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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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극좌 상관없다 팍팍한 살림 펼 수 있다면

집권당 갈아치우는 유럽 민심에 제3정당 돌풍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pm

    입력2012-05-21 1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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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각국 정치판이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국가 재정위기에 따른 경제난으로 민심이 요동치면서 극우와 극좌는 물론 포퓰리즘적 정당들이 급부상하고 있는 것.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의회 진출은 꿈도 꿀 수 없던 정당들이 기성 정당들에 강력하게 도전하면서 정국의 핵으로 등장했다. 이른바 ‘제3정당’ 돌풍으로 자칫하면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제3정당의 급부상은 2009년 시작된 유럽 재정위기에서 비롯했다. 경제난으로 유럽 각국 선거에서 ‘무조건 정권 교체’ 민심이 도미노 현상을 보이고, 제3정당들은 유권자의 분노와 좌절감을 이용해 득세하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그리스부터 살펴보자. 5월 6일 실시한 그리스 총선에서 집권 연정을 구성해온 중도우파(신민주당)와 중도좌파(사회당)는 각각 108석(득표율 18.85%)과 41석(13.19%)을 차지하면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반면 긴축재정에 반대해온 극좌파(급진좌파연합)는 52석(16.77%)을 차지하며 제2당으로 올라섰다. 극우파인 황금새벽당은 21석(6.97%·제6당)을 얻으며 사상 처음 의회에 진출했다. 그리스는 6월 17일 재선거를 실시해야 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이러한 투표 결과로는 어느 정당도 다른 정당과 연정을 구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난세의 영웅 vs 혹세무민

    그리스는 2010년 5월과 올해 2월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대규모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정부지출 삭감,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 임금 삭감 및 감원, 연금 축소, 국유재산 매각 등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해왔다. 현재 그리스 경제는 완전히 붕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 실업률이 22%, 특히 청년층 실업률이 50%에 달한다.



    긴축정책으로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임금이 반 토막 난 노동자들의 항의 시위와 집회가 그리스 전역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4월에는 77세 노인이 수도 아테네 의사당 인근에서 머리에 권총을 쏴 자살하는 등 연금생활자들이 목숨을 끊는 사건도 잇따라 발생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다 보니 기성 정당에 대한 국민의 반감과 혐오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다.

    급진좌파연합은 이 같은 민심을 간파하고 ‘구제금융 지원 조건 파기’ ‘긴축재정 중단’을 공약으로 내세워 총선에서 사실상 승리했다. EU는 그리스가 긴축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구제금융을 지원할 수 없다고 공언했다. EU의 지원이 없으면 그리스는 국가 부도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급진좌파연합은 유로존 탈퇴도 불사하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급진좌파연합은 그리스어로 ‘뿌리와 가지’라는 뜻의 ‘시리자’라고 불린다. 시리자당은 2004년 좌파운동과 생태운동당, 그리스공산당기구(KOE), 좌파행동통합운동(KEDA) 등 급진좌파 성향 11개 정당의 연합체 형태로 탄생했다. 2004년 총선에서 의원 6명(3.3%)을 배출한 이후 줄곧 군소정당에 머물렀으나 이번 총선에서 당당히 제2당에 등극했다.

    극우·극좌 상관없다 팍팍한 살림 펼 수 있다면

    ‘복지 천국’ 북유럽에서도 극우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시리자당의 알렉시스 치프라스(38) 대표는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1974년 아테네에서 태어난 치프라스 대표는 고교 재학시절부터 공산당 청년조직 등에서 기성체제와 세계화 등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다. 2006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아테네 시장선거에 출마해 3위에 오르면서 그리스 정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2008년 시리자당 대표가 됐고, 2009년 의원에 당선했다. 평소 넥타이를 매지 않고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그는 호감을 주는 잘생긴 외모를 지녔다. 의회에서 폭언을 서슴지 않는 독설가이기도 하다. 아무런 대안 없이 그리스의 생명줄인 구제금융을 끊으려는 그에게 “난세의 영웅이 아니라 혹세무민하는 선동가”라는 비판이 따른다.

    황금새벽당은 시리자당보다 더 위험하다. 신(新)나치를 표방하는 극우정당으로 이번 총선에서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터키와의 국경지대에 지뢰를 깔자’는 극단적 공약을 내놓았다. 긴축정책에도 반대한다. 1993년 창당한 황금새벽당은 2009년 총선 당시 득표율이 0.29%였지만, 경제난이 심각해지자 그 화살을 불법 이민자들에게 돌리며 지지세를 키워왔다.

    황금새벽당 당원들은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Hakenkreuz·卍)와 비슷한 갈고리 문양이 새겨진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모든 당원은 나치식 경례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당원들은 길거리에서 이민자를 공격하는 등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황금새벽당을 창당한 인물은 그리스 특수부대 출신인 니콜라오스 미칼로리아코스(55) 대표다. 아테네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그는 각종 시위와 폭력 사태에 개입해왔으며 총기와 폭발물 소지 혐의로 1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 프랑스 유권자 1/3 극단 지지

    좌파 대통령이 탄생한 프랑스에서도 극우파와 극좌파 정당의 약진이 눈에 띈다. 4월 22일 대선 1차 투표 결과를 보면 극우파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가 득표율 17.9%를 기록하며 3위에 올랐다. 1972년 창당 이후 가장 높은 득표율이다. 국민전선은 6월 총선에서 원내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다. 프랑수아 올랑드 당선자가 속한 사회당보다 더 급진적인 좌파전선의 장 뤼크 멜랑숑 대표도 11.1%로 4위를 차지했다. 르펜 대표의 득표율과 합하면 29%로 프랑스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이 양 극단을 지지한 셈이다.

    프랑스에서 극우와 극좌가 득세하는 이유는 물론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실정과 프랑스의 경제난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 정치의 두 축인 대중운동연합(우파)과 사회당(좌파)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작용한 측면도 있다. 두 당은 모두 유럽 통합과 유로화 체제를 지지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 상당수는 거기에 반대했다. 극우파인 르펜 대표는 프랑스가 유로화를 포기하고 프랑화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극좌파인 멜랑숑 대표도 유럽 통합에 반대했다.

    주목할 점은 극우정당들이 유럽 전역에서 강세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에서는 4월 23일 헤이르트 빌더르스(48) 대표가 이끄는 극우파(자유당)가 EU의 재정긴축 요구에 반발하면서 마르크 뤼터 총리가 이끌어온 내각을 붕괴시켰다. 자유당은 2010년 총선에서 16%를 득표해 제3당 지위를 차지하면서 우파 정당인 자유민주당과 기독민주당의 연정에 참여해왔다.

    극우·극좌 상관없다 팍팍한 살림 펼 수 있다면

    경기 침체로 유럽의 무슬림 혐오주의가 확대되고 있다.

    빌더르스 대표는 2005년 유럽 통합 반대와 반(反)이슬람주의를 내걸고 자유당을 창당했다. 그는 자신을 ‘이슬람교의 적’이라 규정하고, 이슬람교를 가리켜 폭력과 증오의 종교라고 비난했다. 이슬람 경전 코란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비유하는가 하면 의회에서 무슬림 이민 금지, 이슬람 사원 건설 금지, 이슬람 학교 폐쇄 등을 추진했다. 2008년 이슬람교가 테러를 조장한다는 주장을 담은 영화를 제작했다가 증오 범죄 혐의로 법정에 섰지만 무죄판결을 받았다.

    자유당이 긴축정책에 반대하며 내세운 명분은 국민을 고통에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속셈은 긴축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이용해 조기 총선에서 의석을 늘리려는 것이다. 긴축정책을 추진해온 자유민주당과 기독민주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게 네덜란드 국민의 여론인 만큼 9월 12일 실시하는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하고 빌더르스가 차기 정부의 총리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복지 천국’에서도 극우주의

    실제로 재정위기가 본격화한 이후 총선이나 대선을 실시한 유럽 국가에서 집권당이 모두 패배했다. 강력한 긴축정책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럽인들이 선거에서 집권당을 갈아치우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기존 정치체제에 강한 불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복지 천국’이라 부르는 북유럽에서도 극우정당이 득세하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진짜핀란드인(True Finns·TF)당이 득표율 19%로 39개 의석을 차지하며 제3당이 됐다. 1995년 창당한 진짜핀란드인당은 2007년 총선에서는 4.1%를 득표해 6석을 얻는 데 그쳤다. 티모 소이니(49) 대표는 그동안 반이슬람과 반이민 등 국수주의적 주장을 펴왔다. 지난해 총선에서 진짜핀란드인당이 대약진한 배경에는 높은 실업률과 복지 축소 여파로 각박해진 핀란드 국민의 삶이 있다.

    스웨덴에서도 2010년 9월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스웨덴 민주당이 5.7%를 득표해 사상 처음으로 원내에 진출했다. 당시 스웨덴 민주당은 국가보조금을 받으려고 줄을 서 있던 한 백인이 부르카를 착용한 무슬림 여성들에게 떠밀리는 내용의 선거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다. 2009년 노르웨이 총선에서도 이민 반대를 내세운 노르웨이 진보당이 득표율 22.9%로 제2당 지위를 차지한 바 있다. 현재 EU 27개 회원국 가운데 15개국, 비(非) EU 회원국인 노르웨이와 스위스를 포함하면 유럽 17개국에서 극우정당이 의회에 진출한 상태다.

    유럽에선 이미 무슬림 혐오증을 뜻하는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라는 용어가 사회에 깊이 침투해 있다. 재정위기와 경기침체로 반이슬람 정서가 더욱 심해지는 분위기다. 저소득층 백인 가운데 상당수가 임금이 낮은 무슬림 이민자에 밀려 일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한다.

    유럽 각국의 무슬림 인구는 급증하는 추세다. EU 회원국 전체 인구 중 무슬림 수는 5100만 명으로 5% 정도다. 유럽 인구 관련 연구기관들은 2015년까지 무슬림 인구가 지금의 2배가 되리라고 예측한다. 이 때문에 유럽이 ‘유라비아(Eurabia)’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유라비아는 유럽과 아라비아를 합친 말이다.

    # 유럽에 반이슬람주의 확산

    극우정당의 득세가 유럽 사회의 반이슬람주의와 관련 있다는 건 결국 유럽 사회의 장점인 다원주의가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조제 마누엘 두랑 바호주 EU 집행위원장도 “유럽 재정위기가 포퓰리즘에 정치적 토대를 제공한다”며 우려했다. 유럽 각국에서 극우정당이 부상하는 건 편협한 민족주의가 발호하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극우·극좌 정당의 대약진과 함께 무이념을 표방하는 신생 정당들의 부상도 만만치 않다. 독일에서는 해적당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해적당은 5월 초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지방선거에서 각각 7.5%와 8% 득표율로 주 의회 입성에 성공했다. 독일 지방선거 결과는 연방 상원 구성과 연결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해적당은 지난해 9월 베를린 주 지방선거선거에서 8.9%를 득표하면서 처음 주 의회에 진출했다.

    2006년 창당한 해적당을 지지하는 계층은 대부분 기존 정당에 실망한 젊은이들이다. 2만1600명 당원의 평균 연령은 31세다. 자신들을 ‘정보화 사회정당’이라고 규정하는 해적당은 이념을 거부한다. 시민권 확대 및 지적재산권 개혁, 무상교육이 핵심 공약이다. 교육과 정보에 자유롭게 접근할 권한을 모든 인간의 고유 권리라고 본다.

    이탈리아에선 부패권력 심판을 전면에 내세운 5스타운동당이 지지 기반을 급속히 확대해나가고 있다. 이 당은 2009년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64)가 인터넷으로 지지자들을 모아 만들었다. 그릴로는 1987년 총리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이 금지된 이후 거리 공연과 인터넷 블로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기성 정치권을 신랄하게 비판해왔다. 이 당이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는 것은 기존 정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지금 유럽 각국 유권자들의 정서는 ‘무조건 바꾸고 보자’에 가깝다. 정책을 잘못 추진했거나 경제위기를 초래한 정권을 투표로 심판하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유권자가 갖는 권리다. 하지만 일부 포퓰리스트들이 그러한 유권자 정서를 이용해 득세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유럽 각국의 경제난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제3정당의 돌풍이 계속될 경우 자칫 ‘민주주의의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럽 정치학자들은 “(이를 막기 위해) 기존 정당의 뼈를 깎는 반성과 개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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