 달 후 민사소송도 끝났다. 지난해 8월 대구지법이 “피고인 학교법인과 교장, 담임교사, 가해자 부모는 1억3400만 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것이다. 임씨는 “재판부에서 받아들여주지 않았지만 민사소송 대상 중에는 대구시교육청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지역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제가 교육청을 상대로 소를 제기하는 걸 말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돈 욕심에 거액의 민사소송을 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대는 소리도 들었고요. 하지만 저는 승민이 앞에서, 그리고 우리 큰아들 앞에서 한 약속을 지켰을 뿐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책임지게 하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뿐이에요.”
승민 군의 안타까운 죽음과 이어진 임씨의 싸움은 정부가 학교폭력 종합대책을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제정된 이른바 ‘권승민법’이다. 임씨는 “아들 앞세운 어미가 못 할 일이 뭐 있겠느냐”며 “조금이라도 세상이 달라지고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승민 군이 세상과 작별한 바로 그 아파트에 산다. 거실에는 네 식구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있고, 승민 군 방은 아이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정리돼 있다. 임씨는 매일 아이 책상 위에 놓인 영정 앞에 촛불을 켜고 기도하고, 출퇴근할 때마다 인사를 건넨다.
2월 25일은 살아 있었다면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막내의 15번째 생일이다. 승민 군 죽음 이후 모든 일을 쉰 채 가정만 돌보던 아버지는 이날부터 EBS 라디오에서 청소년 고민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임씨는 “우리 가족 모두 여전히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고통에 시달리지만 열심히 버티고 있다. 승민이를 다시 만나는 날 ‘우리가 네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며 “다시는 우리 아들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폭력이 사라지게 하는 데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할 것”이라고 했다.
“제가 잘 지내는 게 승민이를 위한 거라고 믿어요. 이 자리에서 절대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버틸 거예요. 다시 승민이를 만날 때까지.”
유서 통해 드러난 끔찍한 괴롭힘
그는 자식을 잃은 어미다. 2011년 12월 중학교 2학년생이던 그의 아들 권승민 군은 ‘친구’를 가장한 동급생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집 베란다 밖으로 몸을 던졌다. 유서에는 “죄송해요 엄마. 사랑해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기다리고 있을게요”라고 적혀 있었다. 가족 사랑이 끔찍하던 승민 군다운 유서였다.
2형제 중 막내인 승민 군은 딸 같은 아들이었다. 중학교 교사인 임씨가 고단한 몸으로 퇴근하면 활짝 웃으며 문을 열어주고 어깨도 주물러줬다. 춤추고 노래하며 엄마 피로를 풀어줄 때도 많았다.
임씨는 학교에서 근무하다 아들이 투신했다는 연락을 받고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왔던 그날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승민이는 흰 천에 덮인 채 아파트 단지 화단에 놓여 있었다. 여전히 따뜻한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그는 소리쳤다. 아직 살아 있다고, 어서 ‘119’를 부르라고.
“하지만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더군요. 승민이가 그렇게 시신이 돼 실려 가는 걸 보는 순간 세상이 무너졌죠.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 일이 정말 벌어진 것이 맞는지…. 정신없었어요. 숨이 막혔습니다.”
병원에서 사체를 검안하면서 임씨는 또 한 번 충격에 빠졌다. 아이 몸이 멍투성이였던 것이다.
“엉덩이부터 허벅지 사이에 하얀 살이 보이지 않았어요. 시퍼런 멍, 초록색 멍, 그리고 불그레한 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멍까지….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온통 멍 자국이었죠.”
비밀은 승민 군 유서를 통해 드러났다. 아이는 A4 용지 2장 앞뒤를 빽빽이 채운 글로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이유를 밝혔다.
“3월 중순에 ○○○이라는 애가 게임을 같이하자고 협박하더라고요. 제가 그때부터 컴퓨터를 많이 하게 된 거예요. 그 게임에 쓴다고 제 통장 돈까지 가져갔고,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12월 들어서 자살하자고 몇 번이나 결심했는데, 그때마다 엄마 아빠가 생각나 저를 막았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저도 정말 미치겠어요. …오늘은 12월 19일 그 녀석들이 저에게 라디오를 들게 해서 무릎을 꿇리고, 벌을 세웠어요. 또 제 몸에 칼로 자국을 새기려고 하다 실패하자 제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어요.…걔들이 나가고 난 뒤 나는 비통했어요. …저는 원래 제가 진실을 말해서 우리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만, 이제 제 인생 아니, 제 모든 것을 포기했네요. …우리 가족들 제가 이제 앞으로 없어도 제 걱정 없이 잘 살아가기를 빌게요. 저의 가족들이 행복하다면 저도 분명 행복할 거예요. …매일 맞던 시절을 끝내는 대신에 가족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부디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빌게요.”
학교와 가해자 측 적반하장 행동
아들이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니, 그것도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고통을 당해왔다니. 임 씨는 “유서를 몇 번이나 읽은 뒤에도 그 내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평소 아들과 대화가 많다고 자신했다. 유서에서 몇 번이나 가족 행복을 당부할 만큼 살가운 아들은 집에서 학교생활 얘기를 즐겨 했다.
“언제부턴가 자꾸 용돈을 더 달라고 하기에 ‘혹시 친구들이 돈을 빼앗는 거 아니냐’고 물어본 적도 있어요. ‘헤헤’ 웃으면서 ‘엄마, 제가 요즘 먹고 싶은 게 많아요’ 하고 애교를 부리더군요. 그 말을 믿었죠. 승민이는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힘든 티를 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유서 내용은 사실이었다. 아들 친구들은 아이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실은 승민이가 학교에서 오랫동안 괴롭힘을 당했다”고 털어놓았다. 라디오 전선줄에 목이 묶인 채 끌려다녔고, 화장실에서 물고문도 당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돈을 벌려고 폐지를 줍고 다니는 걸 봤다는 증언도 나왔다. 아파트 폐쇄회로(CC)TV를 통해 아들이 가해자로 지목한 ‘녀석들’이 무시로 그의 집을 드나든 사실도 확인했다. 유서에서 “마지막 부탁인데 우리 집 키번호 좀 바꿔주세요. 걔들이 알고 있어요”라는 호소를 읽은 임씨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당시 남편은 경북 안동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주말에만 집에 왔죠. 저는 퇴근 시간이 일정했고요. 가해자들은 집에 승민이 혼자 있는 시간을 파악하고 그때만 찾아와 아이를 괴롭힌 거예요.”
이 사건은 학교폭력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렸다. 부모가 자녀 양육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가정의 자녀, 교우관계에 문제가 있는 아이가 피해자가 되리라는 예상과 달리 승민 군은 부부 교사와 형의 사랑아래서 자랐다. 초등학생 시절 부회장을 했을 만큼 밝고 활달했다. 그런데 왜 승민 군은 지속적인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걸까. 임씨는 “나 자신에게 수도 없이 물었던 질문”이라고 했다.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가해자 가운데 한 명이 승민이에게 ‘나 아는 사람 중에 조직폭력배가 있다. 부모에게 말하면 너뿐 아니라 부모까지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더군요.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게 아닌가 싶어요. 어린 마음에 엄마 아빠를 지키려 했던 거죠.”
임씨가 눈물을 떨어뜨린 건 이때였다.
“그렇게 ‘내가 다 지고 가자’ 결심하고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혹시 ‘이렇게 뛰어내려도 우리 엄마가 달려와 나를 구해줄 거야’ 기대하지는 않았을지….”
끝내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현실로 돌아왔다. “이 고통은 내가 평생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짐이었다.
승민 군이 생전 사용하던 책상 위에 놓인 영정 사진.
임씨는 “학교폭력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당할 만하니까 당했지’ 하는 시선이 많다. 나는 결코 그렇게 흘러가도록 둘 수 없었다. 우리 아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걸, 이 사건 책임은 가해자에게 있다는 걸 밝혀야 했다”고 말했다. 승민 군이 피해사실을 상세히 기록한 유서를 남긴 덕분에 경찰 조사는 즉시 이뤄졌다. 하지만 이후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해자를 용서해달라는 요구가 끝없이 이어진 것이다.
“진정으로 반성하거나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으면서 ‘당신 자식 죽었다고 또 다른 어린애들 앞길을 가로막겠다는 거냐. 그러고도 당신이 교사냐’는 분들이 있더군요. 납득할 수 없었어요. 가해자가 처벌받는 게 억울하면 죽은 승민이는 뭐가 되는 건지…. 담임교사와 학교 측도 승민이보다 가해자들을 보호하려고 더 열심히 뛰는 것처럼 보였어요.”
조금이라도 세상 바뀌어 다행
심지어 승민 군 책상 위에 꽃을 놓고 싶다고 전화한 시민에게 학교 측이 “죽은 아이 영웅 만들 일 있느냐”고 대꾸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학교와 가해자 측 태도에 충격을 받은 임씨는 그들을 상대로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나이가 어려도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벌을 받아야 한다. 학교와 교사, 가해자 부모도 학교폭력을 막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다.
가해자에 대한 형사재판은 가해자 측이 항소를 거듭해 상고심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6월 대법원은 승민 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친구’ 2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두 달 후 민사소송도 끝났다. 지난해 8월 대구지법이 “피고인 학교법인과 교장, 담임교사, 가해자 부모는 1억3400만 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것이다. 임씨는 “재판부에서 받아들여주지 않았지만 민사소송 대상 중에는 대구시교육청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지역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제가 교육청을 상대로 소를 제기하는 걸 말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돈 욕심에 거액의 민사소송을 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대는 소리도 들었고요. 하지만 저는 승민이 앞에서, 그리고 우리 큰아들 앞에서 한 약속을 지켰을 뿐입니다. ‘잘못한 사람이 책임지게 하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뿐이에요.”
승민 군의 안타까운 죽음과 이어진 임씨의 싸움은 정부가 학교폭력 종합대책을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제정된 이른바 ‘권승민법’이다. 임씨는 “아들 앞세운 어미가 못 할 일이 뭐 있겠느냐”며 “조금이라도 세상이 달라지고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승민 군이 세상과 작별한 바로 그 아파트에 산다. 거실에는 네 식구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있고, 승민 군 방은 아이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정리돼 있다. 임씨는 매일 아이 책상 위에 놓인 영정 앞에 촛불을 켜고 기도하고, 출퇴근할 때마다 인사를 건넨다.
2월 25일은 살아 있었다면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막내의 15번째 생일이다. 승민 군 죽음 이후 모든 일을 쉰 채 가정만 돌보던 아버지는 이날부터 EBS 라디오에서 청소년 고민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로 했다. 임씨는 “우리 가족 모두 여전히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고통에 시달리지만 열심히 버티고 있다. 승민이를 다시 만나는 날 ‘우리가 네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며 “다시는 우리 아들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폭력이 사라지게 하는 데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