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컬렉션이 끝난 직후라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고 싶은데, 일을 벗어날 수 없도록 상황이 돌아가네요. 제 컬렉션을 보고 구매 의사를 밝힌 바이어와 회의도 있고, 주문에 맞춰 처리할 일도 많아요. 지난 시즌부터는 제 피부에 확 와닿을 만큼 고객의 반응이 달라졌어요. 국내외에서 러브콜이 들어오고, 매출액도 늘어났죠.”
서울컬렉션 일주일 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칼 이석태(KAAL E.SUKTAE)’ 쇼룸에서 이석태 디자이너와 마주 앉았다. 무척 피곤하다면서도 어딘가 기분 좋은 개운함이 느껴진다. 이석태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여성복은 무대가 아니고서는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옷이다. 프랑스 파리의 ‘레클뢰르(L’ECLAIREUR)’, 홍콩의 ‘조이스(JOYCE)’, 미국의 ‘오프닝 세리머니(Opening Ceremony)’ 같은 해외 편집매장에서만 구할 수 있다. 이 매장들은 세계를 통틀어 특징 있는 브랜드나 디자이너의 컬렉션을 한데 모아놓은 패션몰로,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당 도시를 찾을 때마다 첫 번째로 방문하는 명소다.
“제 옷을 구매하는 고객층으로 패션뿐 아니라 예술이나 문화에 깨어 있는, 다소 실험적인 경향을 지닌 사람들을 염두에 뒀어요. 지금 제 브랜드가 들어간 매장들은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 제가 세운 고객층 목표가 적중했다고 할 수 있죠.”
세계인 감각 자극하는 열정
이 디자이너는 건국대에서 의상학을 전공한 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파리의상조합학교’와 ‘스튜디오 베르소’에서 공부했다. 파리에 있는 이 두 전문학교는 패턴 재단과 디자인 구상 분야에서 각각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창 해방감을 만끽할 20대 초반에도 이 디자이너는 옷만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림을 잘 못 그리면 연습하고, 입체 패턴이 이해되지 않으면 공부하는 식이었다. 벽에 부딪히고 극복하기, 다시 벽에 부딪히고 극복하기가 반복되는 나날이었다.
“나는 안 되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 때도 그냥 그대로 계속했어요. 나중에 돌아보니 반짝 재능을 보여주던 친구들은 금방 그만두더라고요. 지금에서야 느끼는 건 어떤 경험이든 전부 디자이너 안에 녹아든다는 점이에요. 후회 목록에 ‘더 많이 해볼걸’은 있어도 ‘괜히 해봤다’는 없어요.”
‘열정’이라는 상투어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학창 시절, 패션 본고장인 파리는 이 디자이너에겐 외로움을 가져다주는 도시였다. 은근한 무시와 차별도 있었지만, 그들과 감성의 밑바탕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파리 안에 있는 자신이 무척 작게 느껴졌다.
“파리에서는 지나가는 한 사람, 심지어 길에 놓인 돌에서도 영감을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이건 게임이 안 되겠구나, 저 사람들의 시각과 색감을 따라갈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저에게도 상상력과 도전정신은 있었거든요. 파리에서 공부하느라 뿌린 돈을 내가 디자인한 옷으로 언젠가는 거둬 가겠다고 다짐했는데, 지금 어느 정도 소원을 푼 셈이죠. 참 감격스러운 일이에요.”
언어도 서툴고 패션에 대해서도 잘 모르던 한국 유학생 이석태는 결국 파리의 패션전문학교 수석 졸업자 대열에 끼었고, ‘크리스챤 디올’ ‘소니아 리키엘’ 파리 본사에서 근무도 하게 된다.
공부를 마치고 1997년 귀국한 이 디자이너는 ‘칼 이석태’라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선보인다. 그러나 파리를 경험하고 돌아온, 전도유망한 디자이너의 앞날은 순탄치 못했다. 그해 말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았고, 젊은 디자이너는 아직 고객과의 소통법을 몰랐다. 패션계의 평가는 호의적이었지만, 금전적으로는 어려운 4년여를 보냈다. 더는 사업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이 디자이너는 회사에 취직했고, 6년간 여러 브랜드의 디자인실을 두루 거쳤다.
“그전까지는 자기중심적이었어요. 잘 모르던 시절에는 패션디자인이란 내가 원하는 옷과 고객이 사고 싶은 옷 사이에서 타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회사생활을 하면서 대중을 바라보고 소통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어요. 패션은 반드시 사람이 입어야 의미 있기 때문에 소통이 디자인보다 먼저죠. 소통을 간과하지 않은 이후부터 일이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어요.”
2008년 서울컬렉션으로 복귀한 디자이너 브랜드 ‘칼 이석태’를 패션계는 기다렸다는 듯이 환영했다. 이 디자이너는 2008~2012년 서울컬렉션 7회 참가, 2010~2012 ‘Seoul’s 10 Soul’ 3년 연속 선정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Seoul’s 10 Soul은 서울시의 글로벌 패션브랜드 육성 프로젝트로, 올해는 파리컬렉션 기간에 파리에서 컬렉션을 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 대한 세계의 시선이 달라진 점도 디자이너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를 사랑해야 옷 잘 입어
서울패션위크에 선보인 이석태 디자이너 컬렉션.
“제 옷은 제가 손수 만들어 입고, 친한 남자 연예인이나 디자이너에게 맞춤옷을 선물하기도 해요. 다른 브랜드 옷은 디자인이 제 마음에 안 차기도 하고 원단 대비 가격이 비싸기도 해서 손이 잘 안 가더라고요.”
이 디자이너만의 좋은 옷 고르는 법이나 옷 잘 입는 법이 따로 있는지 물었다. 비결은 원단도, 패턴도, 색깔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멋은 새 옷이나 비싼 옷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나 자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죠. 나 자신을 사랑해야 나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을 수 있고, 그다음에야 자연스러운 패션이 완성되니까요. 요즘 남성복 시장이 달아오르고 있다는데, 그래봐야 유행을 따라가는 거겠죠. 남자든 여자든 ‘나’가 빠진 옷을 입는 현상이 조금 안타까워요.”
그런데 소비자 처지에서 해외에 나가야만 ‘칼 이석태‘를 입을 수 있다면 멋을 부리기가 힘들 것 아닌가. 최근 이 디자이너는 가죽 전문 브랜드 ‘로보’와 협업한 결과물을 쇼핑몰 ‘GS샵’을 통해 선보였다. 고급 패션, 이른바 ‘하이엔드’ 디자인을 추구하는 디자이너로서는 뜻밖의 선택이다.
“옷을 입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한 모든 통로를 찾아야 하고, 각 통로에 맞는 가격과 품질을 풀어내는 것도 능력이에요. 마케팅도 최대한 동원해야 하고요. 상품을 준비하고 쇼핑호스트와 방송하면서 다양한 영역을 접할 수 있어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이 디자이너에게 패션은 수수께끼다. 좋은 패션디자인이 무엇인지도 앞으로 더 알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상업이면서 예술이고, 상업이 아니면서 예술도 아닌 패션 한복판에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면서도 ‘진정성’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옷 한 벌에 얼마나 많은 상상을 담고 그것을 어떻게 일상으로 펼쳐내는지를 떠올리노라면 고객과 패션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 앞에 당당한 디자이너로 남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