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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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풋사랑 K가 있었다

  • 입력2011-09-05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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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도 풋사랑 K가 있었다
    Absolute K

    (1966.2.16~2008.6.9)

    마침내 우리는 편지에서 뛰쳐나와

    맨몸의 영혼으로 만났습니다

    하마터면 따라 웃을 뻔했어요 하지만



    미소 뒤에 병풍 뒤에 첫사랑의 주검을 두고

    고깃국을 먹는 건 어쩐지 으스스한 일

    뜨거운 것들은 모두

    김을 피워올리다 별안간 식어버리죠

    뒤늦게 당신의 삶을 잘게 찢어 먹는다는 생각

    너무 오래 끓인 고기는

    젖은 편지지처럼 싱겁기 짝이 없다는 생각

    한 번도 본 적 없는 당신의 맨발은

    불 꺼진 빵집 진열장에 놓인 어제 구운 식빵처럼

    가지런하고 적막할까요

    귀여운 여자가 당신 어머니 품에서 울고 있어요

    당신에게도

    편지 바깥의 삶이 있었나요

    18년 동안의 편지가 창틈으로 거듭 들이닥치는

    오늘,

    우리의 안녕은 흐리고 때때로 소나기

    글자들은 날아오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표정이네요

    하얗고 얇고 가벼운 것들은 모두

    비행에 지친 새처럼 축 늘어졌습니다

    ― 정한아 ‘어른스런 입맞춤’(문학동네, 2011)에서

    내게도 풋사랑 K가 있었다

    중학생 때 펜팔이란 걸 한 적 있다. 어느 날 조회시간에 선생님이 상자 하나를 갖고 들어오셨다. 거기에는 주소가 적힌 종이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추첨하듯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는 돌아가면서 종이를 한 장씩 뽑았다. 종이에 적힌 그 아이가 앞으로 1년 동안 내 펜팔친구가 된다고 했다. 내가 뽑은 종이에는 거제도에 사는 한 여자아이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가 내 인생 최초의 K였다. 나는 K가 사는 집을 가만히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창문을 열면 파도소리가 들리는 집. 그 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으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할 테지. 거제도가 섬이라는 것밖에 알지 못했던 나는 그곳이 천국이라고 지레 단정 지었다.

    그때부터 나와 K는 한 달에 한두 통씩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날아드는 편지는 소년의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나는 내 이야기를 그다지 많이 하지 않았던 반면, K는 자기의 사정을 가감 없이 다 털어놓았다. 나는 그의 막막한 사정을 묵묵히 들어줬다. K는 “편지 바깥의 삶”을 편지지 안에 가두고 싶다고 했다. 그래야 마음이 좀 후련하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K의 편지에는 쓸쓸하다는 말이 걷잡을 수 없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도시로 이사 갔다는 얘기, 엄마와 아빠가 기나긴 싸움에 지쳐 결국 헤어졌다는 얘기, 아빠가 뭍으로 영영 나가버렸다는 얘기, 할머니의 입이 돌아갔다는 얘기 등등. 이런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귀가, 가슴이 다 먹먹했다. “우리의 안녕은 흐리고 때때로 소나기”가 퍼부었다. 나는 편지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가 점점 더 두려워졌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에 여념 없다 보니 우리가 편지를 나누는 횟수도 몰라보게 줄었다. 나는 섬이 너무 멀게, 아득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던 시기였다. 평생 단 한 번이라도 거제도에 가게 될지, 파도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을 날이 과연 찾아올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연달아 도착한 K의 편지에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K에 대한 나의 마음이 “별안간 식어버”렸다고도, 누군가의 푸념을 듣기엔 나에게 여유가 없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펜팔은 끝났다. 내가 끝내버렸다. 구슬픈 사연을 가슴속에 차곡차곡 쟁여둘 만큼, 그 당시 나는 건강하지 않았다. K는 아마 내가 이사를 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못난 나는 그녀를 “어제 구운 식빵”처럼 또 한 번 쓸쓸하게 만들어버렸다.

    내게도 풋사랑 K가 있었다
    얼마 전 거제도에 갔다.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서랍 깊숙이 들어 있던 편지를 끄집어내듯, 10년 만에 K를 떠올렸다. 거제도에 가서야 그가 떠올랐다는 게 좀 부끄러웠다. 쪼그려 앉아 파도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어느새 소년이 된 것 같았다. K는 잘 살고 있을까. 여전히 하루에도 열두 번씩 쓸쓸할까. 뭍으로 나간 아버지와 친구들을 다시 만났을까. 따뜻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꿈은 이뤘을까. 이러거나 저러거나 K는 나를 잊었을 것이다. 풋사랑은 너무 쉽게 식어버리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싱거워진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쑥 성을 내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피식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비행에 지친 새처럼 축 늘어”진 “맨몸”으로 목욕탕에 간다. 아무 생각 없이 때를 벅벅 민다. 내게도 한때 K가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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