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콤플렉스 가운데 유독 내 눈길을 잡아끄는 콤플렉스가 있다. 바로 온달콤플렉스다. 온달 콤플렉스는 ‘남성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여성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심적 의존 상태’라고 한다. 말하자면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남성 버전인 셈인데, 온달과 평강공주가 자신들의 캐릭터가 이런 방식으로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면 기절초풍하지 않을까.
온달이 평강공주와 결혼해 얻은 것은 과연 ‘출세’일까, 경제적 안정일까, 왕의 사위가 되는 영광이었을까. 그럼 공주 자리를 박차고 궁궐을 나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바보 온달’과 진짜 결혼을 해버린 평강공주의 용기는 뭐가 되는가. 나에게 평강공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안락한 운명을 버리고 더 큰 모험을 찾아 떠난 아름다운 여전사 자체다. 나는 ‘온달전’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느끼는데, 그것은 주어진 운명에 맞서 ‘나만의 운명’을 창조한 사람을 향한 경의다.
‘삼국사기’ 속 ‘온달전’에서 온달은 이렇게 묘사된다. 얼굴은 울퉁불퉁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아름다웠다고. 평강공주는 어려서부터 울보여서 왕이 농담 삼아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늘 울어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 아내는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공주가 열여섯 살이 돼 아버지가 ‘약속과 달리’ 귀족 가문의 아들과 혼인시키려 들자 드디어 평강공주의 반란이 시작된다.
“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다’고 하시더니,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려 하십니까? 평민도 거짓말을 안 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지존께서 거짓말을 하셔야 되겠습니까?”
왕의 애정 어린 ‘유머’에 공주가 ‘다큐’로 화답한 셈인데, 과연 공주가 아버지의 반어적 애정을 정말로 이해하지 못해서였을까. 그녀의 말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듯한 날카로운 분노가 서려 있다. 바로 이 대목이다. “평민도 거짓말을 안 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지존께서 거짓말을 하셔야 되겠습니까?” 왕이 격노한 지점도 바로 여기일 것이다. 지존인 왕을 감히 평민과 비교하다니. 하늘같은 국왕이자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다니.
여성의 삶에 저항 ‘모험의 길’ 선택
그러나 공주로서는 왕의 언어, 아버지의 언어, 남성의 언어로 이뤄진 이 세계 매트릭스가 답답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왕의 식언(食言), 말하자면 ‘통치자의 습관적인 거짓말’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결혼을 기화로 왕의 통치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은 아닐까. 이는 관습으로 굳은 왕실의 정략결혼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여성 삶에 대한 저항이었다. 분노한 아버지에게 내쫓긴 공주는 패물을 챙겨 궁궐을 홀로 나선다.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한 사람처럼,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처럼 누구도 꿈꾸지 않았던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이어서 공주가 온달 어머니와 온달에게 직접 청혼하는 일도 놀랍지만, 온달과 눈먼 노모의 반응 또한 흥미롭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누추하니, 귀한 분이 가까이할 바가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남다르고,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마치 솜과 같습니다. 반드시 귀한 사람일 텐데, 누구에게 속아서 이곳에 왔습니까? 내 아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됐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온달은 한 술 더 떠 평강공주를 귀신 취급한다. “이곳은 어린 여자가 다니는 곳이 아니니, 너는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고 귀신일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마라.” 온달과 노모는 이렇게 저절로 굴러들어온 엄청난 행운을 거절할 뿐 아니라, 평강공주를 야멸치게 내치기까지 한다. 온달은 처음부터 분수를 넘은 출세도, 운명을 뛰어넘은 영광도 원치 않은 것이다.
이런 온달을 어떻게 ‘온달 콤플렉스’의 원조 격으로 끌어내릴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공주는 굴하지 않는다. 공주는 자신을 매몰차게 거절한 온달의 뒤를 따라가 그 누추한 집의 사립문 밑에서 한뎃잠을 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청혼프로젝트에 도전한다. 또다시 자신을 거절하는 완강한 온달 모자를 향해 공주는 역사에 길이 남을 감동의 프레젠테이션을 펼친다.
“옛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만 있어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만 있어도 바느질을 할 수 있다’ 했으니, 마음만 맞으면 되지 부귀한 뒤에라야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삼고초려해 마침내 결혼에 골인한 것이다. 그녀는 패물을 몽땅 팔아 살림을 장만하고, 혜안을 발휘해 ‘임금이 타던 말(馬) 가운데 병들고 여위어 내버린 것’을 온달로 하여금 사오게 해 준마로 키우는 데 성공한다. 나무껍질을 벗겨 연명하던 온달을 온갖 무예와 뛰어난 전술을 갖춘 위대한 전사로 만든 것도 공주의 지혜와 용맹이었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이면 낙랑 언덕에 모여 집단으로 사냥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왕과 신하, 군사가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그동안 공주와 함께 갈고 닦은 온달의 무예가 드디어 빛을 발한다. 그제야 왕은 그가 온달임을 알아챈다. 전쟁이 일어나자 온달은 선봉에 서서 용맹스럽게 싸워 큰 전공을 세우고, 왕은 비로소 온달을 인정해 받아들인다. “이 사람은 내 사위다.” 이 짧은 문장에는 잃어버린 딸을 되찾은 왕의 기쁨, 가난하고 미천하다는 이유로 그를 바보 취급했던 과오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딸의 반항을 무시한 채 그녀를 내쳤던 과거에 대한 뼈아픈 회한이 녹아 있다.
세상 편 가르는 이분법에 맞서
미천한 바보 온달을 훌륭한 장군으로 키운 것은 평강공주였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가장 위험한 전쟁터에 자원한 것은 온달 자신이었다.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전쟁터로 떠난 온달은 신라군 화살에 맞아 중도에서 죽고 만다. 온달 시신을 거둬 장사를 지내려 하니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됐으니 마음 놓고 돌아가소서.” 마치 아내의 마지막 인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드디어 온달의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나에게 평강공주는 세상 바깥에서 세상 안쪽을 ‘넘보기만’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발견한 사람이다. 세상 바깥에서 세상 안쪽을 바꾼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것은 그녀가 공주였기 때문이 아니라 공주를 넘어선 삶을, 여성의 운명을 넘어선 삶을 꿈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 안쪽의 부귀영화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 바깥의 싸움으로 자신을 날카롭게 벼린 사람. 그녀가 내던진 것은 단지 공주 자리가 아니라, ‘내 운명을 아버지가 결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것이 최고 명예였던 시절, 그녀는 남편을 출세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운명의 덫을 피하지 않고 운명과 싸우는 인간의 길 위로 내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라를 지키는 힘은 왕후장상 DNA를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의 용기와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평강공주는 평민과 귀족의 구분을,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생과 사의 구분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을, 사랑을, 꿈을 지켜냈다.
사진 제공·한국삐아제 ‘바보온달’
온달이 평강공주와 결혼해 얻은 것은 과연 ‘출세’일까, 경제적 안정일까, 왕의 사위가 되는 영광이었을까. 그럼 공주 자리를 박차고 궁궐을 나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바보 온달’과 진짜 결혼을 해버린 평강공주의 용기는 뭐가 되는가. 나에게 평강공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안락한 운명을 버리고 더 큰 모험을 찾아 떠난 아름다운 여전사 자체다. 나는 ‘온달전’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느끼는데, 그것은 주어진 운명에 맞서 ‘나만의 운명’을 창조한 사람을 향한 경의다.
‘삼국사기’ 속 ‘온달전’에서 온달은 이렇게 묘사된다. 얼굴은 울퉁불퉁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아름다웠다고. 평강공주는 어려서부터 울보여서 왕이 농담 삼아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늘 울어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 아내는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 공주가 열여섯 살이 돼 아버지가 ‘약속과 달리’ 귀족 가문의 아들과 혼인시키려 들자 드디어 평강공주의 반란이 시작된다.
“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다’고 하시더니,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려 하십니까? 평민도 거짓말을 안 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지존께서 거짓말을 하셔야 되겠습니까?”
왕의 애정 어린 ‘유머’에 공주가 ‘다큐’로 화답한 셈인데, 과연 공주가 아버지의 반어적 애정을 정말로 이해하지 못해서였을까. 그녀의 말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듯한 날카로운 분노가 서려 있다. 바로 이 대목이다. “평민도 거짓말을 안 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지존께서 거짓말을 하셔야 되겠습니까?” 왕이 격노한 지점도 바로 여기일 것이다. 지존인 왕을 감히 평민과 비교하다니. 하늘같은 국왕이자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다니.
여성의 삶에 저항 ‘모험의 길’ 선택
그러나 공주로서는 왕의 언어, 아버지의 언어, 남성의 언어로 이뤄진 이 세계 매트릭스가 답답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왕의 식언(食言), 말하자면 ‘통치자의 습관적인 거짓말’을 정면으로 겨냥한 것이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결혼을 기화로 왕의 통치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은 아닐까. 이는 관습으로 굳은 왕실의 정략결혼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여성 삶에 대한 저항이었다. 분노한 아버지에게 내쫓긴 공주는 패물을 챙겨 궁궐을 홀로 나선다.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한 사람처럼,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처럼 누구도 꿈꾸지 않았던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이어서 공주가 온달 어머니와 온달에게 직접 청혼하는 일도 놀랍지만, 온달과 눈먼 노모의 반응 또한 흥미롭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누추하니, 귀한 분이 가까이할 바가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남다르고,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마치 솜과 같습니다. 반드시 귀한 사람일 텐데, 누구에게 속아서 이곳에 왔습니까? 내 아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됐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온달은 한 술 더 떠 평강공주를 귀신 취급한다. “이곳은 어린 여자가 다니는 곳이 아니니, 너는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고 귀신일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마라.” 온달과 노모는 이렇게 저절로 굴러들어온 엄청난 행운을 거절할 뿐 아니라, 평강공주를 야멸치게 내치기까지 한다. 온달은 처음부터 분수를 넘은 출세도, 운명을 뛰어넘은 영광도 원치 않은 것이다.
이런 온달을 어떻게 ‘온달 콤플렉스’의 원조 격으로 끌어내릴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공주는 굴하지 않는다. 공주는 자신을 매몰차게 거절한 온달의 뒤를 따라가 그 누추한 집의 사립문 밑에서 한뎃잠을 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청혼프로젝트에 도전한다. 또다시 자신을 거절하는 완강한 온달 모자를 향해 공주는 역사에 길이 남을 감동의 프레젠테이션을 펼친다.
“옛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만 있어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만 있어도 바느질을 할 수 있다’ 했으니, 마음만 맞으면 되지 부귀한 뒤에라야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을 삼고초려해 마침내 결혼에 골인한 것이다. 그녀는 패물을 몽땅 팔아 살림을 장만하고, 혜안을 발휘해 ‘임금이 타던 말(馬) 가운데 병들고 여위어 내버린 것’을 온달로 하여금 사오게 해 준마로 키우는 데 성공한다. 나무껍질을 벗겨 연명하던 온달을 온갖 무예와 뛰어난 전술을 갖춘 위대한 전사로 만든 것도 공주의 지혜와 용맹이었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이면 낙랑 언덕에 모여 집단으로 사냥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왕과 신하, 군사가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그동안 공주와 함께 갈고 닦은 온달의 무예가 드디어 빛을 발한다. 그제야 왕은 그가 온달임을 알아챈다. 전쟁이 일어나자 온달은 선봉에 서서 용맹스럽게 싸워 큰 전공을 세우고, 왕은 비로소 온달을 인정해 받아들인다. “이 사람은 내 사위다.” 이 짧은 문장에는 잃어버린 딸을 되찾은 왕의 기쁨, 가난하고 미천하다는 이유로 그를 바보 취급했던 과오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딸의 반항을 무시한 채 그녀를 내쳤던 과거에 대한 뼈아픈 회한이 녹아 있다.
세상 편 가르는 이분법에 맞서
미천한 바보 온달을 훌륭한 장군으로 키운 것은 평강공주였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가장 위험한 전쟁터에 자원한 것은 온달 자신이었다.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전쟁터로 떠난 온달은 신라군 화살에 맞아 중도에서 죽고 만다. 온달 시신을 거둬 장사를 지내려 하니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됐으니 마음 놓고 돌아가소서.” 마치 아내의 마지막 인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드디어 온달의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나에게 평강공주는 세상 바깥에서 세상 안쪽을 ‘넘보기만’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 바깥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발견한 사람이다. 세상 바깥에서 세상 안쪽을 바꾼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것은 그녀가 공주였기 때문이 아니라 공주를 넘어선 삶을, 여성의 운명을 넘어선 삶을 꿈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 안쪽의 부귀영화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 바깥의 싸움으로 자신을 날카롭게 벼린 사람. 그녀가 내던진 것은 단지 공주 자리가 아니라, ‘내 운명을 아버지가 결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것이 최고 명예였던 시절, 그녀는 남편을 출세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운명의 덫을 피하지 않고 운명과 싸우는 인간의 길 위로 내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라를 지키는 힘은 왕후장상 DNA를 가진 사람만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의 용기와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평강공주는 평민과 귀족의 구분을,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생과 사의 구분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을, 사랑을, 꿈을 지켜냈다.
사진 제공·한국삐아제 ‘바보온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