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맵싸한 추위가 제법 얼굴을 할퀴던 12월 15일 오후, 서울 도곡동 한 건물에서 조촐한 규모의 공연이 개최됐다. 참석자 1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이날 공연 주제는 ‘한민족 전통문화 예술과 화합을 위한 축제’. 언뜻 보면 여느 문화예술단체 행사 같은 분위기였지만, 범패와 승무가 등장하고 ‘금오사 생활교육 전통문화원’이 주관하는 불교식 산사음악회였다. 이 행사를 기획, 진행한 오소운(50) 씨는 “금오사 서봉 큰스님의 생활불교 철학을 여러 사람과 나누기 위해 마련한 음악회”라고 소개했다.
스님이나 사찰이 아닌, 신도들이 주최가 된 산사음악회라는 점도 특이하거니와 신도들 스스로가 널찍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기금행사라는 점도 이색적이었다. 신도들을 이렇게 움직이게 한 배후인물인 금오사 서봉(73) 주지스님은 누구일까.
기복신앙이 아닌 베푸는 생활신앙
경기 시흥의 한 건물 5층에 자리한 ‘금오사’가 아닌, 서해가 코앞에 내려다보이는 안산 대부도의 한 단독주택에서 서봉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스님은 이곳에 기거하며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이면서, 일요법회와 동지나 초하루 등 불교행사 때 시흥 포교당인 금오사로 출퇴근한다고 했다. 인사를 악수로 건네는 스님의 손을 잡으니 농사일을 오랫동안 해온 듯 투박하고 거친 느낌이 들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한국으로 들어온 지 5년 정도 됐으니까, 농사일한 지는 5년밖에 안 돼요. 1000평(약 3300㎡) 정도 되는 땅을 빌려 주로 포도농사를 짓고 더불어 채소, 약초 등을 길러 먹고 있죠. 제가 짓는 대부도 포도가 유명해 직접 포도를 사러 오는 고객도 제법 있어요.”
스님은 일요법회 때면 이곳에서 난 상추, 호박 같은 유기농 채소들을 거둬 금오사로 가지고 가는데, 신도들이 가져온 쌀로 밥을 지어먹는 즐거움이 남다르다고 한다. 스님이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니 신도들에게 부담 줄 일도 없다. 신도들로서는 한 달에 2만 원가량의 회비로 포교당 사무실 운영비만 내면 되는 셈이다.
“어느 종교든 종교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어야 해요. 기독교의 사랑이나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 모두 ‘무한한 베풂’을 바탕에 깔고 있죠. 스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스님은 신도들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베푸는 존재가 돼야 해요.”
금오사 신도인 오소운 씨는 스님은 일요법회 때 ‘화엄경’을 강의하는데, 화엄경 책값이 비싸 신도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어 아예 슬라이드 자료를 준비해 빔으로 쏴가면서 강의를 한다고 귀띔했다. 법회에는 비단 불교경전뿐 아니라, 삶의 지혜에 대해 얘기하는 여러 장르의 책을 교재로 채택한다고 한다. 현재는 임승혁 물리학박사가 진행하는 ‘주역’ 공부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불교신도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소문 반, 호기심 반으로 강의를 들으러 찾아온다. 다른 종교와 갈등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서로 소통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게 서봉스님의 평소 지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금오사 포교당은 뜻하지 않은 문제에 부딪쳤다. 현재 포교당 규모로는 공부 환경이나 수행 여건상 찾아오는 사람을 감당할 수 없어, 신도들이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려고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 이것이 음악회를 연 간접적인 이유란다.
서봉스님은 법회 때마다 기복신앙이 아닌 일상 자체가 수행인 생활신앙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바라는 게 너무 많아요. 부처님이나 산신 같은 신성(神聖)들이 그 요구를 다 들어주다 보면 아마 지구가 남아나질 않을 거예요. 기복은 기본적으로 욕망에서 비롯하고, 욕망이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법이죠. 밑 없는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격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도들에게 욕심을 내는 법이 아닌, 마음을 잘 써서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늘 말해요. 불행은 늘 바라는 것(望)과 함께하므로, 오히려 베푸는 마음을 쓰면 사람이 행복해지고 먹고사는 문제도 저절로 잘 풀리죠. 실제로 해보세요. 제 말이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서봉스님은 사람에게는 행운이니 불운이니 하는 운(運)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 역시 자신이 어떤 마음을 써서 살아왔느냐에 대한 결과적 작용이라고 말한다. 베푸는 마음, 즉 동양철학적 용어로는 상생(相生)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왔을 때 그에 맞는 파장이 ‘행운’이란 이름으로 찾아오고, 남을 원망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마음, 즉 상극(相剋)의 정신으로 살아왔을 때 ‘불운’이란 이름의 파장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9세에 출가 독특한 이력의 삶
“저는 이 모든 것을 생활 속에서 살아오면서 깨달았어요. 사람의 삶이란 게 도대체 뭔지 알고 싶어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도 죄 뒤져봤으며, 젊은 시절엔 계룡산 토굴에 들어가 수년간 수행도 해봤죠. 결국 나이 70 넘어 뒤늦게 철들어 깨달은 것은 단 하나, ‘마음을 잘 써야 잘 산다’는 거예요.”
서봉스님의 이력이 참 독특하기는 하다. 충남 성주 출신인 서봉스님은 서당을 운영하던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9세 때 수덕사로 출가했다. 재인박명(才人薄命)이라 했던가, 당시 수덕사 큰스님이 어린 천재소년을 보고 이대로 두면 명이 짧으니 절밥을 먹이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실제 서봉스님은 수덕사로 출가한 뒤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7일간 죽음 상태로 있다 기적적으로 깨어났다고 한다. 이후 수덕사에서 계를 받고 17세 때 ‘주역’을 깨치는 등 공부와 수행에 정진했다. 그러다 1970년 태고종 종정으로 취임한 박대륜 스님을 따라 태고종으로 이적한 서봉스님은 서울 동대문에 있던 유서 깊은 사찰 약사암 주지와 태고종 고위직을 맡는 등 포교활동을 했고, 세상을 더 알고 싶어 198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것.
“제가 젊은 시절에는 잘난 척을 참 많이 했어요. 몸 공부든, 마음 공부든 뭘 해도 지기 싫어했어요. 호승심에 봉술, 검도, 합기도 등 무술을 배웠는데 모두 합치면 한 30단 정도 돼요. 또 수행하는 동안 인체구조를 알고 싶어 한의학과 약초 공부를 했고, 미국에서 한의학 박사학위까지 땄어요. 미국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면서도 제 생활비는 식당일, 육체노동을 통해 해결했고 한약 처방을 해주고 용돈도 벌었죠. 그렇게 미국에서 세금을 내면서 일하니까 시민권도 나오고, 연금 자격도 주어지더군요.”
미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힐 무렵, 서봉스님은 훌훌 털고 한국으로 왔다. 미국에서의 연을 끊으려고 연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삶의 고민을 안고 사는 것은 똑같다는 사실을 알았고, 여생은 한국에서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서봉스님에게는 문무를 겸비한 선비의 풍모가 보이면서도 언뜻언뜻 도인(道人)의 면모가 드러나기도 했다. 기자가 도교 주문(呪文) 수행에 대한 체험담을 꺼내자 그 깊이와 주의할 점까지 세세히 짚어줬다. 그것은 수행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말해줄 수 없는 경계였다.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놔두면 삼라만상도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이요, 지혜예요.”
서봉스님은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미소, 따뜻한 말 한마디가 보내는 파장의 위대함을 강조했다. 자신에게서 그러한 파장이 나갈 때, 그 파장이 더 확대돼 자신에게 베풂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유불선 성자들의 가르침이 여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스님이나 사찰이 아닌, 신도들이 주최가 된 산사음악회라는 점도 특이하거니와 신도들 스스로가 널찍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기금행사라는 점도 이색적이었다. 신도들을 이렇게 움직이게 한 배후인물인 금오사 서봉(73) 주지스님은 누구일까.
기복신앙이 아닌 베푸는 생활신앙
경기 시흥의 한 건물 5층에 자리한 ‘금오사’가 아닌, 서해가 코앞에 내려다보이는 안산 대부도의 한 단독주택에서 서봉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스님은 이곳에 기거하며 포도농사를 짓는 농부이면서, 일요법회와 동지나 초하루 등 불교행사 때 시흥 포교당인 금오사로 출퇴근한다고 했다. 인사를 악수로 건네는 스님의 손을 잡으니 농사일을 오랫동안 해온 듯 투박하고 거친 느낌이 들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한국으로 들어온 지 5년 정도 됐으니까, 농사일한 지는 5년밖에 안 돼요. 1000평(약 3300㎡) 정도 되는 땅을 빌려 주로 포도농사를 짓고 더불어 채소, 약초 등을 길러 먹고 있죠. 제가 짓는 대부도 포도가 유명해 직접 포도를 사러 오는 고객도 제법 있어요.”
스님은 일요법회 때면 이곳에서 난 상추, 호박 같은 유기농 채소들을 거둬 금오사로 가지고 가는데, 신도들이 가져온 쌀로 밥을 지어먹는 즐거움이 남다르다고 한다. 스님이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니 신도들에게 부담 줄 일도 없다. 신도들로서는 한 달에 2만 원가량의 회비로 포교당 사무실 운영비만 내면 되는 셈이다.
“어느 종교든 종교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어야 해요. 기독교의 사랑이나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 모두 ‘무한한 베풂’을 바탕에 깔고 있죠. 스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스님은 신도들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베푸는 존재가 돼야 해요.”
금오사 신도인 오소운 씨는 스님은 일요법회 때 ‘화엄경’을 강의하는데, 화엄경 책값이 비싸 신도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어 아예 슬라이드 자료를 준비해 빔으로 쏴가면서 강의를 한다고 귀띔했다. 법회에는 비단 불교경전뿐 아니라, 삶의 지혜에 대해 얘기하는 여러 장르의 책을 교재로 채택한다고 한다. 현재는 임승혁 물리학박사가 진행하는 ‘주역’ 공부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불교신도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소문 반, 호기심 반으로 강의를 들으러 찾아온다. 다른 종교와 갈등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서로 소통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게 서봉스님의 평소 지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금오사 포교당은 뜻하지 않은 문제에 부딪쳤다. 현재 포교당 규모로는 공부 환경이나 수행 여건상 찾아오는 사람을 감당할 수 없어, 신도들이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려고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 이것이 음악회를 연 간접적인 이유란다.
서봉스님은 법회 때마다 기복신앙이 아닌 일상 자체가 수행인 생활신앙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바라는 게 너무 많아요. 부처님이나 산신 같은 신성(神聖)들이 그 요구를 다 들어주다 보면 아마 지구가 남아나질 않을 거예요. 기복은 기본적으로 욕망에서 비롯하고, 욕망이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법이죠. 밑 없는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격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도들에게 욕심을 내는 법이 아닌, 마음을 잘 써서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늘 말해요. 불행은 늘 바라는 것(望)과 함께하므로, 오히려 베푸는 마음을 쓰면 사람이 행복해지고 먹고사는 문제도 저절로 잘 풀리죠. 실제로 해보세요. 제 말이 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서봉스님은 사람에게는 행운이니 불운이니 하는 운(運)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 역시 자신이 어떤 마음을 써서 살아왔느냐에 대한 결과적 작용이라고 말한다. 베푸는 마음, 즉 동양철학적 용어로는 상생(相生)의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왔을 때 그에 맞는 파장이 ‘행운’이란 이름으로 찾아오고, 남을 원망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마음, 즉 상극(相剋)의 정신으로 살아왔을 때 ‘불운’이란 이름의 파장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9세에 출가 독특한 이력의 삶
“저는 이 모든 것을 생활 속에서 살아오면서 깨달았어요. 사람의 삶이란 게 도대체 뭔지 알고 싶어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도 죄 뒤져봤으며, 젊은 시절엔 계룡산 토굴에 들어가 수년간 수행도 해봤죠. 결국 나이 70 넘어 뒤늦게 철들어 깨달은 것은 단 하나, ‘마음을 잘 써야 잘 산다’는 거예요.”
서봉스님의 이력이 참 독특하기는 하다. 충남 성주 출신인 서봉스님은 서당을 운영하던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9세 때 수덕사로 출가했다. 재인박명(才人薄命)이라 했던가, 당시 수덕사 큰스님이 어린 천재소년을 보고 이대로 두면 명이 짧으니 절밥을 먹이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실제 서봉스님은 수덕사로 출가한 뒤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7일간 죽음 상태로 있다 기적적으로 깨어났다고 한다. 이후 수덕사에서 계를 받고 17세 때 ‘주역’을 깨치는 등 공부와 수행에 정진했다. 그러다 1970년 태고종 종정으로 취임한 박대륜 스님을 따라 태고종으로 이적한 서봉스님은 서울 동대문에 있던 유서 깊은 사찰 약사암 주지와 태고종 고위직을 맡는 등 포교활동을 했고, 세상을 더 알고 싶어 198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것.
“제가 젊은 시절에는 잘난 척을 참 많이 했어요. 몸 공부든, 마음 공부든 뭘 해도 지기 싫어했어요. 호승심에 봉술, 검도, 합기도 등 무술을 배웠는데 모두 합치면 한 30단 정도 돼요. 또 수행하는 동안 인체구조를 알고 싶어 한의학과 약초 공부를 했고, 미국에서 한의학 박사학위까지 땄어요. 미국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면서도 제 생활비는 식당일, 육체노동을 통해 해결했고 한약 처방을 해주고 용돈도 벌었죠. 그렇게 미국에서 세금을 내면서 일하니까 시민권도 나오고, 연금 자격도 주어지더군요.”
미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힐 무렵, 서봉스님은 훌훌 털고 한국으로 왔다. 미국에서의 연을 끊으려고 연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삶의 고민을 안고 사는 것은 똑같다는 사실을 알았고, 여생은 한국에서 보람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서봉스님에게는 문무를 겸비한 선비의 풍모가 보이면서도 언뜻언뜻 도인(道人)의 면모가 드러나기도 했다. 기자가 도교 주문(呪文) 수행에 대한 체험담을 꺼내자 그 깊이와 주의할 점까지 세세히 짚어줬다. 그것은 수행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말해줄 수 없는 경계였다.
“마음을 내려놓으세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놔두면 삼라만상도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이요, 지혜예요.”
서봉스님은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미소, 따뜻한 말 한마디가 보내는 파장의 위대함을 강조했다. 자신에게서 그러한 파장이 나갈 때, 그 파장이 더 확대돼 자신에게 베풂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유불선 성자들의 가르침이 여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