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기자회견에서 “남편은 기소 청탁을 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나경원 전 의원.
애초 지지부진하던 경찰 수사가 활기를 띠게 된 것은 박 검사의 진술서 덕분이다. 박 검사는 검찰을 통해 경찰에 제출한 진술서에서 “김 판사로부터 기소 청탁을 받은 게 사실”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 그의 진술서 전문을 단독 입수한 ‘주간동아’는 국민적 관심이 쏠린 사건인 만큼 국민의 알 권리와 공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해 그 내용을 가감 없이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언론이 진술 취지를 보도하긴 했지만 전문을 공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수사와 기소, 재판이 일사천리로”
박 검사의 진술에 비춰보면 김 판사는 가벼운 부탁을 한 것이 아니라 종용 혹은 압력에 가까운 청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박 검사가 김 판사의 청탁 내용을 후임 검사에게 인계한 것만 봐도 그렇다. 2006년 1월 박 검사는 김 판사의 전화를 받은 지 열흘 뒤 출산휴가를 떠났고, 후임 최 검사는 그해 4월 나 전 의원을 비방한 누리꾼 김모 씨를 기소했다. 김씨는 블로그에 나 전 의원을 친일파라고 쓴 글을 올렸다가 2005년 12월 나 전 의원 측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된 바 있다.
이 사건이 불거진 것은 지난해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전 주간지 ‘시사IN’ 주진우 기자가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를 통해 “나경원 후보의 남편 김재호 판사가 검사에게 기소를 청탁했다”고 폭로한 이후다. 나 후보 측이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주 기자를 경찰에 고발하자 주 기자는 명예훼손 및 무고 혐의로 맞고소했다. 이어 2월 나꼼수가 “검찰 자체 조사에서 박은정 검사가 기소 청탁 사실을 시인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이 사건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김 판사가 전화한 이후 이 사건의 수사와 기소, 재판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형도 혐의에 비해 과중하다”며 “판검사가 의기투합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누리꾼 김씨는 기소된 지 한 달 만인 2006년 5월 1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벌금 700만 원을 선고받았다. 그해 12월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법조계 일부에서는 통상 200만 원의 벌금형을 받는 유사사건에 비춰 김씨에 대한 양형이 과중하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소신에 어긋나는 행동 하지 않는 성격
경찰 관계자는 “판검사가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한 편일 것이라는 국민의 막연한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 첫 사례가 아닌가 싶다”며 “자신을 법 위에 놓는 판검사의 특권의식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 관계자는 “경찰이 수사하는데 검찰이 자체 조사에 나선 점도 특권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검찰 시각은 조금 다르다. 서울중앙지검 고위 간부는 “판사가 그런 전화를 한 것 자체는 잘못”이라면서도 “검사가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문제 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수통인 중견 간부는 “기소 청탁이 문제가 아니라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하다”며 “유사사건과 비교해 기소와 양형이 적절했는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판사 출신으로 김 판사 부부와 가깝다는 한 변호사는 “개인적으로 잘 아는 검사라면 전화할 수도 있다”면서 “내가 아는 김 판사는 안 되는 걸 되게 하려고 억지를 부릴 사람이 아니다”라며 김 판사를 편들었다. 반면 서울지역 한 부장판사는 몹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원칙에 어긋나는 짓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될 일이다. 사건과 관련해 검사에게 전화하는 건 판사들이 극도로 꺼리는 일이다. 그것도 알아봐달라는 정도가 아니라 처벌해달라는 취지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 검사는 선후배 사이에서 강직한 검사로 통한다. 사법시험 동기인 한 검찰 간부는 “결기가 있는 검사”라며 “소신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평했다. 사법연수원 시절 그를 애제자로 뒀다는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심지가 곧아 청탁이나 압력이 통할 성격이 아니다”라며 “나꼼수 때문에 괜찮은 검사 하나 잃게 생겼다”고 안타까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