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개 한 마리처럼
나는 네 개의 발을 가진다
흰 돌 다음에 언제나 검은 돌을 놓는 사람
검은 돌 다음에 흰 돌을 놓는 사람
그들의 고독한 손가락
나는 네 개의 발을 모두 들고 싶다,
헬리콥터처럼
공중에
그들이 눈빛 없이 서로에게 목례하고
서서히 일어선다
마침내 한 사람과 그리고 한 사람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에서
“네 개의 발을 갖고 싶다”
얼마 전, 어느 비좁은 골목에서 개 한 마리와 마주쳤다. 나는 개를 내려다보고 개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생각하는 동물과 ‘네 개의 발을 가진’ 동물의 위계가 재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개의 눈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개는 잠시 멈칫하더니 벽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준 것이다. 착한 개 앞에서 생각하는 동물은 한없이 초라해졌다. 가만히 다가가 살펴보니, 개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포수를 쏟아낼 듯,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원래 나는 동물을 잘 만지지 못한다. 이질감과 이물감 때문에 온몸에 쫙 소름이 돋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평생을 따르던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존재만이 지을 수 있는, 그 처연한 표정을 차마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비루먹은 개가 죽음 직전에 겨우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낮춰 개의 몸을 쓰다듬어주었다. 네 개의 발을 하나하나 만져주었다. 나의 온기가 네게 전달되리라. 나의 마음이 너를 녹이리라. 간절하게 주문을 외고 또 외면서.
개를 지나쳐 걸어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착한 개는 고개를 숙인 채 한 걸음 한 걸음 비칠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알싸해졌다. 비로소 고독한 표정을 짓는 법을 배우던 날이었다.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외면하는 법을 터득하던 날이었다. 그런 날 밤에는 으레 착한 개가 되는 꿈을 꾼다. 어디론가 터벅터벅, 그러나 또박또박 전진하는 꿈을. 그러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기다렸다는 듯 ‘헬리콥터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착한 개만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꿈만 같은 세상. 거짓말 같은 세상.
시인은 이 풍경을 바둑기사들의 침묵과 대비시킨다. 착한 개의 걸음을 지켜보면서 잔인한 침묵 위로, 황량한 바둑판 위로 두 개의 손만 오가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한 손이 나와서 흰 돌을 두면, 저쪽에서 손을 내밀어 검은 돌을 두는 장면 말이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아니 한 손 한 손 돌을 두다 보면 바둑판이 가득 메워지고 경기는 끝이 난다. 기사들은 ‘눈빛 없이’ 육성도 없이 ‘서로에게 목례하고’ 마침내 361개의 집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손끝으로 하던 고독한 소통이 비로소 막을 내리는 것이다.
첫 문장을 바꿔야겠다. 얼마 전, 어느 비좁은 골목에서 개 한 마리를 만났다. 마주침이 품고 있는 우연성 이상의 무엇이 우리 사이에는 있었다. 마주침이라고 하기에는 그 여운이 너무 길었다. 착한 개처럼 나도 착해지고 싶어졌다. 왼발 다음에 오른발을 내밀고 싶었다. 흰 돌 다음에 검은 돌을 놓고 싶었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독하더라도 그렇게 임무를 완수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오는 어떤 순간. 한 사람과 한 사람은 같이 있지만, 둘 다 외로움을 느낀다. 누구는 너를 이겨서, 또 다른 누구는 너에게 져서. 경기가 끝난 후 악수를 하며 온기를 나누는 게 절실해지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외로워서, 고독해서, 둘이서 함께라면 네 개의 발을 가질 수 있으니까.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나는 네 개의 발을 가진다
흰 돌 다음에 언제나 검은 돌을 놓는 사람
검은 돌 다음에 흰 돌을 놓는 사람
그들의 고독한 손가락
나는 네 개의 발을 모두 들고 싶다,
헬리콥터처럼
공중에
그들이 눈빛 없이 서로에게 목례하고
서서히 일어선다
마침내 한 사람과 그리고 한 사람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에서
“네 개의 발을 갖고 싶다”
얼마 전, 어느 비좁은 골목에서 개 한 마리와 마주쳤다. 나는 개를 내려다보고 개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생각하는 동물과 ‘네 개의 발을 가진’ 동물의 위계가 재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개의 눈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개는 잠시 멈칫하더니 벽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준 것이다. 착한 개 앞에서 생각하는 동물은 한없이 초라해졌다. 가만히 다가가 살펴보니, 개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포수를 쏟아낼 듯,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원래 나는 동물을 잘 만지지 못한다. 이질감과 이물감 때문에 온몸에 쫙 소름이 돋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평생을 따르던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존재만이 지을 수 있는, 그 처연한 표정을 차마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비루먹은 개가 죽음 직전에 겨우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낮춰 개의 몸을 쓰다듬어주었다. 네 개의 발을 하나하나 만져주었다. 나의 온기가 네게 전달되리라. 나의 마음이 너를 녹이리라. 간절하게 주문을 외고 또 외면서.
개를 지나쳐 걸어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착한 개는 고개를 숙인 채 한 걸음 한 걸음 비칠거리며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알싸해졌다. 비로소 고독한 표정을 짓는 법을 배우던 날이었다.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외면하는 법을 터득하던 날이었다. 그런 날 밤에는 으레 착한 개가 되는 꿈을 꾼다. 어디론가 터벅터벅, 그러나 또박또박 전진하는 꿈을. 그러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기다렸다는 듯 ‘헬리콥터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착한 개만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꿈만 같은 세상. 거짓말 같은 세상.
시인은 이 풍경을 바둑기사들의 침묵과 대비시킨다. 착한 개의 걸음을 지켜보면서 잔인한 침묵 위로, 황량한 바둑판 위로 두 개의 손만 오가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한 손이 나와서 흰 돌을 두면, 저쪽에서 손을 내밀어 검은 돌을 두는 장면 말이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아니 한 손 한 손 돌을 두다 보면 바둑판이 가득 메워지고 경기는 끝이 난다. 기사들은 ‘눈빛 없이’ 육성도 없이 ‘서로에게 목례하고’ 마침내 361개의 집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손끝으로 하던 고독한 소통이 비로소 막을 내리는 것이다.
첫 문장을 바꿔야겠다. 얼마 전, 어느 비좁은 골목에서 개 한 마리를 만났다. 마주침이 품고 있는 우연성 이상의 무엇이 우리 사이에는 있었다. 마주침이라고 하기에는 그 여운이 너무 길었다. 착한 개처럼 나도 착해지고 싶어졌다. 왼발 다음에 오른발을 내밀고 싶었다. 흰 돌 다음에 검은 돌을 놓고 싶었다.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고독하더라도 그렇게 임무를 완수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오는 어떤 순간. 한 사람과 한 사람은 같이 있지만, 둘 다 외로움을 느낀다. 누구는 너를 이겨서, 또 다른 누구는 너에게 져서. 경기가 끝난 후 악수를 하며 온기를 나누는 게 절실해지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외로워서, 고독해서, 둘이서 함께라면 네 개의 발을 가질 수 있으니까.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