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중견 감독 파블로 라라인은 지난해 독보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전기영화 두 편을 동시에 만든 것이다. 재클린 케네디가 주인공인 ‘재키’, 칠레 출신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주인공인 ‘네루다’다. 특히 ‘네루다’는 감독의 진보적인 정치관과 맞물려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시인 네루다는 칠레 공산당 소속 상원의원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 정부의 체포명령을 피해 일정 기간 해외로 망명했다. 신작 ‘네루다’는 1948년부터 경찰 추적을 받던 시인이 아르헨티나를 거쳐 유럽으로 도주한 2년간의 ‘탈출기’를 그리고 있다.
‘네루다’는 일반 전기영화와는 대단히 다른 틀을 갖고 있다. 작품을 통해 알려진 시인의 파란만장한 사랑(‘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혹은 정치적 분노(‘모두의 노래’)가 담긴 흥분된 드라마를 기대했다간 약간 당황할 수 있다. 라라인 감독의 창작 태도는 아르헨티나 대작가 호르헤 보르헤스를 닮았다. 현실과 상상이 뒤섞이고, 농담과 패러디가 사실을 흔든다. 보르헤스 특유의 가공된 인물이 내레이터로 등장해 없었던 일을 사실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도 한다.
‘네루다’의 화자는 시인을 쫓는 경찰 오스카(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분)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배우가 캐스팅된 데서 짐작하듯 ‘네루다’의 사실상 주역은 오스카다. 그는 보르헤스의 주인공들처럼 가공의 인물이다. ‘네루다’엔 시인 네루다의 실제 삶과 오스카가 지어낸 가공의 삶이 뒤섞여 있다. 파시스트인 오스카는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부친은 전설적인 경찰이라고 여긴다. 이름이 같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모친이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였겠지만 오스카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대통령의 비밀명령을 받은 오스카는 의기양양하고, 당장 시인을 체포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품는다.
문제는 책이라곤 읽지 않을 것 같은 오스카가 추적 도중 네루다의 작품을 접하는 데서 생긴다. 네루다가 썼다는 ‘동물원의 여자’를 펼쳐보니, 작가는 오스카의 등장을 예견하고 책표지에 인사말까지 써놓았다. 실제 인물인 네루다가 가공의 인물인 오스카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오스카는 영화가 전개되는 도중 자신이 네루다와 달리 실재가 아닌, 가공의 인물이란 사실을 의식한다. 자신의 운명이 작가 네루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말하자면 ‘네루다’는 작가와 등장인물 사이의 친교를 그린, 혹은 그려가는 허구인 셈이다.
라라인 감독은 ‘네루다’를 통해 흥미로운 도전을 시도했다. 보르헤스의 허구처럼 영화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경찰 오스카를 파시스트로 설정해 네루다에 대한 파격적인 표현도 농담처럼 펼쳐놓는다. “프랑스 말을 멋 부리듯 지껄이는 부르주아에 지나지 않는다”고 욕하는 식이다. 네루다에 대한 흠모와 농담을 뒤섞어,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