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그리고 가야금…. ‘우리 것이 좋다’는 명제를 알긴 하지만, 가슴으로 받아 안기는 힘든 시대다.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이 같은 난제를 30년 이상 고민해온 학자가 있다. 미디어적 도전과 실험을 끊임없이 반복해온 터라 어느새 ‘국악계의 잔 다르크’가 됐다. 숙명가야금연주단(이하 숙가연)을 이끄는 송혜진(51) 교수 얘기다.
숙가연은 대한민국 국악계가 배출한 가장 모던하고 참신한 브랜드다. 한국 전통문화를 해외에 멋들어지게 소개하고픈 기획자라면 누구라도 먼저 숙가연을 떠올린다. 2006년 한 아파트 광고를 통해 선보인 가야금 캐논변주곡, 비보이와의 협동공연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퍼져 나간 이 ‘메가 히트’ 동영상은 국악의 현대화 바람을 대중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1999년 창단 때부터 자문역으로 관여한 이 연주단을 2005년 9월 갑자기 떠안았어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죠. ‘우린 망했다’는 수군거림이 들렸을 정도니까요. 저는 이론교수지 실기교수가 아니었거든요. 그 즉시 교수실을 버리고 조교실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때부터 저의 투쟁이 시작된 거죠.”
사실 그의 진짜 투쟁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한 소녀는 세상의 강고한 벽에 가로막혔다. 친구들은 ‘국악과’라고 소개하면 당황한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원로교수는 국악과 학생에게 “주눅 들지 마라”라고 격려했다.
세계적인 국악 작곡가를 꿈꾸던 소녀는 먼저 국악의 진실을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국악을 연주가 아닌 한국 전통문화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악 선입관 깨고자 국악에 몰입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들어가 5년간 기숙사에서 먹고 자면서 우리의 문학과 미술, 음악의 원류를 파고들었어요. 조동일 교수님으로부터 인문학적 기반의 ‘융합과 통섭의 교육법’을 습득하는 행운을 누렸죠. 그 덕분에 동양문학사적 관점에서 국악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어요.”
지난 십수 년간 그는 대한민국 국악계의 가장 친절한 ‘해설자’로 통했다. 국악을 다룬 출판과 방송의 중심에 늘 그가 있었다. 그 이력은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박사과정 입학 직전에 ‘창극, 미래한국 음악극으로의 도약을 위하여’라는 음악평론이 당선해 당당히 평론가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국악에 대한 ‘평론’보다 ‘소개’에 목말라했다.
“신춘문예 이후 주목받았고, 지도교수를 따라 KBS에 드나들다 국악 프로그램 리포터로 활약했어요. 공연을 소개하는 일이었죠. 방송작가로서 국악을 해설하는 일에도 매진했어요. 한 번은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M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20분간 국악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겁도 없이 대중 방송에 나가기 시작했죠.”
팝송을 주로 다루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국악을 소개한 경험은 그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줬다. 전문가 처지에서 아무리 의미 있는 선곡을 해도 팝송 DJ의 눈높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단 20초도 견뎌내지 못했던 것. 그런 식으로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훈련을 하면서 전통음악의 한계와 가능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국악인의 오랜 소망이던 ‘국악 FM’을 탄생시킨 산파다. 1989년에 국립국악원이 설립됐고, 학예연구관으로 일하면서 방송사와 함께 국악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그는 국악이 미디어로부터 소외됐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래서 이내 ‘국악전문방송’이라는 화두를 내걸고 긴 투쟁에 들어갔다. 국악 대중화를 위해 ‘아나듀오(아나운서+프로듀서+오퍼레이터)’로 동분서주한 끝에 국악FM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 같은 대중적 활동에 전통파의 반발은 없었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눈치 볼 선후배가 적었어요. 국악 집안도 아니고 심지어 국악고 출신으로 실기에 몰입한 것도 아니고…. 그 덕분에 재밌겠다고 생각한 실험은 모조리 제가 처음 시도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숙대 전통문화대학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학 동기자 국내의 대표 가야금 연주자인 김일륜 교수가 숙가연을 이끌던 곳이다. 그는 자문역으로 숙가연에 참여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거의 모든 국악 전공 교수는 자기 제자를 중심으로 연주단을 꾸렸다. 이런 상황에서 얼떨결에 숙가연 운영 책임이 그의 몫이 됐다.
이후의 혁명적 스토리는 비교적 잘 알려졌다. 전통 계승자를 버리고 혁신의 타이틀을 선점한 것이다. 비보이를 전면에 내세운 가야금 캐논변주곡으로 3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팔아치우며 국악 대중화의 첨병으로 떠올랐다. 국악 그룹으로는 처음으로 서양음악에 대한 깊은 연구와 성찰도 본격화했다. 나아가 전문 감독과 연주 코치, 심지어 전속 작곡가까지 갖춘 현대적 연주단 체계를 갖췄고, 이제 연간 공연 횟수 100여 회가 넘는 탄탄한 국악오케스트라로 발전했다.
‘배우고 섞어서 창조한다’
“빼앗긴 국악 영토를 되찾고자 지방 축제에서부터 패션쇼장, 야구장까지 안 다닌 곳이 없어요. 대중과 만나는 일이 가장 시급했거든요. 최근 가장 보람찬 일은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된 거예요. 국악전공자들이 무대를 누비며 안정적으로 실력을 키우고 자아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셈이죠.”
그의 파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가야금의 시장성을 탐구한 끝에 태교음악에까지 시장을 넓히고 애니메이션과 조화를 이룬 스토리텔링 콘서트 ‘떼이루 떼이루 따’를 기획하기도 했다. 지난 30년간 국악 세계화를 모색한 그의 실천적 도전의 한 과정인 셈이다.
대중과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의 키워드는 ‘배우고, 섞어서, 창조한다’로 정리할 수 있다. 한국 전통문화의 기원을 탐구해온 학자답게 그의 꿈은 언제나 야심차고 파격적이다. 숙가연을 미국의 앙상블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 못지않은, 가장 실험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연주단으로 키우는 것이다.
“심지어 가야금까지도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창조적 파괴를 준비하고 있어요. 우륵시대에 연주한 노래가 진짜 우리 고유의 음악이었을까요. 이제는 우리만의 어법을 만들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진짜 한류의 시작이겠죠.”
다소곳이 소통에 매진하던 그의 눈빛에서 ‘야심 찬 문화 최고경영자(CEO)’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마도 곧 폭발하리라. 물론 그 파괴력은 가야금을 버리는 것 그 이상일 터다.
숙가연은 대한민국 국악계가 배출한 가장 모던하고 참신한 브랜드다. 한국 전통문화를 해외에 멋들어지게 소개하고픈 기획자라면 누구라도 먼저 숙가연을 떠올린다. 2006년 한 아파트 광고를 통해 선보인 가야금 캐논변주곡, 비보이와의 협동공연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퍼져 나간 이 ‘메가 히트’ 동영상은 국악의 현대화 바람을 대중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1999년 창단 때부터 자문역으로 관여한 이 연주단을 2005년 9월 갑자기 떠안았어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죠. ‘우린 망했다’는 수군거림이 들렸을 정도니까요. 저는 이론교수지 실기교수가 아니었거든요. 그 즉시 교수실을 버리고 조교실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때부터 저의 투쟁이 시작된 거죠.”
사실 그의 진짜 투쟁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한 소녀는 세상의 강고한 벽에 가로막혔다. 친구들은 ‘국악과’라고 소개하면 당황한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원로교수는 국악과 학생에게 “주눅 들지 마라”라고 격려했다.
세계적인 국악 작곡가를 꿈꾸던 소녀는 먼저 국악의 진실을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국악을 연주가 아닌 한국 전통문화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악 선입관 깨고자 국악에 몰입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들어가 5년간 기숙사에서 먹고 자면서 우리의 문학과 미술, 음악의 원류를 파고들었어요. 조동일 교수님으로부터 인문학적 기반의 ‘융합과 통섭의 교육법’을 습득하는 행운을 누렸죠. 그 덕분에 동양문학사적 관점에서 국악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어요.”
지난 십수 년간 그는 대한민국 국악계의 가장 친절한 ‘해설자’로 통했다. 국악을 다룬 출판과 방송의 중심에 늘 그가 있었다. 그 이력은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부터 빛나기 시작했다. 박사과정 입학 직전에 ‘창극, 미래한국 음악극으로의 도약을 위하여’라는 음악평론이 당선해 당당히 평론가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국악에 대한 ‘평론’보다 ‘소개’에 목말라했다.
“신춘문예 이후 주목받았고, 지도교수를 따라 KBS에 드나들다 국악 프로그램 리포터로 활약했어요. 공연을 소개하는 일이었죠. 방송작가로서 국악을 해설하는 일에도 매진했어요. 한 번은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MBC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20분간 국악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겁도 없이 대중 방송에 나가기 시작했죠.”
팝송을 주로 다루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국악을 소개한 경험은 그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줬다. 전문가 처지에서 아무리 의미 있는 선곡을 해도 팝송 DJ의 눈높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단 20초도 견뎌내지 못했던 것. 그런 식으로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는 훈련을 하면서 전통음악의 한계와 가능성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국악인의 오랜 소망이던 ‘국악 FM’을 탄생시킨 산파다. 1989년에 국립국악원이 설립됐고, 학예연구관으로 일하면서 방송사와 함께 국악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그는 국악이 미디어로부터 소외됐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래서 이내 ‘국악전문방송’이라는 화두를 내걸고 긴 투쟁에 들어갔다. 국악 대중화를 위해 ‘아나듀오(아나운서+프로듀서+오퍼레이터)’로 동분서주한 끝에 국악FM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 같은 대중적 활동에 전통파의 반발은 없었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눈치 볼 선후배가 적었어요. 국악 집안도 아니고 심지어 국악고 출신으로 실기에 몰입한 것도 아니고…. 그 덕분에 재밌겠다고 생각한 실험은 모조리 제가 처음 시도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숙대 전통문화대학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대학 동기자 국내의 대표 가야금 연주자인 김일륜 교수가 숙가연을 이끌던 곳이다. 그는 자문역으로 숙가연에 참여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거의 모든 국악 전공 교수는 자기 제자를 중심으로 연주단을 꾸렸다. 이런 상황에서 얼떨결에 숙가연 운영 책임이 그의 몫이 됐다.
이후의 혁명적 스토리는 비교적 잘 알려졌다. 전통 계승자를 버리고 혁신의 타이틀을 선점한 것이다. 비보이를 전면에 내세운 가야금 캐논변주곡으로 3만 장 이상의 앨범을 팔아치우며 국악 대중화의 첨병으로 떠올랐다. 국악 그룹으로는 처음으로 서양음악에 대한 깊은 연구와 성찰도 본격화했다. 나아가 전문 감독과 연주 코치, 심지어 전속 작곡가까지 갖춘 현대적 연주단 체계를 갖췄고, 이제 연간 공연 횟수 100여 회가 넘는 탄탄한 국악오케스트라로 발전했다.
‘배우고 섞어서 창조한다’
“빼앗긴 국악 영토를 되찾고자 지방 축제에서부터 패션쇼장, 야구장까지 안 다닌 곳이 없어요. 대중과 만나는 일이 가장 시급했거든요. 최근 가장 보람찬 일은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된 거예요. 국악전공자들이 무대를 누비며 안정적으로 실력을 키우고 자아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셈이죠.”
그의 파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가야금의 시장성을 탐구한 끝에 태교음악에까지 시장을 넓히고 애니메이션과 조화를 이룬 스토리텔링 콘서트 ‘떼이루 떼이루 따’를 기획하기도 했다. 지난 30년간 국악 세계화를 모색한 그의 실천적 도전의 한 과정인 셈이다.
대중과 소통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의 키워드는 ‘배우고, 섞어서, 창조한다’로 정리할 수 있다. 한국 전통문화의 기원을 탐구해온 학자답게 그의 꿈은 언제나 야심차고 파격적이다. 숙가연을 미국의 앙상블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 못지않은, 가장 실험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연주단으로 키우는 것이다.
“심지어 가야금까지도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창조적 파괴를 준비하고 있어요. 우륵시대에 연주한 노래가 진짜 우리 고유의 음악이었을까요. 이제는 우리만의 어법을 만들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진짜 한류의 시작이겠죠.”
다소곳이 소통에 매진하던 그의 눈빛에서 ‘야심 찬 문화 최고경영자(CEO)’의 기운이 느껴진다. 아마도 곧 폭발하리라. 물론 그 파괴력은 가야금을 버리는 것 그 이상일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