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前) 대통령의 방북 일정은 2009년 1월 15일로 결정됐다. 그러나 평양의 아줌마 아나운서가 대통령급 사죄 특사를 즉시 평양으로 출두시키라는 명령을 한 지 보름 만이어서 여론이 들끓었다. 이명박이 진짜 사죄 특사를 보내는 것 아니냐고 분개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여론조사 좋아하는 신문들이 너도나도 5개 조사기관이 내놓은 결과를 평균 내어 기사화했다. 국민 73%가 이번 특사 방문이 너무 빠르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은 대변인 이동관을 시켜 짤막하게 몇 마디만 했다.
“시기가 됐기 때문에 특사께서 가시는 것입니다. 나는 북한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론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국무총리 이회창은 대변인을 통한 대통령의 담화내용을 미리 보지 못했다. 물론 보려고 결심만 하면 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총리실에 앉아 이동관이 대신한 대통령의 성명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
“과연. 대통령이라면 저래야지.”
혼자 머리를 끄덕이던 이회창이 심호흡을 했다. 국무총리의 위상이 지금처럼 높아진 적이 없는 것이다. 국무위원의 임명제청권은 물론 국무회의도 주관하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2인자 위치가 확고해졌다. 이것이 다 누구 덕인가. 대통령 이명박이 과감하고 통 큰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밀어준 이명박을 배신할 수 있겠는가.
# 1월 15일 오후 3시, 개성을 통해 고속도로를 달려 평양에 도착한 특사 김대중은 평양 외곽에 자리한 모란봉초대소에서 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의 영접을 받는다. 지난번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평양공항에서 김정일의 영접을 받았지만 지금은 대통령 특사가 돼서 왔다. 김영남의 영접도 격이 낮은 것이 아니다. 영접행사가 끝나고 초대소 안 넓은 응접실에 편안히 둘러앉았을 때 김영남이 넌지시 물었다.
“6·15선언이 잘 수행될 것 같습니까?”
“아, 그거야.”
소파에 등을 붙인 김대중이 지그시 김영남을 보았다. 북한은 지금 전임 대통령인 김대중이 이명박의 사죄 특사로 왔다고 대대적으로 선전 중이다. 사죄 특사에 환영식은 필요 없었기 때문에 꽃다발도 걸어주지 않았다. 김대중이 말을 잇는다.
“잘 아시겠지만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남북 간 관계개선에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응접실 안에는 김영남과 외무성 부상 리용호, 그리고 한국 측에서는 김대중과 보좌역인 이재오까지 넷이 둘러앉았다. 내일 아침 김정일과의 회담에 대비한 예비회담 격이다. 김영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북남 간 대결구도로 가는 바람에 지난 10년간 쌓아올린 북남 간 우호 협력 기반이 무너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자 리용호가 거들었다.
“아니, 이미 다 무너졌습니다. 오히려 10년 전보다 더 악화됐습니다.”
김대중과 이재오는 입을 다물었고 다시 김영남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게 급박한 시기에 김 대통령께서 잘 오신 것 같단 말씀입니다. 하지만 내일 지도자 동지께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으셔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은근히 대안을 가져왔느냐고 압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이재오가 말했다.
“그래서 김 전임 대통령께서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몸이 편치 않으시면서도 이렇게 무리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김영남은 물론이고 리용호도 대답하지 않는다.
# 그날 저녁 오후 8시 반, 이명박 대통령이 KBS TV ‘국민과의 대화’에 출연했다. 대통령 특사가 평양에 도착한 시점에 맞춰 일정을 잡은 것이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 흩어진 회사원들과 화상회의를 하는 시대다. 주석궁에 박힌 김정일이 오늘 이 장면을 놓칠 리 없다는 것을 청와대 측도 계산에 넣고 대통령을 출연시킨 것이다. 영등포에서 문구점을 한다는 50대 중반의 신기식이 이명박에게 질문했다.
“김 전임께서 한반도의 평화공존을 위해 대북 특사로 평양에 가셨다는 정부 발표는 국민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그런 두루뭉술한 발표를 믿는 국민은 하나도 없습니다. 김 전임께서 구체적으로 무슨 목적을 갖고 특사로 가셨는지 대통령께서는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정일이 주석궁 응접실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그의 옆에는 26세가 된 김정은이 앉아 있다. 질문이 끝나고 화면이 이명박의 얼굴로 옮겨졌다. 클로즈업된 이명박의 얼굴이 조금 굳어 있다.
“저 새끼, 저렇게 물은 놈 말입니다. 총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건방지게시리.”
김정은이 불쑥 물었다가 김정일의 표정을 보고는 제 말에 제가 대답했다.
“하긴 저것도 각본대로 읽는 것이겠지요.”
그때 이명박이 화면에 대고 대답했다.
“김 전임께서는 지난번 대한민국을 대표한 대통령 자격으로 남북회담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6·15선언을 하셨지요.”
TV 화면에서 이명박이 똑바로 김정일을 바라보고 있다. 이명박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지금은 대통령 이명박의 특사로 현실적인 남북관계 정립에 헌신하고 계십니다. 내일 김 전임께서도 제 의지를 김정일 위원장께 전달할 것입니다.”
“어떤 제의일까요?”
하고 김정은이 이명박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었지만 김정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맛살이 조금 찌푸려져 있다.
# 다음 날 오전 10시 정각, 김정일이 모란봉초대소로 찾아와 김대중을 만났다. 예의를 차린 것처럼 보이지만 비공식회담 분위기를 풀풀 풍긴다. 수행원도 어제 다녀간 김영남과 리용호다. 서울에서 따라간 기자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었지만 초대소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당연히 회담은 비밀회담이 됐다. 초대소 응접실 옆방이 회담장으로 차려졌다. 장방형 테이블 왼쪽에 김정일, 김영남, 리용호가 앉았고 오른쪽에 김대중, 이재오, 그리고 청와대 안보비서관 최길중이 있다. 인사를 마쳤을 때 먼저 김정일이 입을 열었다. 웃지도 않는다.
“이명박 정권이 시작되면서 대립구도로 전환했습니다. 이건 박정희 시대처럼 안보를 핑계로 독재체제를 굳히려는 의도 아닙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채찍으로 치는 것 같아 최길중은 등이 서늘해졌지만 김대중은 포커페이스다. 건너편 이재오도 시큰둥한 표정이다. 김정일이 말을 잇는다.
“전두환을 전면에 내세워 돌격대를 시키는 한편으로 김 전임을 이렇게 보내 강온 양면 전략을 쓰는 것, 수가 뻔히 보입니다.”
그러고는 어디 대답해보라는 표정으로 김대중을 바라보았다. 김대중이 눈만 끔벅였으므로 최길중은 애간장이 탔다. 압도당했는가. 그럴 양반은 아닌데. 그렇게 5초쯤 지났을 때 김대중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까지 다섯 번 정권을 거쳤지만 현재의 이명박 정권이 가장 강합니다.”
김정일의 시선을 받은 채 김대중이 말을 잇는다.
“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독재가 아니고 지지올시다.”
김대중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바꿔야 합니다. 내가 그 말씀을 드리려고 목숨을 걸고 온 것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눈을 치켜뜬 김정일이 김대중을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바꿔야 한단 말입니까? 원인이 우리한테 있단 말씀이오?”
“이제 남한에 동조세력은 없다고 보셔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북한이 맞춰야 할 때가 됐습니다.”
“아니, 뭐라고 하셨소?”
눈을 치켜뜬 김정일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얼굴도 상기돼 있다.
“이 양반, 정말 상종을 못 하겠구먼.”
그러고는 김정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으므로 김영남과 리용호도 소스라쳐 따라 일어선다.
# 김정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바람에 차량 대열 꽁무니만 바라보던 셋은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왔다. 셋의 표정은 다 다르다. 최길중은 사색(死色)이 된 반면, 이재오는 학질을 뗀 표정이고 김대중은 담담하다. 방에 셋이 앉았을 때 김대중이 말했다.
“위원장한테 이런 말을 전해줄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거요.”
“대통령님뿐이십니다.”
이재오가 정색하고 말을 잇는다.
“존경합니다, 대통령님.”
“그렇다면 나도 좀 체면이 서는구먼.”
쓴웃음을 지었던 김대중이 곧 정색했다.
“김정일 씨가 그냥 끝내지는 않을 거요. 화는 났겠지만 내 진정을 모를 사람은 아녀.”
# 2사단 17연대장 조태수 대령은 남북군사회담 한 번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됐다. 방송은 물론 인터넷에서도 ‘조태수’만 입력하면 사진과 신상이 주르르 뜨는 터라, 조태수의 아내 오금자는 며칠 사이에 체중이 5kg이나 줄었다. 그러나 내년이면 조태수가 예편할 예정이기 때문에 오금자는 석 달 전부터 학원에 다니고 있다. 예편하면 제과점을 할 작정으로 제과회사에서 하는 제빵교육과정에 등록한 것이다.
오늘도 오후 1시에 시작하는 교육장에 가려고 준비하던 오금자는 도로 소파에 앉았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중이다. 남편 조태수가 ‘전두환’의 직접 지시를 받고 ‘깽판’을 친 것과 ‘예편’과의 상관관계를 계산하는 것이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생각에 빠져 있던 오금자는 소스라쳤다. 봉천동 30평형 아파트에는 오금자 혼자뿐이다. 큰놈은 전문대 다니다 해병대에 갔고, 대학생인 둘째 딸은 학교 끝나고 편의점 알바를 한다. 심호흡을 한 오금자는 전화기를 들었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뜬금없이 격려 전화가 하루에 서너 통은 온다. 그렇지만 발신자를 보니 조태수다.
“여보세요.”
오금자가 응답했더니 조태수가 3초쯤 가만있다 말했다.
“어이, 나 별 달았어.”
심장이 쿵 내려앉은 오금자가 말문이 막힌 사이 조태수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전에 통보받았어.”
# 그날 오후 1시부터 조태수의 장군 진급 뉴스가 보도됐는데, 특사가 평양에 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식자 대부분은 긴장했다.
“계속해서 강수(强手)를 쓰는군.”
국무총리 이회창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국무총리 집무실 안이다. 앞에는 국무차장 김영곤이 서 있었는데 둘은 방금 조태수의 장군 진급 뉴스를 들었다. 이회창이 말을 이었다.
“김 전임이 애를 먹겠는데. 근데 이번에 김 전임이 들고 간 내용이 뭐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이회창의 반대쪽으로 머리를 눕힌 김영곤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대통령실장께 연락을 해볼까요?”
“내가 해보지.”
벽시계를 올려다본 이회창이 지시했다.
“조 실장한테 연락을 해봐요. 내가 통화하고 싶다고.”
# 전화기를 귀에 붙인 조순형이 말했다.
“김 전임께서 가시기 전에 대통령님과 특별히 상의하신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이회창은 잠자코 기다렸고 조순형의 말이 이어졌다.
“경직된 남북 간 분위기를 완화해야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조 대령을 장군 진급시켰다는 뉴스가 나가면 북측이 열 받을 것 아녀? 왜 하필 이런 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거 손발이 맞아야지.”
투덜거린 이회창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전두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시 전(全) 전임이 깨방 놓는 것 아녀?”
조태수의 장군 진급도 전두환이 손을 썼을 것이었다.
# 그 시간에 전두환은 국정원장실에서 국정원장 장세동과 마주 앉았는데 웃음 띤 얼굴이다. 전두환이 12·12 때 빼고 요즘처럼 바쁜 적은 없다.
“배수진을 친 거야.”
전두환이 웃음은 띠었으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렇다고 김정일이는 우리 김 전임을 함부로 못 해. 의지할 사람은 김 전임 하나뿐이거든.”
“오전에 김정일이가 화를 내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는데요.”
장세동이 말하자 전두환은 코웃음을 쳤다.
“쇼야.”
“김 전임이 여리신 분인데 놀랐겠습니다. 더욱이 조태수가 장군 진급했다는 뉴스가 나갔으니 엎친 데 덮친 꼴이 됐겠는데요.”
“그 양반, 여린 것 같아도 끈질겨. 그리고 머리가 김정일이보다 좋아. 냅둬.”
“대통령께는 상의하셨습니까?”
“컨펌 받았어.”
그러고는 전두환이 눈을 흘겼다.
“내가 하극상할 것 같으냐? 나는 믿는 사람은 배신 안 한다.”
“알고 있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장세동이 송수화기를 들고 귀에 붙였다. 그러더니 곧 내려놓고 말했다.
“김정일이 김 전임을 만찬에 초대했다고 합니다.”
# “그럼 그렇지.”
조순형의 보고를 받은 이명박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며 혼잣소리를 했다.
“그 사람이 그 양반을 무시하면 안 되지.”
그 사람이란 김정일이고 그 양반은 김대중이다. 방금 조순형은 김정일의 만찬 초대를 보고한 것이다.
“오늘밤 만찬 때 김 전임께서 김정일을 만나면 이야기가 되겠지.”
다시 이명박이 혼잣소리를 했을 때 조순형이 물었다.
“김 전임께서 무슨 제안을 하시려는지 제가 알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쓴웃음을 지은 이명박이 조순형을 보았다.
“김 전임하고 내가 상의한 내용이 없어요. 김 전임께서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아아, 예.”
“가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데 부담을 드릴 수는 없었지요.”
“잘하셨습니다.”
“다만.”
입맛을 다신 이명박이 말을 잇는다.
“전(全) 전임의 요청대로 조 대령을 진급시키고 발표해버린 것이 조금 걸리는구먼요. 잘 돼야 할 텐데.”
# 홍준표 세우리당 최고의원실에는 최고의원 이한구, 유승민, 남경필, 임태희까지 다섯이 다 모였다. 오후 4시, 회의를 끝내고 소파에 편하게 앉은 터라 세상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홍준표가 입을 열었다.
“이건 원로정치야. 김 전임, 전 전임이 펄펄 뛰어다니니까 상도동하고 봉하마을이 위축된 것 같구먼.”
“상도동이 불만이 많습디다.”
하고 유승민이 말을 잇는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생기게 마련인가 봐요.”
“민주당에선 우리 대통령이 원로정치에 끼려고 미리 틀을 만들어놓으려 한다는 거요.”
이한구가 말하자 남경필이 말을 받는다.
“나도 들었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상왕(上王)정치를 하려고 지금 원로들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박 대표가 들으면 좋아하겠는데.”
입빠른 홍준표가 주위의 시선을 받더니 헛기침을 했다.
“아따, 농담도 못 하나? 그리고 지금은 박 대표뿐만이 아니잖요? 잠룡에 이 총리까지 끼어든 상황 아니오?”
“그런 말은 그만 합시다.”
유승민이 말하자 남경필이 혀를 찼다.
“이젠 모두 다 드러내놓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이 분위기로 가면 4년 후에는 누가 후보가 될지 예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남경필이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이명박의 인기가 치솟을수록 후계자의 윤곽은 모호해진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어서 누구도 불평할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명박에게 인정받은 후계자가 대권을 쥐게 된다는 것이다.
# “자, 듭시다.”
술잔을 든 김정일이 말했다. 이곳은 주석궁의 만찬장. 원탁에 20여 명의 북측 고위급 인사가 둘러앉았지만 한국 측은 김대중과 이재오, 최길중까지 셋이다. 술잔을 든 한국 측 셋을 향해 김정일이 말을 잇는다.
“나는 김 대통령님과의 신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국가 간 조약 이전에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우정이 쌓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대중이 화답했을 때 김정일은 포도주 한 모금을 삼켰고 모두 따른다. 식탁에 있는 음식은 그야말로 산해진미다. 김대중도 생전 처음 보는 요리가 많다. 술잔을 내려놓은 김대중이 김정일을 향해 상반신을 조금 기울였다.
“위원장님, 역사에 남을 일을 하시지요.”
김정일이 눈만 크게 떴으므로 김대중이 몸을 더 기울이고 말을 잇는다.
“이명박 씨는 받아들일 것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분위기에 휩쓸린 김정일도 목소리를 낮춘다. 원탁에 둘러앉은 고위층은 둘의 모습을 보았지만 감히 방해하지 못하고 제각기 딴전을 피운다. 김대중이 말했다.
“핵 폐기 선언을 하시고 한국을 방문하시는 것입니다.”
김정일은 시선만 준 채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다. 김대중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군사동맹을 맺으면 단숨에 미·중·일의 견제에서 벗어납니다. 또….”
김대중은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을 이을 것도 없다. 거대한 북한의 군 집단을 남측과 함께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여론조사 좋아하는 신문들이 너도나도 5개 조사기관이 내놓은 결과를 평균 내어 기사화했다. 국민 73%가 이번 특사 방문이 너무 빠르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은 대변인 이동관을 시켜 짤막하게 몇 마디만 했다.
“시기가 됐기 때문에 특사께서 가시는 것입니다. 나는 북한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여론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국무총리 이회창은 대변인을 통한 대통령의 담화내용을 미리 보지 못했다. 물론 보려고 결심만 하면 볼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총리실에 앉아 이동관이 대신한 대통령의 성명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
“과연. 대통령이라면 저래야지.”
혼자 머리를 끄덕이던 이회창이 심호흡을 했다. 국무총리의 위상이 지금처럼 높아진 적이 없는 것이다. 국무위원의 임명제청권은 물론 국무회의도 주관하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2인자 위치가 확고해졌다. 이것이 다 누구 덕인가. 대통령 이명박이 과감하고 통 큰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밀어준 이명박을 배신할 수 있겠는가.
# 1월 15일 오후 3시, 개성을 통해 고속도로를 달려 평양에 도착한 특사 김대중은 평양 외곽에 자리한 모란봉초대소에서 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의 영접을 받는다. 지난번 평양을 방문했을 때는 평양공항에서 김정일의 영접을 받았지만 지금은 대통령 특사가 돼서 왔다. 김영남의 영접도 격이 낮은 것이 아니다. 영접행사가 끝나고 초대소 안 넓은 응접실에 편안히 둘러앉았을 때 김영남이 넌지시 물었다.
“6·15선언이 잘 수행될 것 같습니까?”
“아, 그거야.”
소파에 등을 붙인 김대중이 지그시 김영남을 보았다. 북한은 지금 전임 대통령인 김대중이 이명박의 사죄 특사로 왔다고 대대적으로 선전 중이다. 사죄 특사에 환영식은 필요 없었기 때문에 꽃다발도 걸어주지 않았다. 김대중이 말을 잇는다.
“잘 아시겠지만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남북 간 관계개선에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응접실 안에는 김영남과 외무성 부상 리용호, 그리고 한국 측에서는 김대중과 보좌역인 이재오까지 넷이 둘러앉았다. 내일 아침 김정일과의 회담에 대비한 예비회담 격이다. 김영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북남 간 대결구도로 가는 바람에 지난 10년간 쌓아올린 북남 간 우호 협력 기반이 무너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자 리용호가 거들었다.
“아니, 이미 다 무너졌습니다. 오히려 10년 전보다 더 악화됐습니다.”
김대중과 이재오는 입을 다물었고 다시 김영남의 말이 이어졌다.
“이렇게 급박한 시기에 김 대통령께서 잘 오신 것 같단 말씀입니다. 하지만 내일 지도자 동지께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으셔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은근히 대안을 가져왔느냐고 압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이재오가 말했다.
“그래서 김 전임 대통령께서 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몸이 편치 않으시면서도 이렇게 무리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김영남은 물론이고 리용호도 대답하지 않는다.
# 그날 저녁 오후 8시 반, 이명박 대통령이 KBS TV ‘국민과의 대화’에 출연했다. 대통령 특사가 평양에 도착한 시점에 맞춰 일정을 잡은 것이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 흩어진 회사원들과 화상회의를 하는 시대다. 주석궁에 박힌 김정일이 오늘 이 장면을 놓칠 리 없다는 것을 청와대 측도 계산에 넣고 대통령을 출연시킨 것이다. 영등포에서 문구점을 한다는 50대 중반의 신기식이 이명박에게 질문했다.
“김 전임께서 한반도의 평화공존을 위해 대북 특사로 평양에 가셨다는 정부 발표는 국민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그런 두루뭉술한 발표를 믿는 국민은 하나도 없습니다. 김 전임께서 구체적으로 무슨 목적을 갖고 특사로 가셨는지 대통령께서는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김정일이 주석궁 응접실에서 그 장면을 보았다. 그의 옆에는 26세가 된 김정은이 앉아 있다. 질문이 끝나고 화면이 이명박의 얼굴로 옮겨졌다. 클로즈업된 이명박의 얼굴이 조금 굳어 있다.
“저 새끼, 저렇게 물은 놈 말입니다. 총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건방지게시리.”
김정은이 불쑥 물었다가 김정일의 표정을 보고는 제 말에 제가 대답했다.
“하긴 저것도 각본대로 읽는 것이겠지요.”
그때 이명박이 화면에 대고 대답했다.
“김 전임께서는 지난번 대한민국을 대표한 대통령 자격으로 남북회담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6·15선언을 하셨지요.”
TV 화면에서 이명박이 똑바로 김정일을 바라보고 있다. 이명박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지금은 대통령 이명박의 특사로 현실적인 남북관계 정립에 헌신하고 계십니다. 내일 김 전임께서도 제 의지를 김정일 위원장께 전달할 것입니다.”
“어떤 제의일까요?”
하고 김정은이 이명박의 말이 끝나자마자 물었지만 김정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맛살이 조금 찌푸려져 있다.
# 다음 날 오전 10시 정각, 김정일이 모란봉초대소로 찾아와 김대중을 만났다. 예의를 차린 것처럼 보이지만 비공식회담 분위기를 풀풀 풍긴다. 수행원도 어제 다녀간 김영남과 리용호다. 서울에서 따라간 기자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었지만 초대소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당연히 회담은 비밀회담이 됐다. 초대소 응접실 옆방이 회담장으로 차려졌다. 장방형 테이블 왼쪽에 김정일, 김영남, 리용호가 앉았고 오른쪽에 김대중, 이재오, 그리고 청와대 안보비서관 최길중이 있다. 인사를 마쳤을 때 먼저 김정일이 입을 열었다. 웃지도 않는다.
“이명박 정권이 시작되면서 대립구도로 전환했습니다. 이건 박정희 시대처럼 안보를 핑계로 독재체제를 굳히려는 의도 아닙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채찍으로 치는 것 같아 최길중은 등이 서늘해졌지만 김대중은 포커페이스다. 건너편 이재오도 시큰둥한 표정이다. 김정일이 말을 잇는다.
“전두환을 전면에 내세워 돌격대를 시키는 한편으로 김 전임을 이렇게 보내 강온 양면 전략을 쓰는 것, 수가 뻔히 보입니다.”
그러고는 어디 대답해보라는 표정으로 김대중을 바라보았다. 김대중이 눈만 끔벅였으므로 최길중은 애간장이 탔다. 압도당했는가. 그럴 양반은 아닌데. 그렇게 5초쯤 지났을 때 김대중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까지 다섯 번 정권을 거쳤지만 현재의 이명박 정권이 가장 강합니다.”
김정일의 시선을 받은 채 김대중이 말을 잇는다.
“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독재가 아니고 지지올시다.”
김대중이 천천히 머리를 저었다.
“바꿔야 합니다. 내가 그 말씀을 드리려고 목숨을 걸고 온 것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눈을 치켜뜬 김정일이 김대중을 노려보았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바꿔야 한단 말입니까? 원인이 우리한테 있단 말씀이오?”
“이제 남한에 동조세력은 없다고 보셔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북한이 맞춰야 할 때가 됐습니다.”
“아니, 뭐라고 하셨소?”
눈을 치켜뜬 김정일이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얼굴도 상기돼 있다.
“이 양반, 정말 상종을 못 하겠구먼.”
그러고는 김정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으므로 김영남과 리용호도 소스라쳐 따라 일어선다.
# 김정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바람에 차량 대열 꽁무니만 바라보던 셋은 다시 회담장으로 돌아왔다. 셋의 표정은 다 다르다. 최길중은 사색(死色)이 된 반면, 이재오는 학질을 뗀 표정이고 김대중은 담담하다. 방에 셋이 앉았을 때 김대중이 말했다.
“위원장한테 이런 말을 전해줄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거요.”
“대통령님뿐이십니다.”
이재오가 정색하고 말을 잇는다.
“존경합니다, 대통령님.”
“그렇다면 나도 좀 체면이 서는구먼.”
쓴웃음을 지었던 김대중이 곧 정색했다.
“김정일 씨가 그냥 끝내지는 않을 거요. 화는 났겠지만 내 진정을 모를 사람은 아녀.”
# 2사단 17연대장 조태수 대령은 남북군사회담 한 번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됐다. 방송은 물론 인터넷에서도 ‘조태수’만 입력하면 사진과 신상이 주르르 뜨는 터라, 조태수의 아내 오금자는 며칠 사이에 체중이 5kg이나 줄었다. 그러나 내년이면 조태수가 예편할 예정이기 때문에 오금자는 석 달 전부터 학원에 다니고 있다. 예편하면 제과점을 할 작정으로 제과회사에서 하는 제빵교육과정에 등록한 것이다.
오늘도 오후 1시에 시작하는 교육장에 가려고 준비하던 오금자는 도로 소파에 앉았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중이다. 남편 조태수가 ‘전두환’의 직접 지시를 받고 ‘깽판’을 친 것과 ‘예편’과의 상관관계를 계산하는 것이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생각에 빠져 있던 오금자는 소스라쳤다. 봉천동 30평형 아파트에는 오금자 혼자뿐이다. 큰놈은 전문대 다니다 해병대에 갔고, 대학생인 둘째 딸은 학교 끝나고 편의점 알바를 한다. 심호흡을 한 오금자는 전화기를 들었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뜬금없이 격려 전화가 하루에 서너 통은 온다. 그렇지만 발신자를 보니 조태수다.
“여보세요.”
오금자가 응답했더니 조태수가 3초쯤 가만있다 말했다.
“어이, 나 별 달았어.”
심장이 쿵 내려앉은 오금자가 말문이 막힌 사이 조태수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전에 통보받았어.”
# 그날 오후 1시부터 조태수의 장군 진급 뉴스가 보도됐는데, 특사가 평양에 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식자 대부분은 긴장했다.
“계속해서 강수(强手)를 쓰는군.”
국무총리 이회창이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국무총리 집무실 안이다. 앞에는 국무차장 김영곤이 서 있었는데 둘은 방금 조태수의 장군 진급 뉴스를 들었다. 이회창이 말을 이었다.
“김 전임이 애를 먹겠는데. 근데 이번에 김 전임이 들고 간 내용이 뭐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이회창의 반대쪽으로 머리를 눕힌 김영곤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대통령실장께 연락을 해볼까요?”
“내가 해보지.”
벽시계를 올려다본 이회창이 지시했다.
“조 실장한테 연락을 해봐요. 내가 통화하고 싶다고.”
# 전화기를 귀에 붙인 조순형이 말했다.
“김 전임께서 가시기 전에 대통령님과 특별히 상의하신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이회창은 잠자코 기다렸고 조순형의 말이 이어졌다.
“경직된 남북 간 분위기를 완화해야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조 대령을 장군 진급시켰다는 뉴스가 나가면 북측이 열 받을 것 아녀? 왜 하필 이런 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거 손발이 맞아야지.”
투덜거린 이회창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전두환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혹시 전(全) 전임이 깨방 놓는 것 아녀?”
조태수의 장군 진급도 전두환이 손을 썼을 것이었다.
# 그 시간에 전두환은 국정원장실에서 국정원장 장세동과 마주 앉았는데 웃음 띤 얼굴이다. 전두환이 12·12 때 빼고 요즘처럼 바쁜 적은 없다.
“배수진을 친 거야.”
전두환이 웃음은 띠었으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렇다고 김정일이는 우리 김 전임을 함부로 못 해. 의지할 사람은 김 전임 하나뿐이거든.”
“오전에 김정일이가 화를 내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는데요.”
장세동이 말하자 전두환은 코웃음을 쳤다.
“쇼야.”
“김 전임이 여리신 분인데 놀랐겠습니다. 더욱이 조태수가 장군 진급했다는 뉴스가 나갔으니 엎친 데 덮친 꼴이 됐겠는데요.”
“그 양반, 여린 것 같아도 끈질겨. 그리고 머리가 김정일이보다 좋아. 냅둬.”
“대통령께는 상의하셨습니까?”
“컨펌 받았어.”
그러고는 전두환이 눈을 흘겼다.
“내가 하극상할 것 같으냐? 나는 믿는 사람은 배신 안 한다.”
“알고 있습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장세동이 송수화기를 들고 귀에 붙였다. 그러더니 곧 내려놓고 말했다.
“김정일이 김 전임을 만찬에 초대했다고 합니다.”
# “그럼 그렇지.”
조순형의 보고를 받은 이명박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이며 혼잣소리를 했다.
“그 사람이 그 양반을 무시하면 안 되지.”
그 사람이란 김정일이고 그 양반은 김대중이다. 방금 조순형은 김정일의 만찬 초대를 보고한 것이다.
“오늘밤 만찬 때 김 전임께서 김정일을 만나면 이야기가 되겠지.”
다시 이명박이 혼잣소리를 했을 때 조순형이 물었다.
“김 전임께서 무슨 제안을 하시려는지 제가 알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쓴웃음을 지은 이명박이 조순형을 보았다.
“김 전임하고 내가 상의한 내용이 없어요. 김 전임께서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아아, 예.”
“가주신 것만 해도 고마운데 부담을 드릴 수는 없었지요.”
“잘하셨습니다.”
“다만.”
입맛을 다신 이명박이 말을 잇는다.
“전(全) 전임의 요청대로 조 대령을 진급시키고 발표해버린 것이 조금 걸리는구먼요. 잘 돼야 할 텐데.”
# 홍준표 세우리당 최고의원실에는 최고의원 이한구, 유승민, 남경필, 임태희까지 다섯이 다 모였다. 오후 4시, 회의를 끝내고 소파에 편하게 앉은 터라 세상 이야기가 나온다. 먼저 홍준표가 입을 열었다.
“이건 원로정치야. 김 전임, 전 전임이 펄펄 뛰어다니니까 상도동하고 봉하마을이 위축된 것 같구먼.”
“상도동이 불만이 많습디다.”
하고 유승민이 말을 잇는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생기게 마련인가 봐요.”
“민주당에선 우리 대통령이 원로정치에 끼려고 미리 틀을 만들어놓으려 한다는 거요.”
이한구가 말하자 남경필이 말을 받는다.
“나도 들었습니다. 우리 대통령이 상왕(上王)정치를 하려고 지금 원로들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박 대표가 들으면 좋아하겠는데.”
입빠른 홍준표가 주위의 시선을 받더니 헛기침을 했다.
“아따, 농담도 못 하나? 그리고 지금은 박 대표뿐만이 아니잖요? 잠룡에 이 총리까지 끼어든 상황 아니오?”
“그런 말은 그만 합시다.”
유승민이 말하자 남경필이 혀를 찼다.
“이젠 모두 다 드러내놓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이 분위기로 가면 4년 후에는 누가 후보가 될지 예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남경필이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이명박의 인기가 치솟을수록 후계자의 윤곽은 모호해진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어서 누구도 불평할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명박에게 인정받은 후계자가 대권을 쥐게 된다는 것이다.
# “자, 듭시다.”
술잔을 든 김정일이 말했다. 이곳은 주석궁의 만찬장. 원탁에 20여 명의 북측 고위급 인사가 둘러앉았지만 한국 측은 김대중과 이재오, 최길중까지 셋이다. 술잔을 든 한국 측 셋을 향해 김정일이 말을 잇는다.
“나는 김 대통령님과의 신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오. 그것은 국가 간 조약 이전에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우정이 쌓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대중이 화답했을 때 김정일은 포도주 한 모금을 삼켰고 모두 따른다. 식탁에 있는 음식은 그야말로 산해진미다. 김대중도 생전 처음 보는 요리가 많다. 술잔을 내려놓은 김대중이 김정일을 향해 상반신을 조금 기울였다.
“위원장님, 역사에 남을 일을 하시지요.”
김정일이 눈만 크게 떴으므로 김대중이 몸을 더 기울이고 말을 잇는다.
“이명박 씨는 받아들일 것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분위기에 휩쓸린 김정일도 목소리를 낮춘다. 원탁에 둘러앉은 고위층은 둘의 모습을 보았지만 감히 방해하지 못하고 제각기 딴전을 피운다. 김대중이 말했다.
“핵 폐기 선언을 하시고 한국을 방문하시는 것입니다.”
김정일은 시선만 준 채 숨을 쉬는 것 같지도 않다. 김대중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군사동맹을 맺으면 단숨에 미·중·일의 견제에서 벗어납니다. 또….”
김대중은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을 이을 것도 없다. 거대한 북한의 군 집단을 남측과 함께 관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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