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강원 양구군 해안면 을지전망대에서 ‘제1회 나라사랑 물망초 예술제’가 열렸다. 이 예술제는 현재의 시대정신에 걸맞은 현충일 문화행사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행사. 이날 통일부에서 초대한 고령의 이산가족 100명은 김철호 테너의 독창, 바로크 합창단의 가곡 합창, 김영임 명창의 ‘회심곡’ 등을 들으며 6·25전쟁으로 인한 아픔을 달랬다.
이 행사를 주관한 곳은 한명희(74) 씨가 이끄는 사단법인 이미시문화서원. 한씨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이렇다 할 추념 공원 하나 없다며 ‘행사를 위한 행사’만 여는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영국 ‘더 타임스’의 앤드루 새먼 기자는 6·25전쟁을 보물이라고 칭했습니다. 전쟁은 관광자원으로 쓸 수도 있고, 국론통일의 방법으로도 쓸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기틀이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이 거대한 보물창고를 하나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씨는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로 시작하는 가곡 ‘비목(碑木)’의 작사가다. TBC PD로 재직하던 1968년 당시 우리 가곡이 너무 부족한 현실이 안타까웠던 그는 음악가 장일남 씨와 “신곡을 하나 만들자”며 즉석에서 ‘비목’을 썼다. ‘비목’엔 ROTC 시절 강원 화천군에서 십자 나무만 세워져 있던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본 그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64년 임관해 비무장지대(DMZ)에서 근무할 때인데 나무에는 실탄 파편이 박혔고, 주변에는 해골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이 가깝게 느껴졌죠.”
우리 가곡, 우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학시절부터 나타났다. 그가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할 1960년대만 해도 국악은 천대받았다. 가야금을 들고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기생’이라고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그는 국악과 민족의 얼에 대한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1990년대 그의 인생 황금기는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펼쳐졌다.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과의 교류가 전무하던 당시, 그는 중앙아시아 전통음악계와 인연을 맺고 고려인을 위해 20년 동안 위문공연을 다녔다. 아직도 그의 얼굴 오른쪽엔 중앙아시아 오지와 사막지대를 다니다 생긴 화상 자국이 벌겋게 남았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중앙아시아 문화예술교류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을 보면 조선에서 쓰던 말을 그대로 써요. 겨울은 석 달 동안 추운 계절이니까 ‘삼동이’라 부르고, 겨루다는 ‘비개뜬다’고 말하죠. 얼음장 속에 화석이 담긴 것처럼 타임캡슐 속에 우리 문화가 봉인돼 있는 거예요.”
그는 전통이 사라지는 시대에 오히려 먼 대륙에서 한민족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며 고려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2007년부터 남양주시와 협력해 ‘삼정공무원’상을 만들었다. 강영훈 전 총리는 지난해 정직하고 정의롭고 정도대로 일하는 ‘삼정공무원’상을 받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유명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면 그 이름이 헛된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정부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니 공직부패가 나라를 흔드는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그의 활동 중심에는 한민족을 생각하는 ‘충(忠)’이 있다.
“좌파다 우파다, 현충일에까지 이데올로기를 입히는 건 문제예요. 단세포적으로 정치 현상을 바짝 눈앞에 들이대고 보면 현충일의 의미를 찾을 수 없죠. 이데올로기의 거품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려면 나라를 생각하는, 멀리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이 행사를 주관한 곳은 한명희(74) 씨가 이끄는 사단법인 이미시문화서원. 한씨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이렇다 할 추념 공원 하나 없다며 ‘행사를 위한 행사’만 여는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영국 ‘더 타임스’의 앤드루 새먼 기자는 6·25전쟁을 보물이라고 칭했습니다. 전쟁은 관광자원으로 쓸 수도 있고, 국론통일의 방법으로도 쓸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기틀이라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이 거대한 보물창고를 하나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씨는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로 시작하는 가곡 ‘비목(碑木)’의 작사가다. TBC PD로 재직하던 1968년 당시 우리 가곡이 너무 부족한 현실이 안타까웠던 그는 음악가 장일남 씨와 “신곡을 하나 만들자”며 즉석에서 ‘비목’을 썼다. ‘비목’엔 ROTC 시절 강원 화천군에서 십자 나무만 세워져 있던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본 그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64년 임관해 비무장지대(DMZ)에서 근무할 때인데 나무에는 실탄 파편이 박혔고, 주변에는 해골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쟁이 가깝게 느껴졌죠.”
우리 가곡, 우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학시절부터 나타났다. 그가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할 1960년대만 해도 국악은 천대받았다. 가야금을 들고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기생’이라고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그는 국악과 민족의 얼에 대한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1990년대 그의 인생 황금기는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펼쳐졌다.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과의 교류가 전무하던 당시, 그는 중앙아시아 전통음악계와 인연을 맺고 고려인을 위해 20년 동안 위문공연을 다녔다. 아직도 그의 얼굴 오른쪽엔 중앙아시아 오지와 사막지대를 다니다 생긴 화상 자국이 벌겋게 남았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중앙아시아 문화예술교류회장으로도 활동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을 보면 조선에서 쓰던 말을 그대로 써요. 겨울은 석 달 동안 추운 계절이니까 ‘삼동이’라 부르고, 겨루다는 ‘비개뜬다’고 말하죠. 얼음장 속에 화석이 담긴 것처럼 타임캡슐 속에 우리 문화가 봉인돼 있는 거예요.”
그는 전통이 사라지는 시대에 오히려 먼 대륙에서 한민족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며 고려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2007년부터 남양주시와 협력해 ‘삼정공무원’상을 만들었다. 강영훈 전 총리는 지난해 정직하고 정의롭고 정도대로 일하는 ‘삼정공무원’상을 받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유명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면 그 이름이 헛된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정부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니 공직부패가 나라를 흔드는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그의 활동 중심에는 한민족을 생각하는 ‘충(忠)’이 있다.
“좌파다 우파다, 현충일에까지 이데올로기를 입히는 건 문제예요. 단세포적으로 정치 현상을 바짝 눈앞에 들이대고 보면 현충일의 의미를 찾을 수 없죠. 이데올로기의 거품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려면 나라를 생각하는, 멀리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